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증오와 혐오의 인간 세상 갈아엎는 생명의 맥동"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2-02-09 13:59:32

체코 카렐 차페크 산문집 '정원 가꾸는 사람의 열두달'
봄의 징후 찾아 떠난 서해 태안반도 천리포수목원 생명들
노랑 꽃 터뜨린 '납매', 호랑가시나무와 동백의 붉은 정념
차페크가 찬탄한 '설강화', 파리한 줄기에 매달린 눈송이
"천 번의 작은 맥동을 거쳐 생명은 흙을 뚫고 솟아납니다"

체코 소설가 카렐 차페크(1890~1938)는 정원 가꾸는 이들에게 2월은 가장 위험한 달이라고 썼다. 이 고약한 2월도 숨가쁘게 중순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무리 교활하고 독사 알 같은 달이라지만, 이미 땅속에서 움트고 있는 봄의 기운마저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이판사판 싸움이 벌어진다고 해도,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들은 어김없이 새로운 계절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다. 

▲꽃망울을 터뜨린 천리포수목원 '납매'(臘梅). 섣달[납월臘月]에 피는 꽃을 선비들은 차가운 계절에 찾아온 손님이라 하여 '한객'이라고 불렀다. 은은한 향기 속에 노랑 잎들 사이로 얼비치는 주홍이 역광에 눈부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2월이 위험한 시기라는 사실입니다. 2월은 까막서리며 태양, 습기, 가뭄, 바람으로 정원 가꾸는 사람을 위협하지요. 연중 가장 짧은 달, 이 흡사 독사 알에 견줄 만한 달, 이 생기다만, 총체적으로 못 믿을 얼치기 같은 달은 교활한 간계 면에서는 다른 열한 달을 훌쩍 능가합니다. 그러므로 조심하십시오. 낮에는 관목들을 살살 꼬드겨 꽃망울을 맺게 만들고 밤이면 꽃샘추위로 말려 죽일 테니까요. 한 손으로는 어르고 부추기며 다른 손으로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윤년에 덤으로 주어지는 하루가 왜 하필이면 그 제멋대로의, 고약하고 사악하고 교활하고 못되어 처먹은 달에 가서 붙는답니까? 윤년이라면 저 아름다운 5월에 하루가 늘어날 수도 있잖아요. 그럼 5월이 32일이 될 테고 만사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대체 정원이나 가꾸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죠?'

차페크는 2월에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봄의 첫 징후를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썼다. 그 흔적을 찾아, 변함없는 생명의 맥동을 듣기 위해 서해 태안반도 천리포수목원을 찾았다. 들고 간 텍스트는 최근 새롭게 번역된 '정원 가꾸는 사람의 열두 달'(김선형 옮김, 민음사).

천리포수목원은 미국에서 귀화한 민병갈박사(Dr Carl Ferris Miller)가 1960년대부터 조성한 오래된 정원으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 받았다. 여름에는 내륙보다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난한 해양성 기후 조건에서 상록활엽수종을 포함한 난대성 식물에서 고산수종과 아한대성 식물까지 1만6000여 식물이 사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무리 많은 종류의 생명들이 포진한 곳이라고 해도, 계절을 극복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한적한 입구 소나무길 소슬한 바람이 청량하기는 하나, 메마른 풍경은 어쩔 수 없다. 봄의 징후는 어디서 찾을까. 

▲호랑가시나무(위)와 동백(가운데)이 붉은 정념을 발산하고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멀리 산수유를 닮은 노랑꽃이 희미하게 보인다. 2월 한낮 아지랑이가 만들어낸 신기루인가. 다급하게 걸어가 만난 작은 나무는 향기를 가득 머금고 바야흐로 노랑꽃들을 막 터뜨리는 중이다. 말로만 들었던, 사진으로만 접했던 '납매'(臘梅)다. 중국이 원산지로 음력 섣달(납월臘月)에 피는, 한겨울에 피어나는, 매화를 닮은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비들은 차가운 때 방문한 손님이라 하여 '한객(寒客)'이라고도 불렀다. 자생지가 넓지 않기 때문에 국제자연보호연맹에 멸종위기종으로 등록된 나무이기도 하다. 향은 은은하면서도 제법 자극적이다. 따스한 하오 볕이 얼굴을 간질이는 가운데 눈을 감고 납매에 가까이 다가서면 향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위무하는 느낌이다. 이제 막 터지는 중이어서 활짝 핀 납매보다 아직 용트림을 하는 꽃망울들이 더 많다. 여린 노랑 잎들 사이로 얼비치는 주홍이 역광에 눈부시다.

차페크의 산문집에 '납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중부유럽 체코의 정원에 동양 매화가 눈에 띌 리는 없었을 것이다. 차페크가 '독사 알 같고 얼치기 같은' 2월에 저 노랑 향기에 접했다면 무어라 찬탄했을까. 겨울정원으로 가는 길목에 호랑가시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민병갈 설립자가 각별히 사랑했다는 호랑가시나무 정원이다.

