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밀 독과점시장 구조…대부분 미국·호주·캐나다산
정부 뒤늦게 밀 산업 육성법 제정…실효성 있는지 의문
제분·건조·저장 시설 등 관련 산업 인프라부터 마련해야 ▲ 충남 홍성 우리밀 수확 현장. [충남로컬푸드 제공] 이인교(54) 씨는 서울 영등포에서 우리밀 전문 빵집을 운영한다. 이 씨가 우리밀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빵맛 때문이다. 수입밀 과는 맛이 다르다. 이 씨는 "우리밀 만의 맛, 쉽게 말해 맛에 깊이가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가격이다. 이 씨는 농가, 제분공장, 협동조합 등에서 밀을 공급받는데, 수입산보다 서너배 비싸다. 우리밀은 그만큼 귀하다. 국산 밀 자급률은 1%에 불과하다.
운용면에서 예기치 않은 이점도 있다. 이 씨 빵집은 최근 밀가루 값 인상 파고를 비켜갔다. 우리 땅에서 난 우리밀이라 국제곡물가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덕이다. 이 씨의 바람은 우리밀 생산이 늘어 좀 더 싼 가격에 우리밀을 공급받는 것이다.
50년 간 꾸준히 증가한 밀 소비…위기의 '식량안보'
밀은 지난 50년 동안 우리나라 양곡 1인당 연간 소비량 추이가 가장 굳건한 곡물이다. 식량안보 차원에서 자급률 확대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가 발간한 '2021 농림축산식품 주요통계'를 보면 1970년 1인당 연간 26.1kg이던 밀 소비량은 2020년 31.2kg으로 늘었다. 반면, 쌀은 같은 기간 136.4kg에서 57.7kg, 보리는 37.3kg에서 1.4kg으로 줄었다. 밀은 국내에서 세계 5대 작물(쌀, 밀, 옥수수, 콩, 보리)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이 소비된다.
소비량에 비해 우리밀 제품을 판매하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도 국내 밀 자급률이 1% 정도인 걸 감안하면 우리밀 제품은 빵, 라면, 과자 등 구색이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온 건 농가의 노력 덕분이다.
쌀로 유명한 전북 호남평야는 우리밀 주산지다. 통상 밀은 10월 벼 추수가 끝나고 난 자리에 파종된다. 겨울 작물이라 수확 시기는 6월이다. 김제 논은 1년에 두 번 황금빛으로 물든다.
▲서울 영등포에서 우리밀 빵집을 운영하는 이인교 씨가 손님이 고른 빵을 자르고 있다. [서창완 기자] 같은 자리에서 수확되는 벼와 밀이지만 처지는 정반대다. 2020년 기준 쌀 자급률은 92.8%, 밀은 0.8%다. 지난해에는 1.2%대로 올라갔다. 1990년대 초 0.05%까지 떨어진 것이 최근 10년간 노력 끝에 1% 선까지 올라선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기후변화 대응과 식량안보 마련 차원에서 민간에서 국산 밀 품종 살리기 운동을 한 덕택이다.
밀 자급률은 왜 바닥일까. 우리밀 업계에선 정부가 오랫동안 수입밀 독과점 구조에 의존해 온 것을 지적한다. 한국제분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호주, 캐나다 3개국에서만 들여온 밀이 220만4000t이다. 이중 220만3000t은 국내 7개 대형 제분회사들이 나누어 밀가루로 제분했다. 전형적인 독과점 구조다.
최근 농산물 가격이 뛰자 나온 대책은 정부가 얼마나 민간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5월 30일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제분업계에 546억 원(밀가루 가격 상승분 70%)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물가 안정 명목으로 대형 제분회사 7곳에 500억 원 넘는 혈세가 투입된 셈이다.
충남 아산에서 우리밀 생산자 조합을 운영하는 이동형 충남로컬푸드 대표는 "지난 30년 동안 1만여 명인 국내 밀 생산자나 소비 가공처에 500억 원이나 되는 예산을 쓴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며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 9월14일 서울 영등포구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밀가루 제품. 20종이 넘는 밀가루 가운데 우리밀 제품은 2종류뿐이었다. [서창완 기자] 현행 수입밀 무관세 구조도 우리밀 자급률을 높이기 어려운 이유다. 현재 대표적인 밀 수출국인 미국, 호주, 캐나다 등과는 이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있다. 이들 나라에서 생산된 밀에는 관세가 붙지 않는다.
전북 김제에서 30년간 밀 농사를 지어온 신정애 참조은밀협동조합장은 "우리나라 밀 산업은 정부가 대기업들과 손잡고 가는 식으로 흘러 왔다"며 "수입산 밀이 무관세로 들여오는 상황에서 우리밀이 경쟁력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 주도 밀 산업 육성에 기대 거는 농민들
국산 밀 자급률을 5%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국산 농가들은 2019년 8월 공포된 '밀 산업 육성법'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일선 농가에선 1984년 정부 수매가 공식 중단된 이후 30여 년을 '생존 기간', 밀 산업 육성법이 제정된 이후를 '육성 기간'이라고 본다.
밀 산업 육성법은 2020년 2월 28일 제정됐다. 농식품부는 그해 11월 '제1차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을 내놓고 2025년 밀 자급률 5%, 2030년 1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놓았다.
