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소심하고 지질한 남자들이 당면한 웃기고 슬픈 현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1-19 16:58:58

'빵틀을 찾아서' '강원도 마음사전' 펴낸 김도연
대관령 고향 마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연 그려
산문집에는 잃어버린 강원도 옛말과 사연 담아
"아직도 빵틀을 찾아 헤매는 덩치만 커진 어른들"

근년의 소설에서 중·노년 남성의 삶은 잘 보이지 않는다. 쓰는 이들이나 읽는 층이 상대적으로 젊고 여성인 경우가 많기 때문인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다 이제는 더이상 '꼰대'들의 남성 중심 언설이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마을에서 태어나 줄곧 그 언저리를 떠나지 않은 작가 김도연은 고향을 무대로 줄기차게 소설을 써왔다. 최근 펴낸 다섯 번째 소설집 '빵틀을 찾아서'(문학동네)도 배경은 대체로 여전하지만, 갈수록 작아지고 지질해지는 남자들의 현실을 드러내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관령 인근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다양한 서사를 이어온 소설가 김도연. [ⓒ정희성 · 문학동네 제공]

-아니, 우리가 지금까지 돈 버느라 얼마나 개고생했습니까? 이제 좀 시간 나서 가정에 충실하려 하는데 다들 상대해주지 않는 겁니다. 자식들이야 취업 준비니 결혼 준비니 바쁜 거 이해 가는데 와이프가 왜 덩달아 바쁩니까? 저번엔 뭐라 그런지 압니까? 일찍 들어오지 말고 차라리 예전에 하던 대로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오란 겁니다. 아, 이거 돌아버리겠더라고요. 아니, 우리가 그동안 직장 다니면서 술 마시고 싶어서 술 마셨습니까?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경우가 더 많았잖아요. 그렇게 일해서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믿었던 와이프마저 헌신짝 취급하니….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9편 중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지질해지는 남자들을 등장시킨 '말벌'에서, 주말농장에 모인 남자들에게 '박'이 토하는 열변이다. 박은 그날도 아내에게 언제 들어오느냐고 물었는데 "몰라, 들어갈 때 되면 들어가겠지"라고 돌아온 답변에 빈 막걸리 병을 원두막 천장에 던졌다가 말벌집을 건드리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갔다.

눈을 떠보니 어디선가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주위가 캄캄해서 살펴보니 관속에 갇혀 있는 그의 운구행렬이었다. 관뚜껑을 부수고 튀어나와 길길이 화를 냈더니 문중 어른들이 회의를 거쳐 "온 집안이 혼란에 빠지는 걸 자네도 바라지 않을 테니 원래 가던 길을 가는 게 좋겠다"고 타일렀고, 아내는 "미안하지만 부의금 받은 거 일일이 다 돌려주려면 너무 힘들고 당신 퇴임하면 농촌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난 도시 떠나서 못 산다"고 외면한다. 원주에서 전업작가로 살고 있는 그를 전화로 만났다.

"젊었을 때는 큰 꿈을 갖고 있었을 테지만 갈수록 조금씩 작아지게 마련이고, 남자들 입지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이런 이야기들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이런 남자들에 대해 소설로 말하는 걸 선호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같은 남자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좀 말해야 되지 않나 싶었어요.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인데 작아지는 모습들이 좀 안타깝기도 하고, 반면에 또 너무 많은 걸 가졌던 걸 원위치로 돌려놓는 과정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말벌'에 등장하는 남자는 짐짓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마을에서 제일가는 사나이'에 나오는 봉태라는 사내는 지질한 남자의 전형이다. 중장비 기사인 이 사내는 비 오는 날 오후 벌어진 술판에 이어 단란주점까지 갔다가 도우미와 눈이 맞았는데 아내의 추격을 피하느라 진땀을 뺀다. 그의 무의식은 꿈으로 나타나거니와, 꿈속에서 수탉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말머리를 돌리다'에 나오는 남자는 벤처사업으로 부자가 된 동창 Y가 고향의 말 목장에서 연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친구의 말을 몰래 타고 읍내로 나간다. 점잖은 공무원 체면에 망설였지만 끝내 다방 여성 '직원'을 앞에 태웠고, 말 위에서 고량주까지 중국집에 주문해 마시고 말에게도 물에 타서 먹였다가 달리기를 멈추지 않은 말 위에서 여자와 함께 오줌보는 터지고 허벅지와 사타구니는 피부가 벗겨지는 통증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은 내리지 못한 채 말이 술에서 깰 때까지 달려야만 한다.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욕망과 생각들이죠. 주변 또래 남자들 행태를 보면 안 좋은 것도 많아요. 어떤 사람들은 어렸을 때 꿈이 조금씩 꺾이면서 소심해져 가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저항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내를 속여가면서 그렇게 지질한 짓들을 계속 해 나가기도 합니다."