진한 녹색 잎 끝이 가시처럼 뾰족하고 한겨울에도 붉은 열매가 선명하게 매달려 있어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도 사랑받아 이름도 '홀리'(holly)다. 국내에는 변산반도 자생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한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윤기 도는 푸른 잎과 붉은 열매가 더 도드라진다. 봄 징후라기엔 빛깔이 강렬하고 도도해서 한겨울의 뜨거운 정념으로 다가온다. 호랑가시나무 곁 붉게 만개한 동백도 미구에 닥칠 봄을 무색하게 한다.

▲아직 겨울이지만 큰별목련(위)은 벌써 부지런히 멍울을 맺어 꽃철을 기약하고, 카렐 차페크가 찬탄한 2월 꽃 '설강화'는 눈송이 같은 꽃을 이제 막 펼치는 중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설강화 역시 봄의 전령입니다. 처음에는 흙에서 연두색 점처럼 빼꼼 얼굴을 내밀다가 통통한 떡잎으로 갈라지는데, 그러면 끝이에요. 가끔 일찍 필 때는 2월 초순에도 꽃을 볼 수 있는데, 제가 장담합니다만 그 어떤 승리의 야자수도 선악과나무도 영광의 월계관도, 칼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파리한 줄기에 달린 이 하얗고 여릿한 꽃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답니다.'

차페크가 '봄의 징후'로 꼽은 설강화가 겨울정원 '삼지닥나무' 아래 숨어 있다. 처음에는 설강화의 존재를 모른 채 지나쳤다. 설강화를 찾아 헤매다 수목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한 뒤에서야 되돌아와 나무 아래 아주 작은 자태로 흰 눈송이 같은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는 설강화를 발견했다. 설강화(雪降花 snowdrop)는 알뿌리를 가진 여러해살이풀로, 대부분 겨울에 춘분이 오기 전 개화한다. 과연 차페크가 봄의 첫 징후로 꼽으면서 장담한 것처럼 초록 줄기에 여린 흰 꽃이 인상적이다. 그는 설강화에 대한 애정을 거듭 피력하며 땅속에서 솟구치는 생명에 대한 벅찬 희망을 내보인다. 

'아, 참, 여러분,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어느새 설강화가 꽃을 피웠단 말입니다. 노란 별들이 총총 달리는 풍년화도 만개했고 헬레보어에도 오동통한 봉오리가 맺혔군요. 제대로 잘 보면(하지만 꼭 숨을 참고 보세요.) 어지간한 식물에서는 봉오리와 새순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천 번의 작은 맥동을 거쳐 생명은 흙을 뚫고 솟아납니다. 이제 정원을 가꾸는 우리는 그 생명을 꼭 붙들고 정성껏 지켜 주어야 합니다. 어때요, 벌써 핏속에 활력이 솟구치지 않습니까.'

▲프라하의 정원에서 반려견을 안고 서 있는 카렐 차페크. 그는 자신의 반려견 '다셴카'(오른쪽)와 고양이에 대한 산문집도 펴냈다. [민음사 제공]

카렐 차페크는 '로봇'이라는 단어의 창시자이자 SF 문학의 대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소설가였고 기자였다. '로봇(robot)'은 차페크가 1920년 발표한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처음 사용했다. 차페크는 1차세계대전으로 세상이 폭력과 파괴로 점철된 환경에서도 그나마 전리품으로 다가온 체코의 민주주의 상황에서, 평생 끔찍한 통증으로 고통받았던 불구에 가까운 강직성 척추염에도 불구하고 풍자와 유머를 풍성하게 구사하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는 이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실용적인 지식까지 겸비해 펴낸 이 책 외에도 '개를 키웠다 고양이도'(김선형 옮김, 민음사) 같은 반려동물 산문집도 펴냈다. 2차세계대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끔찍한 척추 통증을 견디며 식물과 동물에 대한 순일한 애정을 야만의 세상에 역설적으로 표출한 셈이다. 그가 반려동물 산문집에 기록한 이 말은, 봄을 기다리면서도 야만이 가득한 인간들의 싸움판에 새삼스럽게 설득력을 발휘한다.
▲ 카렐 차페크 산문집 '정원 가꾸는 사람의 열두 달' 표지

'불신을 조장하여 연명하는 정치는 야생의 정치학입니다. 인간을 믿지 않는 고양이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야생 동물로 봅니다.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 역시 야생 동물을 봅니다. 상호 신뢰의 조직은 문명 전체보다 오래되었고, 인류는 여전히 인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의 상태를 무너뜨린다면, 인간의 세계도 야생 동물의 세계로 전락하고 맙니다.' ('개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도')


KPI뉴스 / 천리포(태안)=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