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록 대부 신중현 "모두 함께할 '평화와 화합'의 음악판 준비하겠다"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 2021-12-27 13:25:19
"컴퓨터 음악 쉽지만 영혼 없다. 살아있지 않다"
"나라도 살아있는 음악 유지하려고 홍천행 선택"
"살기 위해 음악하지 않았다. 음악하려 먹었다"
한국 록의 대부 작은 거인 '신중현'. 한정된 글로 그를 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그의 음악 인생은 그야말로 한편의 대서사시다. 신중현이 남긴 족적은 한국 대중음악사를 도도히 관통한다.
그의 '위대함'은 이미 해외에서 인정받았다. 세계 유명 기타제조사인 미국의 '펜더(Fender)'는 2009년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한국의 신중현을 선정했다. 펜더는 자사가 만든 세계에서 하나뿐인 헌정 기타를 그에게 선사했다. 펜더사로부터 이런 헌정 기타를 받은 뮤지션은 세계에 단 6명뿐이다. 에릭 크랩튼, 제프 백, 스트브 레이 본, 잉베이 맘스틴, 반 헤일런 등 그 이름만으로도 세계음악의 역사다. 아시아에서는 신중현 선생이 처음으로 선정됐다.
지난 23일 오후 신중현 선생의 거처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인 그의 작업실까지는 서울을 빠져나온 후에도 적잖이 달려야 했다. 가끔 연 창문 사이로 들이닥치는 동장군의 기세가 무서웠다. 그의 작업실은 성동리 마을 안쪽 구불길 끝자락 낮은 구릉 산 언덕에 있었다. 작업실은 흡사 기타 네크(Neck)를 닮은 '대륭저수지'의 왼쪽 둔덕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선생은 멀리서 찾아온 이방인을 맞으려 미리 100여 미터 아래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인사를 건네자 낮게 허리를 굽히며 반갑게 손님을 맞는다. "마당에서 집안으로 올라서는 것이 불편하다"며 널빤지를 대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실내는 한참 음악 작업실 공사로 여기저기 공구며 재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것저것 직접 공사를 하다 보니 어지러워서 어쩌나. 앉을 곳도 변변치 않다"며 의자를 내민다.
신중현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마지막 음악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곳은 전국에서 제일 공기가 맑은 곳이다"며 터 잡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절경이다. 사방으로 트인 창 너머로 겨울 산과 저수지가 강원도의 빼어난 경치가 펼쳐졌다. "평생 음악 한다고 지하실같이 좁고 어두운 곳에 살다 보니 이제 넓은 곳에서 살아보자는 맘에서 옮겼다"며 터트리는 웃음이 소년처럼 해맑다.
이곳은 가칭 '신중현 음악연구소'다. 선생은 "완성되면 '아름다운 강산'이라고 이름 짓겠다. 음악 작업부터 녹음, 공연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 록의 전설이다. 국내 최초의 록그룹을 만든 이가 바로 신중현이다. 미8군 무대에서 실력을 닦은 그는 1964년 국내 최초의 록그룹인 ADD4를 결성, 전설의 히트곡 '비속의 연인(현 빗속의 연인)'을 발표하며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록은 세계적인 붐을 타고 태생기를 맞고 있었다. 국내에선 대부분 서양 록 음악을 흉내 냈지만 그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담은 한국 록을 추구했다. 하지만 빼어난 실력에도 ADD4는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미8군 무대로 돌아간 그는 이후 다양한 음악을 섭렵하며 기량을 갈고 닦았다. 사실 미8군 무대는 그에게 있어 생계를 잇게 해 준 고마운 직장이자 프로 뮤지션으로 길을 열어준 기회의 장이었다.
"어떤 음악을 듣고 공부할지 막연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 사회가 안정되니까 종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외국 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사실 설 무대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다. 당시 세계 주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미8군 무대는 음악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그곳에선 재즈, 블루스, 로큰롤 등 세계적 수준의 음악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문지방도 높았다. 미 본토에서 온 음악전문가가 오디션을 봤으니 유명 가수라도 퇴짜 맞기 일쑤였다. 오로지 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선생은 "까탈스러운 미군의 눈높이를 맞출 레퍼토리나 연주를 위해 창고에 기거하며 밤새 연습했다"고 회상했다. 하루는 한 미군이 도넛판(소형 LP판)을 들고와 앨범 속 곡을 연주해 달라고 했다. 수백 수천 번 들으며 곡 카피를 했다. 나중에 무대에서 연주하니 미군이 기립박수를 하며 환호하더란다.
신중현 선생은 한국 가요사에 남을 굵직한 히트곡을 여럿 작곡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음악적 방향은 누가 뭐라 해도 록을 기반한 '사이키델릭'이다. 수많은 그의 히트곡에 언제나 몽환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는 이유다.
"사이키델릭은 1960년대 생겨났다. 히피나 반전 등으로도 대변된다. 사회저항 요소도 꽤 있었다.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 혹은 기득권이나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도전이랄까. 돌이켜 보면 이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갈망이 오늘날 디지털 세계에 대한 원초적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 무렵 세계 문화 예술계엔 대마초 등 환각을 좇는 것이 유행했다. 정상에서 벗어나 느끼는 감정. 제2의 세계 추구. 지미핸드릭스 등이 당시 문화의 꽃으로 여겨진 이유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의 이런 현상은 새로운 세계관을 제공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그는 어느새 달변의 웅변가로 변신해 있었다.
