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드라마'면 어떤가,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는데"
박상준
psj@kpinews.kr | 2023-01-18 10:55:00
산업화 성과 보여준 국책 드라마지만 시청률 40% 기록
첫 해외 로케이션과 최은희, 박노식 등 초호화 캐스팅 화제
1970년대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압축성장 시대였다. 군부독재의 질곡과 저임금과 노동인권탄압 등 그늘도 있었지만 한국경제가 활화산처럼 솟구쳐 오른 역동적인 시기였다. 시련과 빈곤에서 탈출해 눈부신 산업화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1974년 TV드라마로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이 KBS 일일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이다.
'국뽕 드라마의 원조'라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꽃피는 팔도강산'은 주 5회 방송으로 장장 398회에 걸쳐 방영되면서 시청률 40%에 육박하는 기록적인 성공작이었다. 택시운전사들도 이 드라마 방영시간엔 TV가 있는 다방을 찾아 택시잡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었다고 한다.
김희갑, 황정순, 장민호, 최은희, 박노식, 문오장, 태현실, 전양자, 김용림, 한혜숙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고 드라마 사상 최초로 해외 로케이션과 녹화 차량을 이용했으며 2008년엔 중국판으로 리메이크돼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1974년 '꽃피는 팔도강산'이 방영된지 벌써 50년이 흘렀다. 혈기 넘치는 30대 중반에 시나리오를 집필한 윤혁민 작가도 올해 85세다. 윤 작가에게 '꽃피는 팔도강산'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새마을운동과 경제성장 등 박정희 정권에 대한 과도한 미화로 '계몽드라마'라는 비판에 시달리면서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 '잡가'라고 자조하기도 했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을 조명하고 가족과 공동체의식의 소중함을 강조한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충남 천안시 동면의 한갓진 전원주택에서 5년 전 부인을 먼저 보내고 홀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윤혁민 작가를 만났다. 한쪽 다리가 불편해 걸을 때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만 여전히 직접 운전을 하고 기억력도 비상하며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내가 라디오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다가 '1통2반3번지'라는 TV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김수동PD와 함께 일을 하게 됐다. 당시 최고 코미디언인 배삼룡과 구봉서가 출연한 작품으로 내 TV데뷔작이기도 하다.
이때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이 국책드라마 형식의 '꽃피는 팔도강산'을 KBS에 제안하면서 배우까지 직접 섭외했다. 제목을 정한것도 윤 장관이다. 그 때 김 PD가 연출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작가로 합류하게 됐다.
-400회에 달하는 드라마 시나리오를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쓰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소재는 어디서 구했나.
"처음 이 작품의 작가로 제의받았을때 무척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스케일이 큰데다 정부에서 주목했던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소재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산업현장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스토리를 구상했다.
하지만 늘 마감시간에 쫓겨 당시 KBS가 있던 남산밑의 여관 방에서 밤새 '쪽대본(촬영직전에 찍을만큼만 바로 만든 한두 쪽 자리 대본)'을 써댔다. 이 때문에 이 드라마를 맡은 이후 1년 6개월간 귀가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시청률은 높았지만 '유신정부'를 찬양한다는 비판도 많았을 것 같다.
"당시엔 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로 산다는 시청자도 많았지만 정책홍보만 한다며 '어용작가'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드라마로 새마을훈장을 받자 신봉승 작가가 '작가가 문화훈장을 받아야지 새마을훈장이 뭐냐'고 힐난했다.
하지만 난 문화훈장보다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작품으로 받았으니 새마을훈장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시절 선진국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는 드라마 이상이다. 그 시대엔 반드시 필요한 드라마다"
-'꽃피는 팔도강산' 시나리오를 쓰면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텐데.
"지금은 고인인 된 경제계의 거물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늘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점퍼를 입고 다녔다. 그는 내게 점퍼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연도 얘기해주었다.
늘 일과처럼 새벽 5시 울산공장을 돌다가 발을 헛디뎌 바다에 추락하면서 간신히 줄을 잡고 있다가 한 시간만에 순찰을 돌던 경비원에게 구출됐다고 했다. 힘이 빠진 상황에서 공기가 찬 점퍼가 튜브 역할을 하면서 살아난 것이다.
