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문재인, 대북제재 완화냐 '이지 고'냐
김당
dangk@kpinews.kr | 2021-10-05 12:02:52
정의용 "북에 인센티브로 대북제재 완화 필요…위반하면 '스냅백'"
미 국무부 "유엔제재 여전히 유효...강력하고 통일된 메시지 보내야"
한국 정부가 독자적인 '대북 제재 완화'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하던 대로 '이지 고(easy go)'의 길을 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북한이 4일 오전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을 이행한 가운데 한국과 미국에 자국에 대한 '이중기준'과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선결과제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날 통신연락선 복원과 동시에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김정은 동지의 뜻을 받들어 해당 기관들에서는 10월 4일 9시부터 모든 북남 통신연락선들을 복원하기로 하였다"면서 "남조선(남한) 당국은 북남 통신연락선의 재가동 의미를 깊이 새기고 북남관계를 수습하며 앞으로의 밝은 전도를 열어 나가는 데서 선결되여야 할 중대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김정일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통신연락선 복원 방침을 밝히며 "종전을 선언하기에 앞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보장되고 타방에 대한 편견적인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계속 밝히고 있는 불변한 요구이며 이것은 북남관계를 수습하고 앞으로의 밝은 전도를 열어나가기 위해서도 선결되어야 할 중대과제"라고 언급했다.
그에 앞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도 지난달 25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설치와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한 담화에서 '선결조건'으로 적대정책과 함께 이중기준 철회를 주장한 바 있다.
김여정의 담화가 예고편이라면 김정은의 연설은 본편이다. 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너나없이 김정은의 연설을 받아쓰기 하는 장면에서 보듯, 김정은의 '말씀'은 헌법보다 상위에 있으니 그 무게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시정연설의 전문은 각급 당 및 근로단체 조직들, 인민정권기관, 무력기관, 사법검찰, 사회안전기관들과 대남, 대외사업기관들에 출판∙배포된다. 우선 각급기관의 성원들부터가 김정은 시정연설 전문을 밑줄 치며 학습하게 된다.
노동신문의 5일자 1면 사설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역사적인 시정연설을 깊이 학습하자'이다.
사설은 "역사적인 시정연설은 중첩되는 도전과 난관을 뚫고 사회주의건설의 새 승리를 앞당겨올 수 있는 명확한 진로를 천명한 것으로 하여 전체 인민의 심장을 무한히 격동시키고 있다"면서 "전체 인민이 총비서동지의 구상과 의도를 받들어 우리식 사회주의의 전면적 발전을 이룩해 나가자면 시정연설의 사상과 정신, 내용을 깊이 학습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한 주민들이 밑줄 치며 읽는 노동신문에도 '이중기준과 적대정책 철회라는 선결과제'를 '최고지도자의 말씀'으로 공개한 이상, 북한은 김정은이 통신연락선 재개와 함께 던진 선결과제가 '빈말'이 아님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에 '통신선 복원'이라는 당근과 함께 미사일을 발사하며 '이중기준과 적대정책 철회'라는 채찍(선결과제)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김정은의 시정연설이 북한 언론에 공개된 다음날인 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나온 북한의 '이중기준' 철회 요구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이제는 (대북) 제재완화를 검토할 때가 됐다"는 정의용 외교장관의 답변에 담겨 있다.
정 장관은 이태규 의원(국민의당·비례)이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검토할 때가 됐다"며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기 위해선 인센티브 제공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비핵화 이행을 위해 북한에 실질적 조치를 취하는 것도 대전제다"며 "그것이 안 되고서는 북·미 대화가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 카드'를 꺼낸 다음날인 지난달 22일 뉴욕의 싱크탱크 미국외교협회(CFR) 초청 대담에서도 "우리는 북한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일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며 대북제재 완화를 주장했다.
