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포기한 신들이 인간에게 배우는 한 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2-04-28 07:21:50
신과 사물이 화자로 등장하는 익살스러운 서사
무기력한 청년과 고통스러운 삶에 바치는 이야기
"여러 겹 무늬를 지닌 삶의 이면 흥미롭고 놀라워"
'자, 이제 내 차례다. 나도 내 일을 해야 하니까. 인간들이 내게 본받을 게 더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내가 그들을 본받을 작정이다. 나는 저돌적이나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예지와 미련하리만치 선량한 순남 여사를 흉내 내기로 한다. 사실 인간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울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신이 중얼거린다. 인간들이 자신에게 본받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이제는 자신이 인간들을 본받을 작정이라고. 그가 본받으려는 인간들은 늙은 '순남'과 임신한 새댁 '예지'. 예지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오지랖이 한없이 넓은 순남 여사는 '밭도 갈고 짐도 나르고 뼈 빠지게 일하다가 고기며 가죽도 내줄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움머, 과묵한 울음 한 번 토할 뿐인 소 같은 사람들' 중 하나이고, '인정을 헤프게 쓰다가 한동네에 시아비만 아홉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빌라 삼층에 사는 예지와 이층에 사는 순남 여사 사이에는 세대 차를 넘어서서 극복하기 쉽지 않은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는 관계'도 있다. 순남 여사의 빌라에 얹혀 사는 예지는 건너편 옥탑방 노인이 개를 학대하는 것처럼 보여 번번이 구청에 고발하지만 시정되지 않아 안타깝다. 순남 여사도 음식을 장만해 독거노인에게 가져가며, 자신이 위탁한 유기견을 제대로 돌보고 있는지 관찰하지만 아픈 개가 제대로 보호받는지 의심스럽다. 예지와 순남의 선의와 이타심이 개와 노인에게 어떤 결과를 안겨주는지는 최근 심아진이 펴낸 소설집 '신의 한 수'(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편 7편이 수록된 이 작품집 표제작에서, 신은 나름대로 '한 수'를 두어 통념의 허를 찌른다. 인간들을 따라 했을 뿐이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흔히 탄식하잖아요. 인생은 선하고 올바르게 산다고 항상 결과가 좋은 건 아니거든요. 반대로 산다고 해서 반드시 안 좋은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각자가 믿고 행하는 일들이 언제든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실 제가 쓰는 모든 소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삶에는 항상 하나의 무늬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겹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아요."
23년차 소설가 심아진은 "삶에는 원래 하나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면서 "하나의 모습에서 여러 가지를 발견할 때마다 늘 재미있고 놀랍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러한 삶의 다양한 이면을 독자들과 함께 느끼는 것이 소설을 쓰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서두에 배치한 '언니'의 화자도 인간이 아닌 신이다. 외피는 한 남자 '정무운'을 유혹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 가까이에 분식집을 차린 쌍둥이 자매이지만,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동일한 능력을 반대로 사용하는 운명의 여신들이다. 하나는 생이라는 실을 지어주지만, 또 한 신은 그 실을 끊어 이승에서 데리고 간다. 심술 사나운 언니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 하나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이 두 여신이 정무운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하지만, 이 시대의 우울한 청년상을 대변하는 무기력한 정무운은 반응이 시원찮거나 아예 무시한다. 정작 정무운을 움직인 건, 쌍둥이 자매의 씨 다른 동생 '분홍'이었다. 분홍은 언니들을 약올리듯 가볍게 정무운의 관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한다.
'정무운과의 거리가 좁혀진다. 그는 아직도 우리를 보지 않는다. 언니가 침착하게 한 발을 떼려는 찰나, 갑자기 무언가가 시야를 가린다. 매화도 아니고 진달래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꽃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분홍 덩어리다. …막내다. 분홍 리본, 분홍 귀고리, 분홍 후드티에 분홍 스커트, 분홍 신발․ 분홍 일색, 아니 분홍 자체라 해야 할 그것이 우리에게 씩 웃어 보이나 싶더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며 넘어진다.'
'분홍'의 전술에 넘어간 정무운을 두고 심아진은 연애와도 담을 쌓고 살아가는 이즈음 청년들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언니들조차 쩔쩔매는 청년의 돌덩이 같은 마음을 슬쩍 스치는 손길 하나만으로도 녹여내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낸 건 '분홍 전술'이었다.
심아진은 "옛날보다 성적으로 자유로워졌다지만 자칫 잘못하면 손가락질을 받거나 고소를 당하는 현실"이라며 "자연스럽게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차단돼 있어서 이런 친구들에게는 연애도 단절된 상태"라고 안타까워한다. 분홍 전술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정무운은 이제 운이 없는 무운이 아니라, 향기 가득한 청년이 될 차례다. 신화 속 캐릭터들을 일상에 대입해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맥락이 흥미롭다.
