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직설] 아름다운 말 '보호', 다른 관점에선 규제와 개입

UPI뉴스

| 2022-05-02 14:31:05

사적 자유행동마저 당국의 안전 보호를 받으려 하는 일본
어엿한 성인인 학생과 교수,교직원 연애 금지한 미국 대학
시민을 아이 취급하는 '유치원 국가' 원치 않는다면 선 그어야

미국 그랜드캐니언의 거대한 협곡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려 들지만 위험 표시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일본 같았으면 울타리가 쳐지고 출입금지 푯말이 여기저기 세워졌을 것이다. 관광객들은 규제를 따르기만 하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지만, '레저'라고 하는 가장 사적이고 자유로운 행동마저 그 안전을 당국으로부터 보호받으려 하고 또한 이를 당연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일본 정치인 오자와 이치로가 ‹일본개조계획›이란 책에서 일본의 '규제 문화'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다. 사회비평가 후쿠다 가츠야는 ‹왜 일본인들은 어린 아이들이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일본은 시민을 어린이로 다룬다고 비판했으며, 작가 후쿠다 기치로는 일본을 '유치원 국가'라고 부르면서 일본에서의 사회적 통제는 사적인 영역에까지 아주 깊숙이 침투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일본만 그런 건 아니니 일본인들이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과잉 보호의 분야만 다를 뿐 일본과는 정반대의 나라로 간주된 미국도 '유치원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면이 있으니 말이다. 특히 대학이 그렇다.

미국의 어느 대학교수가 소셜미디어에 어린 딸의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딸의 티셔츠에는 용 그림과 함께 "불을 토하고 피를 흘려서라도 내 것을 차지하겠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학 측은 티셔츠의 문구가 '위협적'이라며 문제 삼았다. 교수는 이 문구가 인기 TV 시리즈물인 '왕좌의 게임' 내용에서 따온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대학 측은 '불'이 AK-47 소총을 가리킬 수 있다고 끝내 고집하면서 교수를 무급 휴직에 처하고 심리 상담을 받게 했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몇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다. 미국 대학에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위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말해주는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나쁜 교육: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은 이런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날이 갈수록 미국 사회가 편협해지고 있다고 개탄한다.

이 책에 실린, 노스웨스턴대 교수 로라 킵니스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가. 여교수인 킵니스는 2015년 3월에 발표한 '대학캠퍼스를 덮친 성적 피해망상증'이란 제목의 글에서 노스웨스턴대의 성적 행위 학칙이 잘못됐다고 지적함으로써 이후 2년간 그를 괴롭힐 논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특히 어엿한 성인인 학생과 교수 혹은 교직원 사이의 연애를 금지한 것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학창시절에 내가 알고 지낸 페미니즘은 독립성과 회복탄력성에 무엇보다 중점을 뒀었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학생들의 나약함을 신성시하는 분위기가 너무도 강해져 그것을 타파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안티페미니스트라는 딱지를 붙일 각오를 하지 않으면, 그것에 의문을 던질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킵니스는 1956년생이니, 그가 지낸 학창시절은 1970년대였을 게다. 미국 대학가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건 1980년대부터였으니, 그는 사실상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있는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운동권 학생들은 킵니스를 표적으로 삼아 맹렬한 시위를 벌이는 동시에 고발까지 하면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대학당국은 72일간 킵니스를 상대로 조사를 벌였으며, 킵니스는 이와 관련된 책을 출간해 추가 고발을 당하는 등 2년 넘게 이 문제로 시달려야 했다.

학생과 교수 혹은 교직원 사이의 연애를 옹호한 킵니스의 주장에 논란의 소지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학생들의 나약함을 신성시하는 분위기'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학생 보호를 앞세워 그들을 어린 아이 취급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하이트는 대학의 '기업화'와 '관료주의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대학은 학생들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소비자로 바라보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교수들보다는 관리자들의 역할 비중이 커졌으며, 이렇듯 대학내 관료주의가 성장하면서 관리자들이 학생들을 보호해야 할 임무가 확대된 탓이라는 것이다.

세상 참 묘하다. 미국 대학은 학생 보호에 과잉인 반면 한국 대학은 학생들 스스로 강하게 크라는 식으로 방치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한국 대학들도 많이 달라져 가고 있긴 하지만, 이 또한 미국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문제가 있다는 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우리도 미리 마음의 준비나마 해두는 게 좋겠다.

'보호'는 아름다운 말로 여겨지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건 바로 규제와 개입이다. 처음엔 아무리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일지라도 규제와 개입은 그 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점차 늘어나고 강해지기 마련이다. 규제와 개입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유치원 국가'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면, 어느 지점에선가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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