[조용호의 문학공간] "여성들이 빚어낸 아홉 가지 빛깔 남자 이야기"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2-16 10:49:33

여성 작가 9인 단편 모음집 '선량하고 무해한 휴일 저녁의 그들'
김이정 박형숙 반수연 부희령 이경란 이성아 이수경 이후경 하명희
나쁘고, 안타깝고, 찌질하고, 연민의 대상인 삶의 동반자들
"제각기 다른 아홉의 남자들이 한데 모여 이루는 풍경"

여성작가 9인이 단편을 써서 한권의 소설집으로 묶어냈다. '남자'를 화두로 소설을 써보리라 작정하고 내놓은 결실이다. 같은 화두를 받아들었지만 이 여성들이 빚어낸 이야기들은 같은 정조가 아니다. 9개의 각기 다른 빛깔로 저마다 빛나는 작품들이다.

▲'남자'를 화두로 소설집을 펴낸 9인의 여성 작가들. 왼쪽부터 이경란, 이수경, 하명희, 부희령, 이후경, 김이정, 박형숙, 이성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경란 하명희 반수연은 이들과 같은 출판사(강)에서 책을 내면서 이번 앤솔러지에 합류하게 된 경우다. 김이정 이후경 박형숙 이성아 부희령 이수경은 같은 스승(소설가 송기원)의 문학 지도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승이 같건 다르건, 문학하는 태도의 기반을 공유하되 모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사를 펼쳐낸다.

남자를 기준으로 굳이 9개의 소설을 분류해보자면, 먼저 '연민'으로 감싸는 유형이 눈에 띈다. 고단한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가난이나 상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찾아든다. 그 대상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삶의 험로를 걸어가는 안쓰러운 존재들이긴 마찬가지다. 이런 시각에서 돋보이는 작품은 김이정과 이후경의 단편들이다.

'당신도 그리운 사람이 있지요? 당신 얼굴에 써 있어요. 못 봐서 고통스러운 얼룩이 있어요.'

이후경은 '사양관(斜陽館)'에서 얼굴에 '얼룩'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유경과 이별하고 울기 위해 수영장을 찾아 물속에 눈물을 섞던 평론가 현준은 설상가상으로 한몸 같은 절친 석규가 갑자기 사망하는 사태까지 직면한다. 그는 유경이 가고 싶어했던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 쓰가루로 훌쩍 떠난다. 그곳에 가면 유경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품고, 숨 쉬듯 쉼없이 눈이 내리는 아오모리를 배회한다.


다자이는 소설 '쓰가루'에서 '태어날 때부터 남자의 오른쪽 새끼발가락에는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묶여 있는데, 그 실은 다른 여자의 새끼발가락에 연결되어 있어서 두 사람은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는 얘기'를 하거니와, 유경이 그 대목을 읽어주었을 때 '우리도 붉은 실로 이어진 건가?'라고 현준이 장난처럼 말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답했다. "우리는 둘다 결혼을 해봤잖아? 그 실은 끊어지고 없는 거지." 현준은 쉼없이 내리는 눈속에서 되뇐다.

'우리가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넓디넓은 우주에서 먼지 같은 우리가 잠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부질없는 세상에서, 이런 부질없는 만남이란 것은 죽음으로 갈라지든, 삶 속에서 갈라지든,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꺽꺽 눈물을 쏟으면서 나는 나를 둘러싼 숱한 붉은 실들을 보았다. 하나도 끊어지지 않은 그 붉은 실들을.'

왜 현준이 유경과 이별해야만 했는지, 구체적인 사연은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는 여성의 시각으로 쓰려고 했으나 먼저 1부 격으로 남자를 내세웠다니, '사양관2'에서 더 깊은 내막은 알아볼 일이다. 김이정은 '하이엔드 라이프'에서 '내 가난은 어찌해볼 수 없는 명백한 부도덕'이라고 말하는 남자를 등장시킨다.

남자가 오랫동안 소망하다가 처음 갖게 된 오디오는 어머니가 다니던 공장에서 3개월치 월급 대신 받아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기 직전에 돌아가시자 그는 상업고등학교로 진로를 틀었고 바람대로 은행원이 되었다. 두 번째 오디오가 생긴 것은 스물다섯 살 때였고, 스물두 살에 만난 입사 동기인 연상의 동료 은행원은 어느날 만취한 채 울면서 중얼거렸다.

'싸구려 오디오밖에 가진 게 없는 당신을 도저히 집에 소개할 수가 없었어. 우리 부모 반응이 너무 뻔한데 어떻게 해.'

서른 다섯 살에 다시 오디오를 바꾸었고 증권회사 직원과 결혼했는데, 생활력이 강한 이 여성은 선물 투자를 하다가 망했다. 집을 팔고 퇴직금을 받아 아내가 진 빚을 갚은 뒤 파산신청을 해서 남자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짐을 버리고 오디오만 챙겨서 폐인처럼 숨어 살면서 대리운전을 하는 신세다.

