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밀가루 전쟁①] '쌀' 대신 '밀'이 점령한 우리 식탁…내년 봄 '진짜 식량 위기' 오나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 | 2022-09-06 09:47:11

이상기후 확대·원자재 시장 불안·러-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3중고'
국제 곡물가 인상분 국내 물가에 반영…밀 자급률 1% 미만 위험 커져
"가격 이상 주기 짧아져 걱정" vs "안정적 수입선 확보로 문제없다" 팽팽
▲8월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즈흐리우카의 밀밭에서 농민들이 밀을 수확하고 있다. [AP· 뉴시스]

#1. 서울 강동구에서 국수집을 하는 최명선(가명) 씨는 휴업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충남 예산의 모 제면소(製麵所)에서 면을 공급받아 만드는 최 씨 국수집은 '줄서서 먹는' 맛집이다.

최 씨 고민은 원가다. 밀가루 값이 오르면서 면 값도 치솟았다. 올 상반기 박스당 2만5000원 하던 게 현재 4만5000원 선이다. 최 씨 국수집에서 하루에 쓰는 면 량은 개당 1kg 짜리 15~20박스. 단순 계산해도 면 값만 하루 30만~40만원 씩 더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국수 값을 올리기는 했지만 무한정 올릴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난해 5000원이던 최 씨네 비빔국수는 현재 9000원. 최 씨는 "서민음식이기에 국수 한 그릇을 1만 원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답답해했다. 면 값에다 인건비까지 오르면서 최 씨는 식당 운영을 계속 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2. 지난7월20일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부근 황학동 주방거리. 주방에서 쓰는 기구란 기구는 다 파는 곳이다. 이날 낮 기온은 32℃. 바닥이 이글이글 타는 듯 했다. 인적이 뜸했다.

"제빵기기 있나요?"

가게 밖에 앉아 빠르게 부채질 중인 주인에게 물었다. 진열된 제품은 많지 않아보였다. "진짜 살 거냐"고 거푸 물은 가게 주인은 별도 장소로 안내했다. 그곳엔 커피머신, 오븐, 제분기 등이 가득했다. "밀가루 값이 너무 오른 데다 경기마저 좋지 않아 폐업점포에서 나온 새 것 같은 중고제품들"이라고 했다.

국제곡물 가격이 한국인의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가격 급등이 영세 자영업자를, 서민 가계를 덮치고 있다. 밀가루가 대표적이다. 한국인의 식탁에서 밀가루 비중은 쌀만큼 커졌다. 오히려 비중이 더 커지는 흐름이다.

그런 곡물이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된다. 한국인의 식탁이 속수무책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권의 명운이 여기에 달린 곳도 있다.

밀 가격 인상 여파는 전방위적이다. 라면 값 인상은 그중 하나다. 국내 대표 식품회사 농심은 9월15일부터 라면 출고 값을 11.3% 인상키로 결정했다. 농심은 "원자재 값과 환율 상승 등에 따른 실적악화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인상이유를 설명했다.

국내 시장점유율 1위 농심이 값을 올리면 오뚜기, 삼양, 팔도 등이 함께 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농심은 지난해 8월에도 라면 출고 값을 7.6% 올린 바 있다. 

물가와 전쟁중인 정부로선 달갑지 않은 상황인데, 업계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라면업계 관계자는 "라면 한 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제조 품목이 20~30개다. 거의 모든 원자재 값이 2~3배씩 뛴 상황에서 가격 인상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근 곡물가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물(先物) 시장 움직임이다. 우리에게 인도되는 수입 분에 영향을 주는데 3~4개월 걸린다"고 말했다.

金가루 되는 밀가루…뒤처진 한국 식량안보

상반기 곡물가가 치솟자 식량안보 우려가 급확산했다. 그럴 때마다 지목되는 건 한국의 낮은 곡물자급률이다. 2020년 기준 사료용을 포함한 곡물 자급률은 20%에 불과하다. 나머지 80%는 전적으로 해외에서 들여와야 한다.

콩, 옥수수, 밀은 국제 곡물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작물이다. 세 작물 모두 상당량을 해외에서 들여온다. 차이가 있다면, 콩과 옥수수는 사료용, 밀은 식용이 많다. 콩과 옥수수가 축산농가에 타격을 줘 우리 식생활에 간접영향을 준다면, 빵·라면·과자의 원료인 밀은 직접 영향권이다.

밀 자급률은 심각한 수준이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1960년 35.3%였던 밀 자급률은 2019년 0.7%까지 떨어졌다.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밀 생산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밀 소비가 늘어난 영향도 크다.

1970년 1인당 연간 26.1㎏이었던 밀 소비량은 2019년 31.6㎏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쌀 소비량은 136.4㎏에서 59.2㎏로 줄었다. 2019년 기준 밀 소비량은 쌀의 절반을 넘는다.


이코노미스트 자회사 '이코노미스트 임팩트'가 매년 집계하는 '세계식량안보순위'에서 지난해 우리나라는 32위를 기록했다. 아시아에선 일본(8위), 싱가포르(15위)가 우리보다 앞섰다.

