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스페인·칠레 현대사 관통하는 망명의 아픔과 사랑"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2-02-22 09:47:35

남미 원로소설가 이사벨 아옌데 신작 '바다의 긴 꽃잎'
스페인 내전을 거쳐 칠레로 망명한 이들의 역경과 사랑
파블로 네루다, 살바도르 아옌데 같은 실존 인물과 역사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여전히 진행형인 증오와 반목
"거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통제를 완벽하게 비껴간다"

라틴아메리카 원로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80) 신작 장편이 국내에 소개됐다. '바다 위 긴 꽃잎'(권미선 옮김, 민음사)은 스페인 내전에서 우파 프랑코에게 패한 난민들이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3~1973)가 주선한 화물선 '위니팩호'를 타고 칠레로 피신한 이래, 다시 칠레에서 스페인 내전과 비슷한 반복되는 폭력을 경험하고 긴 독재의 시절이 끝나는 지점까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이끌어가는 장편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광받아온 칠레 작가 이사벨 아옌데. 새 장편에는 스페인과 칠레의 참혹한 현대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 Lori Barra, 민음사 제공]

선거로 세워진 인민전선 정부를 프랑코 장군이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꿈을 꾸던 50여 나라 젊은이들까지 참여한 스페인 내전에서 100만 명 넘게 희생됐다. 스페인 좌파의 조국이라 할 소련은 독일과 짬짜미를 해서 외면했고, 프랑코는 최대한 많은 피를 흘리게 해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저항의 싹을 도려냈다.

프랑스로 우여곡절 끝에 피신해 그곳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갇혀 있다가 어렵사리 네루다가 마련한 '희망의 배'를 타고 한달 가까이 항해해 '하얗고 새까만 거품의 허리띠를 두르고,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이뤄진 기다란 꽃잎'(네루다의 '언젠가 칠레' 시구) 같은 칠레로 이주한 빅토르와 로세르. 이들은 선거로 뽑힌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에 환호했지만, 미국과 자본가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로 피노체트 장군이 칠레를 장악해 스페인의 과거 역사를 똑같이 되풀이했다. 스페인과 칠레의 비극 사이에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하나의 끔찍한 증오와 학살이 이어졌고, 좌우로 갈라진 냉전의 참혹은 한반도로 불똥이 옮겨붙어 다시 수많은 인명이 도륙당했다. 빅토르가 소설 말미에 "나는 너무도 잔인한 것들을 봤다"면서 "나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대목은 새삼스럽게 울림이 크다. 

작금에 이르러서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의 포성이 시작됐고, 한반도 남쪽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긴 '휴전' 상태에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영으로 갈라진 이들이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죽자사자 험악하게 싸우는 판국이다. 4대에 걸친 칠레 여성들을 내세워 집필한 출세작 '영혼의 집'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라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각광받아온 이사벨 아옌데의 이번 최신작이 각별히 눈에 띄는 배경이다.

"아버지, 우리가 여기에서 막아 내지 못한다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갈 겁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지면 안 됩니다. 그건 우리 국민이 이뤄 낸 모든 것이 끝장나서 과거로, 우리가 수백 년 동안 살았던 봉건시대의 가난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을 거다. 아들아, 내가 하는 말 명심해라. 소련까지도 우리를 저버렸다. 이제 스탈린은 스페인에 관심이 없다. 공화국이 몰락하면 그 탄압은 끔찍할 거다. 프랑코가 대청소를 할 것이다. 즉, 극심한 테러, 엄청난 증오, 가장 잔혹한 복수를 쏟아 낼 거다. 협상도 용서도 없을 거야. 프랑코 군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짓들을 저지를 거다."


빅토르의 다짐에 아버지는 죽어가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피력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103세까지 살았던 실제 인물 빅토르 페이를 모델로 삼은 빅토르 달마우는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치료하는 의사로 종횡무진했고, 그의 동생 기옘은 내전이 발발하자마자 제일 먼저 시민군으로 참여했다가 가족처럼 지냈던 로세르를 임신시킨 채 전사하고 만다. 스페인 망명자들을 실은 네루다의 희망의 배가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에 도착하던 1939년 9월 3일, 화창했던 그날 유럽에서는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피난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결혼증명서가 필요해 두 사람은 형식적인 부부가 돼서 칠레에 도착해 긴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 과정에서 빅토르는 오펠리아라는 칠레 상류층 여성과 뜨거운 열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무늬만 부부로 출발한 이들의 사랑은 세월의 퇴적층에 충만하고 깊이 새겨진다. 

빅토르 달마우는 칠레에서도 의사로 일하면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1908~1973)과 체스를 두기도 하고, 네루다의 태평양가 거처 '이슬라 네그라'에 초대돼 시인과 교류하기도 했다. 네루다가 피신 중일 때는 빅토르의 집에서 2주 동안 칩거하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좌파 대통령으로 처음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는 실제로 이사벨 아옌데와 사촌지간이기도 하다. 살바도르 대통령이 쿠데타 군의 폭격을 받아 대통령궁에서 죽음을 맞은 뒤, 기자 생활을 하던 이사벨 아옌데는 베네수엘라로 망명한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소설을 써내려간 작품이 출세작 '영혼의 집'이다. 