다만 정 장관은 당시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면 다시 대북제재를 복원하는 '스냅백'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약하면 북한의 '이중기준 철회'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북한이 사실상 '대북제재 폐기'를 염두에 둔 '적대정책 철회'는 '제재 완화'의 선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이중기준 및 적대정책(대북제재) 철회' 요구에 대한 미국의 공식 입장은 단호하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1일 한국 정부의 '대북제재 완화 주장'과 관련한 논평에서 "북한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제재 회피 노력을 통해 계속해서 대량살상무기(WMD)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자금을 대고 있다"며 "북한에 대한 유엔의 제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이 도발을 중단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의무를 준수하며, 미국과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강력하고, 통일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무부의 반응은 북한이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 방침과 '조건부 남북 정상회담' 의향을 피력한 것을 계기로 한국측이 대북 제재 완화 카드를 제시하자, 이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며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4일 전화브리핑에서도 "우리는 북한이 여러 안보리 결의를 반복해서 위반하는 것을 계속 우려하고 있다"면서 "안보리 결의의 완전한 준수와 모든 기존 유엔 제재의 완전한 이행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거듭 밝혔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북한이 유엔 안보리에 대한 입장을 낸 것과 관련한 보도를 알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유엔 안보리가 최근 북한의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비공개 긴급회의를 소집한 데 대해 북한이 '명백한 이중기준'이라며 강하게 반발한 것에 대한 화답이다.
조철수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장은 3일 담화에서 "안보리가 미국과 추종세력들의 대규모 합동군사연습과 빈번한 공격용 무기 시험들에 대해서는 함구무언하면서도 우리의 정상적이고 계획적인 자위적 조치들을 걸고 든 것은 유엔 활동의 생명인 공정성과 객관성, 형평성에 대한 부정이며 명백한 이중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엔과 국제사회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미국의 우려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가 4일 공개한 전문가패널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꾸준하게 회피하면서 핵과 탄도미사일 기술 개발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보고서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수법을 정교화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홍콩을 통해 인수한 선박이 한국기업의 소유였다"고 지적했다. 안보리의 사전 승인 없이 북한에 직·간접적으로 선박이나 차량 등 운송수단을 판매하거나 이전하는 행위는 대북제재 위반이다.
이처럼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로 대북제재 완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제재 완화의 길을 가기에는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다.
특히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는 북한의 핵·탄도미사일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합의된 것인데,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이행하지 않는 상황에서 제재 완화를 우선 진행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또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등 도발이 잇따른 상황에서 자칫 한미 대북 공조에 있어 엇박자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북한은 올해 들어 일곱 번째, 특히 9월에만 28일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를 포함해 네 번째 미사일 무력시위를 하면서 남측에 대화와 도발의 '이중 쌍끌이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대북 원칙론을 고수하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와의 직접 대화가 어려워지자 한∙미를 분리 대응하는 식으로 협상의 틈을 벌리려는 셈법이다. 그러면서 남측에는 통신선 복원과 정상회담 카드라는 '당근'과 미사일 시험발사라는 '채찍'을 휘두르며 '말이 아닌 행동을 취하라'고 압박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에게는 선택의 시점이 다가오는 셈인데, 그 분기점은 일단 북한이 지난달 28일 시험발사를 진행한 극초음속 미사일 '화성-8형'에 대한 분석 결과에 달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극초음속 미사일은 현재 기술로는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전 세계 어느 지역이든 1~2시간 내 타격이 가능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로 불린다.
한국 합동참모본부는 시험발사 다음날 "북한이 시험 발사했다고 공개한 '극초음속 미사일'의 탐지된 속도 등 제원을 평가해볼 때, 개발 초기 단계로 실전배치까지는 상당기간 소요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미국은 '극초음속 미사일'에 대한 평가에 좀더 신중한 입장이다. 다만 북한이 극초음속 미사일을 전력화할 경우, 한-미 양국의 현존 미사일방어 자산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지적에는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단기적으로 한국 정부의 선택은 극초음속 미사일에 대한 한미 합동분석 결과가 '과장된 뻥카'냐 아니면 '게임 체인저'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후자일 경우 미국은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나오게 하기 위해 더 강경한 대응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뻥카'일 경우 한국은 남북 대화를 재개해 독자적인 제재 완화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한국 정부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북한 관광사업을 통한 대북 지원이 그 출발선이 될 것이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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