정 회장은 이 드라마에 애정이 많아 파리 로케이션을 갈 때는 장도금으로 당시엔 큰돈인 1000달러를 주기도 했다."
-2008년 중국판 '꽃피는 팔도강산'이 방영됐을 때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중국에선 '종착역'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됐는데 시청률(9.75%)이 높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중국측에서 '꽃피는 팔도강산' 대본을 팔라고 했지만 대본을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드라마를 리메이크하면서 저작료를 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했지만 700만 원을 보내왔다. 종착역은 베이징올림픽 때 MBC에서도 방영됐다."
-'꽃피는 팔도강산'이 종영된지 30여 년만인 2006년 포스코에서 작가님과 출연진을 포항공장으로 초청했을 때 분위기가 어땠나.
"우연한 계기로 초청행사가 마련됐다. 당시 국내에서 드라마로는 처음으로 한국일보에 광고를 낸.적이 있는데 그 광고자료를 구하기 위해 포스코로 연락했다. 이를 보고받은 윤석만 사장이 마침 70년대 드라마가 방영될 때 포철의 담당직원이었다. 고인이 된 분들이 여럿이 있어 최은희, 황정순, 장민호 씨 등 18명이 참석했는데 일부 배우 중엔 감개무량해 우는 분들도 있었다."
-1970년대 최대 화제작인데도 불구하고 KBS에 방송자료가 거의 없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꽃피는 팔도강산'뿐만 아니라 '아씨', '여로'등 기념비적인 드라마의 영상자료도 없다. 당시엔 비디오테이프가 부족해 지우고 다시 쓰는일이 많았으니 그랬을 것이다. '팔도강산' 대본은 교보문고 창업자가 책을 내겠다며 빌려갔는데 그 분이 사망한뒤 찾지 못했다. 그땐 국영방송조차 귀중한 문화자산인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꽃피는 팔도강산'외에도 인기작이 많았다. 1960년대엔 라디오연속극으로 주가를 올렸다고 들었다.
"난 TV와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합쳐 200편을 썼다. 그리고 객원PD로도 활동했다. '내일은 맑음', '빨간 선인장' '꿈꾸는 해바라기'등 영화로 제작된 작품도 여럿이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 내가 연출한 한운사 극본 '남과북'이라는 라디오드라마를 듣기 위해 누군가 가져온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승객이 모두 모여 숨을 죽이고 듣는 것을 보고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했다."
-작년 11월 작가 한운사 선생님의 고향인 충북 증평 '한운사 기념관'에서 열린 추모제도 주도하셨다. 각별한 인연이 있나.
"내가 20대초에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쓴 시나리오가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을 때 심사위원이 한운사 선생님이었다. 그때 인연으로 스승처럼 모셨는데 마침 충청도 동향으로 그분은 청주상고, 난 청주고를 졸업해 더 가까워졌다.
지난번 추모제 때는 김수현 작가, 성우 고은정 씨, 배우 노주현 씨 등이 먼길을 마다않고 참석해 무척 고마웠다."
-라디오연속극과 TV드라마 작가로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보내셨다. 요즘 드라마도 보시나.
"지금도 드라마를 더러 보기는 한다. 김은숙 작가처럼 제대로 공부한 재능 있는 후배들도 있지만 때론 시청률에 너무 연연해 도무지 개연성도 없는 상식 이하의 막장드라마를 볼 때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시골에서 홀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전원생활을 하게된 사연이 있나.
"경기도 안산 예술인아파트에 살다가 고향인 천안 동면으로 내려왔다. 아내가 5년 전 먼저 떠나 홀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별채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제자들이 살고 있어 적적하다는 생각은 안든다.
제자들이 대본을 쓴 MBN드라마 '보쌈-운명을 훔치다'가 높은 시청률(9.8%)을 기록해 나름 대견스럽다. 더구나 이곳에 살면서 천안에 말벗이 되는 좋은 지인들도 많아 하루에 한 번씩은 외출한다. 불편한 점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이곳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고 있다."
KPI뉴스 / 박상준 기자 psj@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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