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역사는 우리를 버렸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2-08-09 08:15:25

'파친코' 새 번역판 출간하고 방한한 재미작가 이민진
30년에 걸친 집필, 방대한 인터뷰, 사투리까지 신경 써
역사에 이야기를 넣어 흥미롭게 '뿌리' 돌아보도록 고려
"세계 독자들 모두 한국인으로 동화시키고 싶어"
"우리는 모두 연결된 강력한 가족, 못할 일 없다"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 '파친코'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54)이 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드라마로도 제작돼 좋은 반응을 얻어 책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계약 종료로 번역판이 절판됐다가 최근 다시 번역해 출간한 것을 계기로 마련된 자리였다. 

▲4세대에 걸친 재일 조선인의 삶을 다룬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1권이 먼저 나오고 2권은 이달 말께 출간될 '파친코'(인플루엔셜)는 재미교포 1.5세대인 이민진이 30여년에 걸쳐 집필한 역작으로, 2017년 출간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후 세계 33개국에 번역 소개됐고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에서 새로 나온 번역판은 이전 번역과는 달리 원본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고 작가의 의도를 보다 정확하게 관철시켰다. 

이민진은 이날 "'파친코'는 여러 인간적인 면모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면서 "한국인이 걱정하는 부분을 다른 세계 사람들도 느끼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에 큰 호응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류는 정말 대단하지만,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우리의 창작 활동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면서 "광범위한 인간성을 지닌 한국인을 그 자체로 오롯이 인정하는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새 번역판 머리에 밝혔다.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관심을 소설에 투영한 이유는?
"전 세계 젊은 사람들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이즈음 젊은 세대를 보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우리가 이들을 충분히 존중해주지 않았다. 이들 세대는 정체성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정체성이라는 것은 역사를 모르면 빈 깡통 같은 것이다. 이 깡통이 비지 않도록 여러 역사적인 내용으로 채워주고 싶은 의미에서 뿌리를 다룬 것이다. 사실 우리가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역사가 빠지면 의미가 없다. 역사는 승패와 사실만 나열하면 재미 없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도록 사람 이야기를 풀어넣은 것이다."


-미국 주류 사회에서 이 소설이 반향을 일으킨 배경은?
"출간 당시 피츠버그 카네기홀에서 2000명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중 99%가 아시아계와 관계 없는 백인이나 흑인이었다. 19세기 유럽이나 미국 문학 작품을 좋아했고 그런 책들을 많이 접하면서 작가로서 훈련을 했기 때문에, 제 소설은 19세기 스타일의 전지적 작가 시점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그런 스타일 면에서 아무래도 유럽이라든지 미국과 가깝기 때문에 독자들에게서 호응을 얻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처음에는 정작 한국 사람들이 안 읽어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 걱정했는데,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제 책을 읽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어서 다행이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민진은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다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대학시절 우연히 접한 재일 한국계 소년이 차별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파친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소설 속에서는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의 첫 아들 '노아'도 일본 학생들에게 따돌림과 차별을 당한다.

-재일교포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대학 신입생 시절 수업을 빼먹고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일본에서 한국계 일본인을 대상으로 선교했던 백인 선교사가 특강을 했는데, 차별을 받다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국계 일본 소년 이야기를 해줬다. 13세 중학생 소년이 자살을 한 건데 부모가 얼마나 슬펐겠나. 아들의 일본 친구들이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라,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김치 냄새가 난다, 우린 너희가 너무 싫다, 죽어 죽어 죽어라, 이런 말들을 써놓은 앨범이 나왔다.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던 아이였던 거다. 당시 제가 19세였는데, 너무 슬프고 충격을 받았고 화가 났다. 그 소년 이야기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이민진은 "한류는 정말 대단하지만,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우리의 창작 활동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변호사의 길을 가다가 작가로 변신하게 된 이유는?
"처음부터 작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계 미국 여성이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건 엉뚱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됐는데 지금은 다 치유가 됐지만, 당시에는 간이 굉장히 안 좋아서 의사가 간암에 걸릴 수 있다고 통보를 했다. 그때까지는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너무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오며 살았는데, 의사의 말을 듣고 나니까 뭔가 좀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 번역판 출판사를 결정한 기준은?
"평생에 걸쳐서 '파친코'라는 작품을 쓴 셈인데, 이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됐을 때 사실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번역에 제가 많이 관여할 수 있도록 해준 부분이 큰 이유였고, 오디오북이나 전자책 출간을 같이 할 수 있는 요소도 중요했다. 저는 미국 작가협회에서 일하면서 작가들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글쓰기는 저항의 행동이고, 또 어떤 혁명의 행위이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파친코'라는 책도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책이다. 이런 부분까지 잘 이해하고 커버해줄 수 있는 출판사가 필요한 이유도 있다." 

-'파친코' 이후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새로운 혐오들이 생겨나고 있다. 어떤 작품을 쓰고 있는가.
"인종과 계급 차별을 비롯한 여러 혐오들이 계속 진행되거나 새로 생겨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 중 일부인 것 같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항상 다른 인간들을 억압하려고 했었고, 이런 부분은 정말 문제다. 지금 집필하고 있는 작품은 교육에 초점을 맞춘 '아메리칸 학원 American Hagwon'이다.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의 교육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국 사람들이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런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민진은 "한국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아직 더 많은 인정을 받아야 되고 또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된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부산 영도에서 하숙을 치던 선자의 모친 '양진'은 그의 집에 온 목사 백이삭에게 말한다. "남편은 우리가 아무도 따르지 않기를 바랐심더. 예수님도, 부처님도, 황제도, 조선 지도자까지도예. …여기서 엄청 무서운 일들이 다 일어난다 아닙니꺼." 번역 과정에서 부산 사투리를 매만졌겠지만, 드라마에서도 배우들의 생생한 사투리는 인상적이다. 

-영어로 집필하는데 사투리가 중요한가?
"영어라는 언어는 좀 더 민주적이고 동등한 언어이다 보니, 약간 예의가 없게 들릴 수도 있다. 이런 언어 특성을 떠나서, 사투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한다. 책을 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느냐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지역 사투리를 할 수 있는지, 어떻게 길에 앉아 언제 쉬는지, 말하는 방식과 이런 모든 몸짓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민진은 새 번역판에 '우리는 강력한 가족(We are a powerful family)"이라는 서명을 인쇄해 넣었다. 그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면서 "전 세계 독자들을 모두 한국 사람들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아직 더 많은 인정을 받아야 되고 또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독자들을 한국 사람들로 만들고 싶다고 얘기를 자주 한다. 톨스토이를 읽을 때는 공감을 하다 보면 러시아 사람이 되고, 또 찰스 디킨즈를 읽으면 다시 영국 사람이 될 것 같고 헤밍웨이를 읽을 때는 미국 남자가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그 주인공과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다 보면 그 사람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이 되어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거다."

▲이민진은 "글쓰기는 어떻게 보면 저항과 혁명의 행동이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면서 "'파친코'라는 책도 위험한 책이 되기를 바라면서 쓴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파친코' 첫 문장처럼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패망 이후 같은 민족끼리 적대 세력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두고 소설 속에서 '경희'가 범부의 눈높이로 하는 말.

-우리는 서로 싸우고 있잖아요. 꼭 할머니 둘이 말다툼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상대방의 못된 점을 할머니들 귀에 대고 계속 속삭이면서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들이 화해하고 싶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 말은 무시하고 두 사람이 한때 친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