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석철주 "그림은 혼자 그리지만 좋은 작가는 혼자일 수 없다"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 2022-08-03 03:40:22
"쨍하지 않더라도 뚝배기 장맛 같이 은근한 그림이길 바라"
5~25일 '비채아트뮤지엄'서 개인전 'Fantastic Moment' 개최
그는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대지의 굴곡을 지나고, 땅속을 흘러 먼바다로 향하는 물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변화무쌍함이 그의 작품에서 기를 발하는 듯했다. 화가 석철주와의 한 시간여 인터뷰에서 느낀 기자의 주관적 감상이다.
화가 석철주는 한국화의 거두 청전 이상범 선생을 만나 처음 동양화에 입문했다. 청전은 손기정 선생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으로도 유명하다. 동아일보 재직 시절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고 손기정 선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가 청전 선생이다.
훗날 추계예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석철주는 1971년부터 1979년까지 국전에 6회 입선하며 미술계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변화를 갈망한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며 보다 넓은 회화의 길로 들어섰다.
동양화에 뿌리를 둬서인지 그의 그림은 일견 동양화인 듯 서양화인 듯 묘한 빛을 뿜는다. 이런 그의 작품 세계를 두고 세간에선 여러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그는 "그저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일축했다. 무더운 여름 잠시 장맛비가 지나는 2일 오후 서울 비채아트뮤지엄에서 화가 석철주를 만났다.
본디 서울 사람인 그는 코로나 팬데믹이 막 시작하던 2020년 초 강화도로 작업실과 세간을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50여 년 짊어온 작품들을 풀어 다시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앞만 보고 달려와 뒤돌아볼 시간이 부족했다. 지나온 그림을 하나둘씩 꺼내며 그때의 감정이나 표현기법을 되돌아보고 있다"고 했다.
석철주는 1968년 '백양회' 신인작가 발굴 공모전에서 입선해 처음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으니 그가 화가의 길을 걸은 지 벌써 반백 년이 넘었다. 이런 긴 시간 그의 작품 세계도 여러 변곡점이 있었다. 주옥같은 작품이 많았는데, 특히 2005년 처음 선보인 '신몽유도원도'는 아직도 세간에 회자하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듣고 조선 초기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그린 그림이다. 나의 신몽유도원도는 이런 몽유도원도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꿈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한 것이다."
석철주는 대개 5년마다 작품의 주제나 기법을 새롭게 바꾼다. 하지만 '신몽유도원도'는 벌써 이십여 년 놓지 못하는 화두다. 이 주제는 해를 거듭하면서 진화하고 있다. 최근 선보인 신몽유도원도에는 열기구가 등장한다. '몽유(夢遊)'는 꿈속을 걷는다는 말인데 그는 열기구를 타고 꿈속을 유랑한다는 의미로 몽유도원도를 재해석했다. 열기구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인왕산이나 북한산 등 구체적인 지명이 따라붙어 막연한 꿈을 현실화했다.
"색감도 이전과는 달리 더 맑아지고 강렬해졌다. 과거엔 청색과 핑크색 두 가지로 전체 이미지를 표현했다면 지금은 사계절 다채로운 색상을 통해 작품을 시각화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고 그가 신몽유도원도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잡초나 풀을 비롯해 달항아리 등 다양한 주제는 언제나 화가 석철주를 설레게 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변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늘 실험하고 있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나가려 한다. 작가라면 새로운 것을 빨리 수용하고 자신에 맞는 방법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열린 사고가 있어야 한다."
화가 석철주는 작가정신으로 변화와 소통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 듯했다. 수십 년 작업실과 집, 학교만을 오간 그가 소통을 강조하는 건 의외였다.
"이젠 모두 열린 시대다. 시대의 흐름을 교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이 보고 듣고 그려야 한다. 물론 맹목적인 작업은 안 된다. 무엇을 그릴까. 어떻게 그릴까. 어떻게 생각을 담을까. 이런 치열함이 작가에겐 필요하다. 과거엔 작가가 그림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으니 이젠 작가도 스스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는 잠시 벽에 걸린 작품을 훑어보더니 "그림은 혼자 그리지만 좋은 작가는 혼자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작품의 완성도'는 언제나 숙제라고 했다. "누구나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완성 높은 예술품이다. 다만 이런 완성도를 위해선 작가가 언제 붓을 내려놓아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욕심이 지나치면 오히려 작품을 훼손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캔버스 위에서 일필휘지로 드러난다. 무리한 욕심을 버리려면 단번에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의 독특한 기법이 있다.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지우며 작품을 완성한다'는 역설적 화법이다. 캔버스 위에 큰 붓으로 단번에 색을 입히고, 그 위를 유영하듯 물로 색을 지워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묘한 기법을 통해 캔버스 위엔 서서히 대상이 생명체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작업은 모두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단번에 끝난다. 그야말로 일필휘지다. 이런 폭풍 같은 방식은 우연을 만들고 이런 우연은 필연과 어우러져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어쩌면 그 대상은 애초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창조대상은 이미 그의 뇌 속에 완벽한 계획으로 터를 잡은 듯했다.
그는 이런 기법에 대해 "결국 상처가 아무는 과정과 같다. 상처가 아물어 살이 돋아나는 것은 생명의 탄생으로 봐야 한다. 그런 아픔을 느끼고 지우는 것. 이 모든 것은 일련의 작품 과정이면서 치유 과정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화가예찬론도 펼쳤다. "화가는 힘든 만큼 얻어지는 직업이니 좋다. 사실 나는 태생이 억압받고 지휘받으며 살 수 없다. 성악가는 나이 들면 제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화가는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예술혼을 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길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화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한국화는 1970~8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든 취급을 꺼린다. 유행 탓도 있지만 이런 현상은 한국화 분야가 스스로 변화하지 않은 탓도 있다. 수묵은 그 자체로 강점이 많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해석하고 응용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바라냐"는 질문엔 "한국화의 나아갈 길을 조금이라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답했다. 이어 "나는 전통적인 한국화 기법을 다양하게 변형했다. 사실 나는 '이렇게 해도 그림이 된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그는 동양화 기법을 새롭게 해석한 선구자란 평도 들었지만 다른 한편에선 그런 그의 방식을 질타하는 따가운 시선과도 마주해야 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나의 그림은 쨍하지 않지만 싫증 나지 않는 그림으로, 뚝배기 장맛 같은 은근한 맛이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타이틀은 'Fantastic Moment'다. 이달 5~25일 서울 방배동 비채아트뮤지엄에서 열린다. 그의 대표작인 '신몽유도원도' 시리즈와 '달항아리' 시리즈 등 30여 점이 관객을 맞는다.
전시를 기획한 비채아트뮤지엄 전수미 관장은 "신몽유도원도와 달항아리 연작으로 전시를 구성함으로써 꿈에서 여행을 시작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방식의 환몽구조(幻夢構造)를 서사로 담았다"며 "작가가 꿈속 여행의 가이드가 돼서 관객과 잠시 잊고 있던 꿈을 찾아 길을 나서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Fantastic moment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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