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직설]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위하여
UPI뉴스
| 2022-02-22 09:41:07
구조와 개인, 혈투 벌여야할 관계 아냐…조화 가능
이걸 인정할 때 이대남, 페미니즘의 화해도 가능
"중립기어 박고 보자."
2030세대 커뮤니티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한쪽 주장만 보고 반대쪽을 욕하지 말고, 양측의 입장을 다 듣고 팩트가 무엇인지부터 챙기자는 의미다. 당연하거니와 쉬울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질 않다. 특히 세대 차이가 크다. 이와 관련, 박원익과 조윤호는 3년 전 출간한 ‹공정하지 않다: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성세대는 일단 '너는 누구 편이냐?' 하고 묻는 데 익숙한 세대들이다. 오늘날 50대가 된 과거 민주화세대의 경우 젊은 시절에 오래된 보수 기득권체제를 없애는 일이 공통의 사명이자 목적이었다. 그래서 때로 '우리 편'이 잘못했을지라도 어느 편이 권력을 잡는지가 매우 중요한 세대였다....그러나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20대는 정치적 입장을 먼저 정하고 내 편 네 편으로 싸우기보다 개별 사안을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파악하려는 자세를 더 '좋은 태도'로 인정한다."
이 글의 에피그라프(명구)로 소개된 한 문장은 미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선생님도 남자와 여자가 아닌 잘한 학생을 칭찬하자." 어느 초등학교 학생들이 만든 '양성평등 기본법' 중에 등장한 말이라고 한다. 사실 나도 속으로 뜨끔했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였다면, 나 역시 '여학생 우대'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여성이 당면한 구조적 불이익과 차별을 내세워서 말이다.
나는 이대남(20대 남성)의 반(反)페미니즘 성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좀 달라졌다. 한국적 실천이 아닌 이론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여전히 지지하긴 하지만, 그간 내가 반페미니즘에 대해 보인 '꼰대스러운 태도'를 성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과의 공정한(또는 남성에게 불리한) 경쟁 체제에서 살아온 이대남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제불능의 성차별주의자가 아닌 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여성을 향한 구조적 불이익과 차별에 대해 잘 알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구조의 문제를 외치지만, 이에 대한 이대남의 답은 간단하다.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
구조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2월 7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 윤석열이 좋은 연구 문제를 하나 제시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은 여성을 약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고 해 논란을 빚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그는 "남녀 차별이 없다고 말씀드린 건 아니다. 여성가족부 해체 때문에 그 말이 나온 건데, 개인적 불평등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는 말엔 공감하지만,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 '구조'와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곤 하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구조적인 성차별'을 인정하면서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는 요청에도 응답하는 타협책은 없는 건가? 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구조'와 '개인'의 화해에 일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흥미롭게도 윤석열의 발언 직후 민주당이 두 번째 연구문제를 제공했다. 민주당 여성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뿌리 깊은 성차별 문제를 개인이 해결할 문제로 인식하는 정치 지도자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모두 각자도생하란 말과 같다"며 "대한민국의 성차별 수준을 여실히 드러내는 불명예스러운 수치들을 직시하라....국민께 사죄하라"고 윤석열을 비난했다.
취지는 이해하면서도 이 비난에 접하는 순간 드는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구조적 여성차별 문제를 훤히 꿰뚫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걸 넘어서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들이기도 했던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박원순 사건' 때 '피해 호소인' 운운하면서 보여준 비겁한 추태는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구조의 문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사건에 분노해 단호히 피해자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권과 페미니즘의 편에 선 게 아닌가?
평소엔 늘 '구조 타령'을 하면서도 막상 관련 문제가 터지면 인권보다 하위개념인 정파성의 포로가 되곤 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강한 반발의 근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바로 구조의 오·남용에 대한 분노다. 기존의 정파적 편가르기도 따지고 보면 역사적 축적에 근거한 구조적 구분이 아닌가. 구조를 위해 개인을 외면하거나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건 과거 페미니스트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온 '조직보위론'의 아류가 아니고 무엇이랴.
구조의 문제를 제기할 때에도 "중립기어 박고 보자"는 자세는 의외로 유용할 수 있다. 기성 세대는 구조적 편가르기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들의 책임을 이대남에게 전가하면서도 그게 왜 문제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거시적 시각'과 '미시적 시각', '구조'와 '개인'은 혈투를 벌여야 할 관계가 아니다. 둘 사이의 균형과 조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걸 인정할 때에 비로소 이대남과 페미니즘과의 화해도 가능해질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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