한국 록에 대한 신념도 설파했다. "록의 바탕은 블루스에 있다. 블루스는 모드(Mode) 음악이다. 모드는 어떤 나라나 지방에서 탄생한 가락을 말한다. 우리도 우리만의 가락이 있으니 그것이 록과 어우러지면 한국 록이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우리의 혼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라는 고민이다."
선생에게도 암흑기가 있었다. "독재가 싫었다. 대통령 찬양곡을 쓰고 싶지 않아 대신 '아름다운 강산'을 작곡했다. 방송국에서 최소한 귀는 노출되도록 머리를 자르고 출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육책으로 머리핀을 꽂았는데 이게 화근이 돼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다. 이후 장발 단속이 시작되자 세간에선 신중현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1975년 박정희 정부는 '가요정화 운동'이란 이름으로 그를 비롯한 당시 여러 유명 연예인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퇴폐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가요계에서 퇴출했다. "음악과 관련한 일체 활동이 금지됐으니 사실 사형수가 된 것이나 매한가지였다"고 회고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쓴 '아름다운 강산(1974)'이 80년대 들어 국민가수 이선희가 부르며 그의 인생 역작이 됐다는 점이다.
신중현 선생은 한국 대중 음악계에선 단지 '선배'가 아니다. 살아있는 역사다. 후배들에게 던지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터다. 요즘 음악에 관해 묻자 그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한참이 지나서야 "살아있는 음악이 사라지고 있다"라며 역정을 낸다.
"컴퓨터 음악은 쉽다. 사운드 질감을 내기도 쉽고. 하지만 이런 건 음악이 아니다. 살아 있지 않다. 음악은 인간의 손에서 나와야 한다. 컴퓨터는 영혼, 정신이 없다. 음악이 없는 시대다. 이곳에 온 이유도 사실 이것 때문이다. 나라도 인간적인 음악을 유지하려 한다." 격정을 토하곤 깊은 한숨을 몰아쉰다.
"예전엔 동시에 합주하며 녹음을 했다.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으니 번거로웠지만 살아있는 음악 자체를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실력이 없으면 아예 앨범 자체를 낼 수 없었다. 지금 다시 그렇게 하라면 사실 자신은 없다." 웃음지으며 엄살을 부렸지만 눈빛은 만능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요즘 세태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음악 정신을 강조했다. 삶에서 음악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음악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단언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음악에는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었고 후진국의 설움을 느끼며 살았다. 독재 정권의 엄혹함을 보았고 국가의 번영을 보았다. 고단하게 살아 내 음악은 거칠고 흠이 많다. 하지만 내 음악엔 정신이 살아 있다. 나는 음악을 하기 위해 먹었다. 먹기 위해 음악을 하진 않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악기를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엔 두말없이 "기타"라고 답한다. "기타는 소리 내기 힘든 악기지만 내 것이 되면 어떤 악기보다 다양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다른 고전 악기와 달리 모든 현대 음악을 품을 수 있다. 주법도 다양해 기타 하나면 인간의 희로애락 모두를 표현할 수 있지."
그에게 음악은 가업이다. 기업은 신대철·신윤철·신석철 삼형제에게 이어졌다.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다. 항상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되어야 음악에 혼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화려한 연주 테크닉은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건 그저 부차적이다. 인간이 되려 항상 낮은 자세로 임하길 바라는 맘이다."
사실 삼형제는 이미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재들이다. 자식을 향해 '아직 멀었다'는 인색한 평가는 아마도 "사랑한다"는 그만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잠시 창밖 풍경을 보던 그는 "큰 계획이 있다"며 말을 이어간다. "아주 큰 음악을 준비하고 있다. 밴드, 오케스트라, 합창단, 연주인, 래퍼, 무용단 모두가 함께 모여 신명난 판을 벌리려고 한다. 모든 것을 담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곡을 준비하고 있다. 곡의 주제는 '평화와 화합'이다."
그는 암울한 1970년대 대한민국의 찬란한 미래를 점친 '아름다운 강산'을 작곡했다. 선생이 준비 중인 큰 음악은 고도성장의 후유증, 정치적으로 나뉜 반목의 정서 등으로 신음하는 사회에 던지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 '제2의 아름다운 강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작은 거인 '신중현'의 음악 인생은 위대하다. 스스로 그리 생각할까. "인간 인생 백 년도 안 된다. 그냥 왔다가는 것. 가난과 부, 크고 작은 것도 중요하지 않다. 최선을 다해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위대한 삶이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이 건네준 '헌정 기념앨범'을 차에서 틀었다. 이 앨범은 그가 14년의 공백을 깨고 2017년 내놓은 앨범이다. 2009년 펜더가 제공한 헌정 기타에 대한 음악적 답례다. 신중현은 당시 녹음을 위해 아들 셋을 불렀다. 신대철, 신윤철, 그리고 신석철. 현직 프로 기타리스트 둘과 프로 드러머 한 명이 아버지의 부름에 한숨에 달려왔다.
신중현은 노래에 있어 '절창'은 아니다. 무색한 그의 보컬을 휘감아 무림 고수 삼형제의 악기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잠시 후 신선인 듯 소리 없이 움직인 그의 손끝은 잠자는 펜더를 깨우더니 삼형제에게 일격을 가했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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