그에게 이명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외계의 신호인 것처럼 선명했다. 하이엔드 오디오보다 생생한, 오직 그이에게만 들리는 선명한 현실의 고음이었다. 오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으로 아무리 현실을 감싸려고 해도 이명은 '숨어 있던 용병들처럼 떼로 몰려' 왔다. 끝까지 잡고 싶었던 오디오라는 위로마저 그는 놓아야 했다. 남자와 여자의 배역을 바꾸어도 큰 무리는 없다. 이들은 '이명'과 싸워야하는 가난한 '사람'들일 뿐이다.

▲같은 스승(소설가 송기원·작은 사진)의 문학 지도를 받은 인연으로 만난 이후경, 김이정, 박형숙, 이성아(왼쪽부터).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부희령의 남자들은 나쁘고, 안타까운 놈이며 하명희 남자는 찌질하다. 부희령의 '콘도르는 날아가고'는 맹랑한 열두 살 여자 아이의 시각으로 전개된다. 아버지라는 남자는 며칠 만에 한번씩 집에 들러 바닥에 널브러진 어머니의 배 위에 돈다발을 던지고, 어머니는 돈을 찢는다. '어머니도 생각이 있으니,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조각조각 찢은 건 아니었다.' 동네 돌집 저택의 '나쁜 남자'는 빨간 포니에 아이를 태우고 상처 난 가슴을 길고 집요하게 만졌다. 계속 눈길이 가던 '안타까운' 소년과 여자 아이는 그 남자에 대한 복수를 시도한다. 시종 위악적인 포즈로 발랄하게 전개하는 문체와 거리를 유지하는 서사 기법이 자칫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흥미롭게 읽히도록 만든다. 부희령은 "이전에는 세상 사람들을 막연히 어른과 아이로 나누어 생각했으나, 이후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가 더 선명해졌다"면서 "열두 살 여자아이의 눈과 목소리를 다시 꺼내 쓰는 일은 상쾌했다"고 썼다.

'오래된 서점에서' 하명희는 고등학교 문예부 시절 만난 남자를 떠올린다. 30여 년 유지되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문을 닫는다는 기사를 접하고 그곳을 방문한 '은하'는 1990년 4월 21일 연극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딱 하루 상연되었음을 알려주는 포스터가 아직도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시절을 회상한다. 남자 아이는 이 연극을 보자고 해놓고 늦게 나타나 티켓 살 돈도 없으면서 그녀의 호의에 기대어 혼자 연극을 보러 들어가면서 서점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녀석은 연극이 끝나면 다시 서점에서 책을 볼 작정이었다. 문학의 밤 낭송을 해달라고 추근대던 놈, 학교 앞에서 일기장을 건네며 자기 글을 보여주던 녀석은 '혼자 있는 걸 못 견디면서도 둘이 있으면 자기 속에 매몰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다시 들르겠다는 말은 삼십 년 전 어느 봄날 내가 그에게 하려던 말은 아니었지만 시간의 더께가 얹어져 두툼하고 다정하게 내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시간의 더께'는 부희령처럼 아픈 사연도 거리를 둔 채 발랄하게 기술하게 만들어주고, 하명희의 '찌질했던 놈'도 두툼하고 다정한 회상으로 꺼내게 만드는 힘일 터이다.

박형숙과 이경란은 남자들을 보다 진지하게 탐구한다. '다정 모를 세계'에서 오래된 부부의 서걱거리는 현주소를 세심하게 묘파한 이경란의 서사는 생생하고 진솔하다. '준우'를 만난 지 31년째인 '다정'은 '해사하고 담백했던 준우가 장어 소스처럼 칙칙하고 걸쭉한 남자로 변한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꾸준히 서서히 그렇게 변해왔기 때문이다.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러 다정은 준우가 음식을 먹으며 내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코 고는 소리, 소리들을 녹음하기 시작한다. 다정이 모텔에서 만나곤 하는 남자는 언젠가 둘이서 '아바나'에 가자고 했다. 다정은 그 생활 소음의 파일 제목을 '아바나 1,2…'로 저장한다. 무관심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접어든 부부의 일상이 섬뜩하게 세밀해서, 흡인력이 강한 단편이다.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표제로 삼은 박형숙의 소설에서 남자 M은 아내가 보낸 메일을 접한 뒤 자신을 돌아본다. M의 아버지는 폭력적이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교회에 깊이 빠진 맹목적 신도였다. 아내가 보낸 리하르트 데멜이라는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눈에 밟혔다. '나는 아이를 가졌어요, 당신의 아이가 아닌. 나는 당신에게 죄를 지었어요. …당신이 품은 아이를 영혼의 짐으로 여기지 마오. 봐요, 이 우주가 얼마나 밝게 빛나는지...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이 열기가 낯선 이의 그 아이를 정화시킬 거요.' 군에서 휴가 나오기로 한 아들 '환'이 그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할 것인가. M은 생각했다.