표제작 '빵틀을 찾아서'에서 아이는 '빵틀'을 찾아 여러 집을 전전한다. 비 오는 날 놀러나가지도 못해 아이가 엄마에게 빵을 구워 먹자고 조르는데, 동네에서 자신의 집에만 있는 무쇠로 만든 사각형의 빵틀을 다른 집에서 빌려갔단다. 남편이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월남댁, 동네 아저씨들이 술판을 벌인 재설댁,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대장집, 강밥을 튀기는 고모집 들을 돌아다닌다.

▲'강원도 마음사전'에 수록된 김도연의 추억 앨범. 겨울이면 눈이 그치지 않던 대관령 마을에서 어머니·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왼쪽)과 중학생 시절 점심 시간 전에 미리 도시락을 까먹던 교실 풍경(머리에 손을 받친 이가 작가). [걷는사람 제공]

김도연은 이 소설집에 앞서 펴낸 산문집 '강원도 마음사전'(걷는사람)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언어를 복원하고 그 말에 깃든 사연을 담아냈다. 이 산문집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이번 소설집에 나오는 강원도 옛말들을 해설하는 보완 기능도 충실히 수행해낸다. 이를테면 노름빚 때문에 눈쌓인 산속에서 움막을 짓고 지내는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겨울잠'의 무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산문집 '대굴령' 대목을 펼쳐보면 좋다.

-폭설이 그치면 그제야 산골 사람들은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대문 밖으로 나가 마을을 덮은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달부(전부) 어엽게(어이없게) 내렸네야!"

'탁구장 근처'와 'OK목장의 여름'은 이즈음 여러 채의 집을 보유해놓고 책임을 못 지는 전세 사기 문제가 시끄러운데, 작가 자신이 이 난경을 먼저 겪은 실제 체험을 반영한 단편들이다. 산문집에 등장하는, 영세민들의 터미널 같았다는 '원주, 흰구름아파트'가 실제 모델이다. 산문집에는 작가의 사연들과 함께 '젠놀이' '된' '갈풀' '달그장' '새뿔' '눈꼽재기창' 같은, 그 자체로 시적인 강원도 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김도연은 "빽빽한 표준어의 숲에서 살고 있지만, 누군가 어린 시절 말들을 불러오면 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즐거워진다"고 썼다. [김도연 제공] 

"엄마한테서는 집 안에 관련된 말들을 배웠고 아버지로부터는 집 밖에 관련된 말들을 배웠는데 학교라는 곳은 표준어를 가르치는 곳이어서, 결국 고향의 어떤 말들은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걸 나중에 다시 찾아내려고 했는데 한 번 잃어버린 말을 찾는다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고향집에 가면 부모님이 하시는 말들 중에서 재미있는 말이 있으면 받아 적고, 취재도 했습니다. 너무 많은 귀한 말들과 그 말이 담고 있던 것들을 잃어버려 안타깝습니다."

소설집에는 위에 언급한 단편들 외에도 개 사육을 하는 친구에게 아내와 여행 가려고 모아둔 돈을 빌려줬다가 친구의 파산으로 인해 구박을 받는 남자 이야기를 담은 '셰퍼드'와, 추석을 맞아 고향에 돌아와 겪는 이야기가 차분하게 전개되는 '전재와 문재'가 수록됐다. 김도연은 "다시 들여다보니 이번 소설집 등장인물들은 덩치만 커졌지 아직도 빵틀을 찾아 찢어진 우산을 쓴 채 마을의 집들을 방문하는 소설 속 소년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 소설들은 소년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어른이 되어서도 빵틀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썼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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