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명 작가 '아르망'을 밀어낸 한국 조각가
'적록색약'이 뺏은 화가의 길, 조각가로 부활
알루미늄 소재, 순환 주제의 '단백질·사과' 연작▲ 조각가 전용환이 13일 오후 천안 작업실에서 진행된 UPI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조각가 전용환은 본디 돌을 다뤘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 작가 아래서 십여 년 돌과 씨름했다. 하지만 그의 갈망은 또 다른 곳을 향했다. 서너 달 고민 끝에 그는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그렇게 모험처럼 시작했다. 그곳에서 세계적인 '다비드' 상을 보며 다시 돌을 만졌지만 한 걸음도 더 뗄 수가 없었다. 와신상담하던 그에게 재독 선배 한인 예술가는 염장을 질렀다. "돌만 더 좋아졌지 작품은 전보다 못해."
선배는 그를 당시 세계 4대 아트페어로 불리던 '쾰른박람회'로 이끌었다. 전용환은 그곳에서 내면의 꿈틀거림을 느꼈다. "사실 과학 박람회인지 미술 전시회인지 도통 분간할 수 없었어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놈이 서울 구경하며 놀라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쾰른에서 느낀 충격에 대한 고변이다.
그는 당시 현대미술의 큰 축인 '개념미술'에 대한 아련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마침 들른 쾰른박람회에서 느낀 충격과 혼돈은 차원이 달랐다. 그가 그동안 상상하던 '개념미술'의 범위나 한계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갈망이 솟구쳤다. 돌을 깎는 일이나 기존 작품의 주제가 꼭 정해진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예 독일의 선배 작업실에 눌러앉았다. 평일에는 선배의 작업을 도왔고 혼자 남겨진 주말엔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 자신과 사투를 벌였다.
▲ 조각가 전용환이 알루미늄 용접에 몰두하고 있다. [전용환 제공] 운명이었을까. 인근 공장 주변에 버려진 알루미늄 선재들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그 순간 '아! 이거다'라고 각성했다. 당시 그곳에서 일하던 공원들도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는데 그나마 이탈리아 생활 덕에 어렵지 않게 소통하며 더 많은 재료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조각가 전용환은 알루미늄 선재와 인연을 맺었다.
"영원한 물질은 없지만 알루미늄은 사실 거의 영구적이에요. 표층에 생긴 녹이 코팅제 역할을 하거든요. 또 알루미늄은 일반 철재와 달리 구부리고 자르고 휘기 쉬어 작품 작업에는 안성맞춤이죠." 그의 알루미늄 예찬론이다.
당시 그는 또 우연히 '사이언스'지에서 '단백질 구조'를 봤다. 또다시 감이 왔다. "당시 현미경으로 미시세계를 보곤 했어요. 작은 돌멩이 에도 우주가 있었죠. 그런 신기한 모습은 여러 상상력을 낳았죠. 사이언스지에서 단백질 구조를 본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 조작가 전용환, 알루미늄 '순환' [전용환 제공] 그는 이 새로운 소재와 주제를 벗삼아 30여년 '단백질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당시 알루미늄 첫 작품을 만들고 너무 기뻐 지인들을 모두 모아 축제까지 벌였다고 회상했다. 먼 이국땅에서 드디어 자신이 갈망하던 자신만의 예술 방향을 찾았기 때문이다.
독일 겨울은 춥고 습하다고 했다. 그는 그런 겨울에도 작업실 마당에서의 작업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던 벽안의 신사가 있었다. "구경꾼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화랑을 운영하는 이였죠. 그와의 인연으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암스테르담아트페어'에 출품할 수 있었죠. 먼 이국땅에서 누군가 나의 작품을 알아봐 준다는 게 신기하고 감사했죠."
보통 유명 아트페어는 사전에 출품작을 결정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해당 작품을 바꾸는 일은 드물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당시 그 갤러리스트는 전용환의 작품을 박람회에 내놓기 위해 기존의 작품을 철회했다. 당시 그가 철회한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조각가이자 화가인 '아르망(Armand Pierre Fernandez)'의 것이었다. 그렇게 전용환은 이국땅에서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트페어 출품작은 네덜란드 최고 갑부의 손에 들어갔다.
▲ 조각가 전용환 '사과시리즈' [전용환 제공] 사실 대중이 잘 아는 전용환의 대표작은 '단백질 시리즈' 보다는 '사과 시리즈'에 가깝다. 미술계엔 세잔의 사과, IT업계엔 스티브 잡스의 사과, 그리고 한국 조각계엔 전용환의 사과가 있다는 우스갯소리와 작가 이름은 몰라도 '사과 시리즈'는 안다는 얘기가 회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사과'는 꽤 유명하다.
특히 그의 사과시리즈 가운덴 외형도 탁월하지만 개념미술에 있어 꽤 유의미한 것이 있다. 이중 구조를 가진 사과 시리즈는 압권이다. 이 사과 시리즈의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작가는 1cm의 두꺼운 알루미늄 판재를 자르고 붙이고 깎고 색칠해 입체 사과를 만든다. 처음엔 2차원 평면 판재를 정교한 수학 계산에 바탕을 두고 선재와 나머지 판재로 나눈다. 원래 판재는 서로 이어져 둥근 입체 사과로 변하고 오려진 선재들은 서로 용접돼 사과 외부를 감싸는 망으로 바뀐다. 얼핏 보면 참 경제적인 활동처럼 보인다. 판재 하나가 남김없이 모두 사용되니 말이다.
주목할 점은 2차원의 평면 판재 하나가 2개의 3차원 형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점이다. 또 작품은 나중에 어떤 공간에서 긴 시간 존재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시간과 연결돼 4차원적 사고로도 유추될 수 있다. "작품의 개념은 순환이에요. 순환이란 사유적 개념을 실체로 만든 것이죠." 결국 그의 말은 2차원이든 3차원이든 모두가 같은 순환의 고리에 있고 모두 하나에서 오고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읽힌다.
순환이란 주제는 21세기 현대미술 주제의 중요한 '시대정신' 가운데 하나다. 이미 많은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주제를 탐닉해 왔다. 하지만 그의 순환론은 차원을 매개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타와 달랐다.
▲ 조각가 전용환이 '사과 시리즈' 작업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용환 제공] 그는 현재 천안 외곽에 너른 터에 작업실을 세웠다. 천안과의 인연은 어렵던 시절 형의 과수원 한켠을 얻어 작업한 것이 시작이었다. 20여 년 전 우연히 맡은 조각상 작업 덕에 작은 밑천이 생기자 그는 덜컥 현재 작업실 터를 얻고 뿌리를 내렸다. 이 터에는 작업실과 전시관 두 동이 서 있다. 그와 인터뷰를 진행한 13일 초저녁엔 작업실 한켠에서 이젠 추억이 된 연탄난로가 기습한 동장군과 힘을 겨루고 있었다.
전용환 작가는 어린 시절 화가를 꿈꿨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자신이 화가가 될 수 없는 '적록색약'을 가진 저주받은 운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는 붓을 놓는 대신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해 이제 천직이 된 조각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작품을 해 아이들을 키우고 학교도 보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전 작가는 지금도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모든 작업을 혼자서 진행한다. 처음과 끝이 하나라는 지론 때문일 게다. "가끔 작업실을 들르는 막둥이가 사실 최고의 조수예요. 망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영락없이 망치를 들고 뒤에 서 있거든요."
전 작가는 "예술가는 사실 배고파야 해요"라고 말한다. 40여 년 조각가의 고단한 삶이 스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