'시처럼 나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환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그래도 여전히 아내의 아들이겠지. 아내가 나의 아내인 한, 아들 또한 나의 아들이겠지. 토요일에 환이가 휴가를 나오면 우리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외식을 하며 단란한 가족 풍경을 연출하겠지.'

박형숙은 "인간에게는 종종 본능을 넘어서는 감정이나 행위가 있지만 핏줄에 대한 부정 또한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그러니 정화된 밤이란 쇤베르크의 까다로운 음악처럼 누구나 맞이할 수 있는 밤은 아닌 것 같다"고 후기에 썼다.

▲이경란(왼쪽), 하명희(왼쪽에서 세 번째), 반수연(작은 사진)은  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낸 인연으로 이번 소설집에 참여했다. 부희령(오른쪽)과 이수경(왼쪽에서 두 번째)은 송기원과 인연을 맺은 경우.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아버지 세대 남자들의 폭력과 부도덕은 자주 눈에 띈다. 캐나다에 거주하며 이번 소설집에 참여한 반수연은 '빅터 아일랜드'에서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로 갔다가 폭력에 노출돼, '포르쉐'에서 허망한 만족을 구하는 '규'라는 남자를 그려낸다. 회계사였던 그는 "사람들을 추궁해서 세금 도둑을 잡아내고, 밥을 먹고, 또 일을 했지만 한 번도 그게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떠나왔지만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밤이면 (포르쉐) 바퀴 틈새의 명암까지 상세히" 그리곤 했다. 포르쉐를 타는 '거지'가 되어 아내와 딸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그에게 아내가 보고 싶어한 오로라는 피곤하게 감긴 눈속에서나 명멸할 뿐이다.

반수연은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고 나니, 원점이 어딘지 더 모르겠다"면서 "남자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도 같다"고 썼다. 이성아의 '유대인 극장'은 사람 사는 이야기의 섬뜩한 이면을 들추면서 극단적으로 찌질한 사이코 남자와 '혐오'에 대해 강하게 발언한다.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으로 바르샤바 레지던시 중인 작가에게 언니가 느닷없이 찾아온다. 피아니스트로 각광받던 그녀는 지휘자의 추근거림을 뿌리치지 못해 불미스러운 여자로 찍혀 이혼까지 당한 뒤, 칼을 들고 쫓아다니는 그 남자를 피해 동생에게 온 처지였다. '나'는 어린시절 언니를 질투해 악보를 날카로운 면도칼로 그어댄 적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환기하게 된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색다른 실험극을 경험하면서 '혐오의 감염'을 실감하고, 우리 모두는 기실 '혐오'의 주체일 수 있다는 섬뜩한 자각에 이르게 한다.

이성아는 "해외여행을 하면서 한번은 은발을 곱게 빗어 넘긴 자그마한 할머니로부터, 한번은 10대 백인 소녀들로부터 혐오 발언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면서 "혐오의 언어는 번역이 필요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썼다. 표제작으로 뽑힌 이수경의 '선량하고 무해한 휴일 저녁의 그들'은 아무도 뚜렷한 폭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그 가능성과 두려움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단편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휴일 저녁에 딸 '수아'가 남자 친구를 집에 데려와 남편이랑 함께 술을 마시며 어울린다. 수아가 아직 학생일 때 엄마는 딸의 카카오스토리에 '수아야, 사랑해'라고 올렸는데, 자살한 학생의 대사였던 이 문구에 놀란 아이들이 법석을 떨기도 했다. 수아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아내와 잠시 말다툼을 벌였는데 장난스럽게 아내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했다. 아내는 "그것은 폭력이라기보다는 모욕에 가까웠다"고 토로한다. 수아와 남자친구를 캠핑 장소에 남겨놓고 온 날 저녁, 비는 내리고 수아는 "아빠, 사랑해"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말한다. 무해하고 선량한 그들이지만, 폭력의 기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불온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솜씨가 돋보인다.

이수경은 "어디에서든 명석하고 건강했던 나의 엄마가 유약한 '남자' 아버지의 '힘'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던 어떤 날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면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권력,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어도 태생적으로 갖게 된 힘, 그 권력과 힘에서 느끼는 폭력의 가능성과 두려움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김이정은 "종류도 다양한 남자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곳곳에 지뢰처럼 혹은 요람처럼 있었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남자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면서"여기 아홉 편의 소설들 역시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수록작가들을 대신한 서문에 썼다. 그는 "어쩌면 남자란 무엇인가, 곤혹스럽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다만 제각기 다른 아홉의 남자들이 한데 모여 이루는 풍경이 궁금할 뿐"이라고 맺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