근본적으로 작금의 식량위기가 우리 식탁을 위협하는 수준이냐를 놓고서는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이철호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명예이사장은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보다 식량자급률이 낮으며 비상시 식량위기 대응 태세조차 부실하고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국승용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미래정책연구실장은 "식량안보는 유사시 곡물을 안정적으로 가지고 올 수 있느냐 문제인데, 우리는 미국·캐나다와 호주 등과 거래하고 있어, 수출금지 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국제 곡물시장은 4대 '곡물 메이저'가 꽉 잡은 독과점 시장

국제 곡물시장은 독과점 구조다. 생산지가 한정돼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만든 웹사이트 '경제복합성 관측소(OEC·The Observatory of Economic Complexity)'에 따르면, 2020년 세계 주요 밀수출국은 러시아(19.50%), 캐나다(13.90%), 미국(13.70%), 프랑스(9.26%), 우크라이나(8.97%) 순이었다. 수입국은 이집트(10.10%), 중국(6.75%), 튀르키예(4.74%), 나이지리아(4.17%), 인도네시아(4.04%) 순이었다.

우리나라는 수입선이 단순하다. 2020년 기준 전체 수입량의 42.30%가 미국, 32.60%가 호주산이었다. 캐나다(8.68%)와 우크라이나(7.00%)까지 더하면 이들 4개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수입량이 90%를 넘어선다.


미국, 호주, 캐나다 농가는 'ABCD'라고 불리는 4대 곡물메이저(대형 곡물회사·ADM, 번기, 카길, 드레퓌스) 손아귀에 있다. 이대섭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강원대 교수)은 2010년 발표한 보고서(다국적 곡물메이저와 우리나라 곡물수입)에서 "최근에는 곡물생산 기초인 종자에서부터 사료, 식용유지, 식품, 에탄올 생산 등으로 사업영역 및 범위를 넓히고 있다"면서 "곡물메이저들이 유통하는 곡물이 국제시장에서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2016년부터 5년간 우리나라가 이들 4개 업체에서 수입한 밀가루는 전체 수입량의 27.5%에 달했다. 

곡물메이저 독과점 구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밀을 포함한 곡물산업은 유통구조가 복잡하다. 미국을 예로 들면 지역 농가에서 수확한 밀은 육로를 통해 곳곳에 마련된 '산지 엘리베이터'에  모인다. 중간 집합지에서 모은 곡물을 기차로 옮겨 싣는 장비가 산지 엘리베이터다. 미시시피강을 따라 조성된 '강변 엘리베이터'로 가는 물량도 있다.

산지, 강변 엘리베이터에서 출발한 곡물은 항구에 설치된 수출 엘리베이터(터미널)로 모은 뒤, 여기서 전 세계로 나간다. 대형 샤일로(저장창고)에 모인 곡물을 수출 운반선으로 옮겨싣는 대규모 설비가 수출 엘리베이터다.  4대 곡물메이저는 이들 산지·강변·수출 엘리베이터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 생산·저장시설에서도 이들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생산량 급감…내년 수급대란 더 걱정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5월21일 커버스토리로 '식량위기'(The Food crisis)를 다루면서 상반기 국제 곡물가 인상을 '재앙(Catastrophe)'이라고 규정했다. 지난해 기준 러시아는 1위, 우크라이나는 세계 5위 밀 수출국이다. 두 나라 밀 수출량은 전 세계 교역량의 28%에 달한다.

먹거리 불안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을 경험했던 중동국가들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튀르키예(터키)와 유엔이 중재자로 나서 120일 간 우크라이나 오데사항(港) 밀수출을 허용키로 한 배경에는 이런 절박함이 있다.

최근 외신에는 2007년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투자금융사 메릴린치가 처음 써 유명해진 애그플레이션(애그리컬처+인플레이션)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농산물 가격이 올라 물가상승이 일어나는 경제현상을 말한다.

2000년대 들어 발생한 세 차례 애그플레이션은 △기후 변화·이상기온에 따른 흉작 △경제 위기에 따른 원자재 시장에 투기 수요 가세가 원인이었다. 2008년 시작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였다.

▲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의 식량 배급소에서 주민들이 밀가루를 받고 있다. [AP·뉴시스]

그런데 올 상반기엔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추가됐다. 유럽 대표 곡창지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은 지구촌 식량 위기를 촉발했다. 그동안 흑해를 지나는 운반선을 통해 곡물을 들여오던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은 돌연 식량난에 휩싸였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3중고'가 현실화한 것이다.

김지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해외농업관측팀장은 "코로나 장기화, 공급 병목현상, 투기 수요 가세, 이상기온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국제곡물가는 이제 작은 이슈에도 민감해졌다"고 말했다. 또 "밀 만해도 식용과 사료용으로 구분되는데, 옥수수값이 오르면 농가들이 사료용을 밀로 대체하기 때문에 밀, 콩, 옥수수값은 서로 연동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과거 7~8년을 기점으로 등락하던 국제 곡물가 주기는 3~4년으로 짧아졌다. 민간 농업 싱크탱크 GS&J의 이정환 이사장은 "종자개량·산업기술 발달로 시작된 지난 100년간 대량생산 체제가 기후변화와 팬데믹으로 변곡점을 맞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올 2월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기화 조짐도 보인다. 우크라이나 곡물거래협회는 올해 자국 밀 수확량이 지난해 3300만 t에서 1920만 t으로 42% 가량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농업 컨설팅 기업 'APK-인폼(APK-INFORM)'은 올해 우크라이나 곡물생산이 50% 이상 감소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곡물협회보다 더 부정적으로 내다봤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은 "올해 생산된 우크라이나 산 밀가루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올 연말과 내년 봄이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식량 사정은 내년 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KPI뉴스 / 특별취재팀 송창섭·서창완 기자 realson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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