이사벨 아옌데는 가까웠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감춰진 이면을 소설에서 흥미롭게 드러내기도 한다. 빅토르의 입을 빌려 정치적으로는 그를 우러러본다면서도 개인적인 면에서는 다소 걱정스럽다고 토로한다. 그는 "사회주의 리더로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이미지는 부르주아적인 습관, 고급 취향의 옷, 다른 나라 정부들과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주요 예술가들이 선물로 줘서 소장하고 있는 독특한 물건들과 모순됐다"면서 "아옌데는 아부와 예쁜 여자에게 약했고, 한 번만 봐도 대중들 속에서 예쁜 여자들을 감지해냈다"고 툴툴거린다. 좌파 지식인에게는 무조건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관성에 대한 로세르의 응답이 흥미롭다. "빅토르, 당신은 정말 깐깐해요! 아옌데는 간디가 아니에요."

아옌데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강인하고 쾌활하며 생명력이 넘치는 캐릭터들이다. 이번 소설 속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로세르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린 양치기로 살다가 우연히 스페인 보수적인 집안의 후원으로 교육을 받고 피아니스트가 된다. 이후 유복자를 피난통에 낳아서 빅토르와 함께 칠레로 건너가 험난한 세월을 통과하면서도 일과 사랑 양쪽에서 모자람 없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다. 베네수엘라로 건너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활약하고, 피난길에서 도움을 받았던 남자 아이토르와 뜨거운 관능을 누리기도 한다. 이른바 법적으로는 빅토르와 결혼 상태이니 '불륜'인 셈인데, 이들은 둘 만의 사랑을 잘 지켜낸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 대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말년에 머물렀던 태평양가 '이슬라 네그라'. 닻을 내린 배 모양으로 지은 기념관(위)과 입구에 대형 초상화로 걸려 있는 시인. [칠레=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는 그런 식으로 욕망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삶에 유일한 욕망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행복한 결혼은 건드리지 않고, 자기네 삶에서 비밀스럽게 봉인된 장소에서만 사랑을 유지했다. 로세르가 빅토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 못지않게, 아이토르도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처음에, 사랑에 빠졌다는 놀라움 앞에서 자칫 이성을 잃을 수도 있었을 때, 그들은 그 치명적인 끌림을 위한 유일한 미래는 비밀리에 만남을 이어 가는 것뿐이라고 결정했다. 그들은 자기네 삶을 뒤집어엎어 가족에게 상처 입히는 일은 절대 허락하지 않기로 했다."

빅토르와 진정한 부부로 결합해 만년에 다시 깊은 사랑을 나누는 로세르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 모든 대체 치료를 거부하면서 말한다. "나는 죽을 거예요. 그게 뭐? 모두 죽는데." 그녀는 컨디션이 좋은 시간을 이용해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무릎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시를 읽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로세르에게 투사하는 사랑과 삶의 태도는 주체적이고 거칠 것 없으며 열정적이다. 빈민가에서 만난 여성들에 대한 빅토르의 인상. "여자들은 절대 굴하지 않고 희생적이야. 남자들보다 훨씬 용감해. 자기네 지붕 밑으로 찾아드는 자식과 친척의 어머니이지. 그들은 스치고 지나가는 남자의 알코올중독과 폭력과 방치를 견뎌 내지만, 굴복하지는 않아."

로세르를 먼저 보내고 절망 상태에 빠져 있던 늙은 빅토르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가 나타나 소설 말미에는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 빅토르는 그 젊은 존재에게 말한다. "잉그리드, 가장 중요한 사건들만, 운명을 결정짓는 일들만 보거라. 거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통제를 완벽하게 비껴간단다. 내 경우에는 꼽아 보니 내 삶은 젊은 시절에는 스페인 내전이, 나중에는 군사 쿠데타, 정치범수용소, 망명으로 깊은 흔적이 남았더구나. 어느 것도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한테 들이닥친 거지."

빅토르의 어머니 카르메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지칠 줄 모르고 유능하고 무뚝뚝한 한편 은근히 감성적인' 그녀는 아들에게 충고한다. "네 동무라는 그 사람은 맹신이라는 죄를 범하고 있어. 아들아, 칠레는 화해 불가능한 여러 파로 분열되어 있다. 친구들끼리 싸우고, 반으로 갈라진 가족도 있다. 이제는 생각이 맞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대화할 수도 없다. 나도 싸우지 않으려고 이제는 예전 친구들과 만나지 않아." 반세기 후 대통령선거를 앞둔 태평양 건너 한반도의 남쪽과 겹쳐서 읽힌다.

▲소박한 나무 십자가가 세워진 태평양가 이슬라 네그라, 파블로 네루다의 무덤. 이사벨 아옌데의 신작에는 스페인 난민 2000여 명을 칠레로 후송한 파블로 네루다가 중요한 실존 인물로 등장한다. [칠레=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사벨 아옌데는 이번 소설에서는 마술적리얼리즘에서 탈피해 실제 역사와 인물을 소설에 끌어와 현대사를 관통하는 생생한 인물로 이야기를 꾸려냈다. 거두절미하고 이야기 자체에 몰입해 흡인력 있게 인물들을 끌고나가는, 말 그대로 '이야기꾼'의 진면목을 팔순에 이르러서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인터뷰에서 밝혔던 이야기꾼의 참된 역할은 이러하다.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사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그런 다음 그 이야기를, 사람들의 삶을 되풀이해서 들려줌으로써 결국 집단적인 꿈에, 집단적인 공포에 다가갑니다. …전 책이라는 형태는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다른 형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는 우리 영혼의 일부분이므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거라고 대답합니다. 제 생각에 이야기꾼의 역할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듣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진실의 입자를 찾아서 자기 삶을 밝힐 수 있도록 말이에요."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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