화자가 범상치 않기로는 '우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13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덩치의 신입사원 '송현호'는 사소한 일에도 과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자신을 '호야'라고 불러달라는 이 남자의 사수 오 대리는 '자꾸 울면서도 이상하게 명랑한, 게다가 고도비만인 몸을 인체내장형 무기인 듯 들이미는 호야' 때문에 곤혹스럽다. 시도 때도 없이 호야는 도대체 왜 우는가.
'나의 호야는 직관대로, 고민 없이, 언제나 즐겁게 움직여서 주변에 웃음을 뿌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허점이 많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들춰내지 않았고, 그런 데에 관심도 없는 맑은 사람이었다. 나로 인해 상처를 입어서,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끝없이 먹고 울고 졸았으나 태생적으로 밝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이 단편의 화자인 '나'도 범상치는 않다. 통상적인 시각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는 허를 찔리기 십상이다. 나는 호야에게서 '심연에서 길을 잃은 거대한 슬픔의 덩어리가 불이 아닌 눈물로 제 살을 태우는 모습'을 본다. 슬픔에 압도당한 거대한 덩치의 안타까운 남자 '호야'는 심아진이 만들어낸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걸핏하면 우는 남자 호야를 다른 이들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지만, 사수인 오 대리는 호야의 실수와 썰렁함을 그때그때 지적할 수밖에 없다. 말미에 오 대리는 호야를 업어치기 하려다 덩치 아래 깔리는데, 그나마 호야를 슬픔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는 건 사람들 사이 부대낌이라고 심아진은 말한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 화자가 모두 범상치 않은 것은 아니다. '다복한의원' '레슬링' '오렌지 하트' '귀향'에 등장하는 중심 화자는 '정상적'인 사람이거니와, 그런 만큼 일상의 인간사 복잡한 이면을 핍진하게 파고드는 편이다. '귀향'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왜곡시키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것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성장기에 아픈 기억을 묻어놓은 통영에 간 화자는 말한다. '뒤섞어서 흐리게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잖아. 안그래?'
'오렌지 하트'에서 '건우'는 술 마시고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가 인터넷에서 쩍벌남으로 몰매를 맞아 '자율신경실조증과 강박증'에 시달린다. 이른바 개념 있는 자들이 만든 원칙은 그 자체로 올무가 되고, 개념이 '완장'이 되는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한 단편이다. '다복한의원'의 서른세 살 여성 '규리'도 '건우'나 '정무운'과 크게 보면 같은 부류. 이 여자는 남자를 사귀는 데도 진력이 나 있는 상태이고, 집에서는 엄마의 구박덩어리 신세다. 엄마가 몰래 동네 한의원에 이력을 넣어 성당 오빠였던 한용수 원장 아래 피고용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복한의원' 얼개다. 동네 한의원을 찾는 다양한 군상을 시시콜콜 펼쳐내지만 그중에서는 철물점 아줌마와 최씨 아저씨의 불륜이 돋보이고, 기러기 처지인 '원장 오빠'와 먹는 저녁 한 끼가 야릇한 듯하지만 그것은 '만연해 있지만 진하지 않은, 얇디얇은 맛'일 따름이다.
'레슬링'은 지금은 한물 간 극장식 프로레슬링의 세계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프로레슬러로서의 성공은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잘 때리거나 잘 피하는 것은 '프로'가 할 일이 아니다. 잘 때리거나 잘 피하는 게 아니라 잘 때리거나 잘 피하는 '시늉'을 훌륭히 해내고, 동시에 그 시늉에 관중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게 진정한 프로다.' 선한 편을 맡아 당하기만 하다가 나중에 판세를 뒤엎는 레슬러들이 관중의 환호를 유도한다. 손님들이 줄어들자 사장이 낸 아이디어는, 악역이 끝까지 이기는 한판이었다. 관중들은 흥분하지만 모종의 다른 조치로 흥행은 다시 이어진다. 사장의 마지막 멘트는 '다복한의원'의 '얇은 맛'이다. '사람이 뭣으로 사는지가 중하나? 뭣으로든 살기만 하믄 되지.'
심아진은 "더 잘 살아야 된다는 '행복강박증'에 매몰되거나 너무 심오한 의미를 찾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는 말자"고 말한다. '오렌지 하트'에서 사사건건 개념 넘치는 여성을 '용감하게' 풍자한 심아진이 책 뒤에 붙인 말.
'일곱 편의 소설을 묶고 보니 유행하는 담론들, 가령 페미니즘, 성소수자, 갑을관계, 빈부격차 등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인다. 그러나 그런 건 나보다 훌륭한 다른 많은 작가가 쓰고 있을 터,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도록 나를 열렬히 다그치는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정말이지 소설을 쓰지 않고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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