▲ 김경민 국립식량과학원 농업연구사가 지난 8월3일 밀 연구동 세대촉진검정실에서 재배 중인 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창완 기자] 5대 분야 14개 과제 로드맵도 마련했다. △생산기반 확충과 품질 고급화 △국산 밀 유통·비축 체계화 △대량·안정적 소비시장 확대 △현장 문제 해결형 연구·개발 확대 △국산 밀 산업계 역량 강화가 큰 줄기다.
전북 완주 국립식량과학원 밀연구동에서 만난 강천식 농업연구관은 "5% 자급률까지는 어렵지 않다"고 자신했다. 강 연구관은 "이전에 수매를 몇 번 한 적은 있는데, 이번처럼 체계를 갖춰서 밀 육성에 나선 건 사실상 처음"이라며 "5%면 10만t인데, 품종 개량과 품질 개발을 통한 소비처 발굴을 해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농식품부가 지난 3월 발표한 2021년 추진 성과를 보면 긍정적 변화도 감지된다. 생산단지가 전년 대비 27곳(2849ha)에서 39곳(5055ha)로, 재배면적은 5224ha에서 6224ha로 늘었다. 생산량 또한 1만7000t에서 3만t으로 늘어났다.
농민들은 지금보다 자급률을 높이려면 인프라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전국에 있는 우리밀 제분공장은 7곳으로 대부분 소규모다. 국산 밀 전용 제분회사 중 최대 규모인 전남 구례 우리밀가공공장에서 제분되는 양이 하루 10t, 250가마다. 연간 약 2800t이 공장을 거친다. 2020년 전체 우리밀 생산량의 15% 정도다.
전남 구례에서 우리밀가공공장을 운영하는 최성호 대표는 "우리 공장 같은 게 지역마다 분포돼 100여 개 정도는 있어야 우리밀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다"며 "주위 생산조직이 만들어지고, 제품 개발과 판매를 다양하게 해 지역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 국내 최대 규모인 전남 구례 우리밀가공공장, 저장창고. [서창완 기자] 건조·저장 시설 확충도 절실하다. 허수종 전북 샘골농협 조합장은 "쌀은 수확하면 산물로 수매해서 저장했다가 도정해서 파는 시스템이 돼 있는데, 밀은 시설이 부족하다"며 "밀의 경우 수확기와 수매 시기가 장마철이기 때문에 시설 완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지난해 밀 전용 건조·저장시설 2곳 지원한 데 이어 올해도 2곳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우리밀 산업 밸리화 사업' 일환으로 진행되는 대형 제분시설 사업지로는 전북 김제와 전남 완도가 선정됐다.
가격 경쟁력 확보를 통한 소비처 마련도 정부와 농가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숙제다. 우리밀과 수입밀의 가격 차이는 3~4배로 수입밀가격 경쟁력은 압도적이다.
허 조합장은 "수입밀과 우리밀 가격 차이를 국가가 메워주는 전략적 직불금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며 "직접 농가에 주는 방법도 있고, 우리밀을 쓰는 가공업체에게 보존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실성 없는 밀 직불금 제도…농가 "소비진작 대책이 더 시급"
정부가 2023년도 예산안에 담긴 직불금제도는 최근 우리밀 농가 반발을 불렀다. 그동안 우리밀 농민들은 직불금이 현행 1ha 당 50만 원에서 250만 원 이상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에도 50만 원을 유지했다. 이는 하계작물인 콩이나 분질미(가루쌀) 직불금(ha당 100만 원)보다 더 낮다. 밀보다 직불금이 2배 높게 책정된 콩의 경우 2020년 기준 자급률이 30.4%다.
정부는 밀 직불금을 늘리는 대신 밀, 콩, 분질미 이모작에 한해 전략작물직불제를 내놓았다. 하계작물인 콩 또는 분질미와 동계작물인 밀을 이모작할 경우 ha당 250만 원의 직불금을 주는 제도다.
▲ 서울 영등포구 우리밀 전문 빵집에 전시된 다양한 밀 품종. [서창완 기자] 밀 농가에서는 전략작물직불제가 오히려 쌀 과잉 생산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국내 대부분 밀 농가에서는 쌀과 이모작을 하고 있다.
손주호 국산밀산업협회 이사장은 "현재 쌀 과잉 현상은 생산이 많아져서라기보다 소비가 크게 감소해서인데, (정부 정책이) 맥을 잘못 짚었다"며 "분질미로 밀 부족분을 대체하겠다는 것보다는 우리밀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게 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농식품부는 우리밀 자급률 향상은 계획대로 진행하되 쌀 생산을 분질미로 대체해 쌀가루 시장도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곽기형 농림축산식품부 식량산업과 서기관은 "밀 생산단지 중 4분의 1이 콩 이모작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쌀 이모작 농가"라면서 "분질미는 이름만 쌀일 뿐 밀과 비슷한 작물이기에 분질미 국내 생산을 높이면 외국산 밀 수입량 비중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KPI뉴스 / 아산·정읍·김제·구례·완주=특별취재팀 송창섭·서창완 기자 seogiza@kpi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