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립소년직업훈련소가 북파공작원 '황금어장'
김당
dangk@kpinews.kr | 2021-03-26 17:13:57
국립소년직업훈련소 500명 중 7·8기생 25명씩 50명 데려가
고아원 출신으로 입소 제한돼 물색관의 '표적'…아동복리법 위반
1962년 7월 19일 별 세 개짜리 번호판을 단 군용 지프와 고급 승용차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인천의 한 산동네로 모여들었다. 인천시 구산동 산 30번지(현주소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 29번지)에 건립된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준공식과 테이프 커팅에 참석하는 외빈들이었다.
1년여 전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육군 소장 등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이 국가재건최고회의(1961. 6~1963. 12)라는 국가최고통치기구를 설치해 2년반 동안 입법·사법·행정의 전권을 행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은 1960년 기준으로 해외에 상품 수출로 벌어들인 수입 총액이 3300만 달러에 불과하고, 국민 1인당 GNP는 90달러인 최빈국이었다. 6·25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대도시의 거리에는 전쟁고아와 부랑아, 윤락녀, 그리고 상이(傷痍)군인들이 넘쳐났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전후(戰後) 복구과정에서 야기된 각종 사회문제에 대처해 △윤락행위방지법(1961. 11. 9) △직업안정법(1961. 12. 6) △아동복리법(1961. 12. 30) △생활보호법(1961. 12. 30) △원호대상자 직업재활법(1963. 7. 26) 등을 제정해 민생안정을 도모했다.
예를 들어 정부는 윤락행위방지법에 따라 서울시립부인보호지도소에 이용∙양재∙편물∙수예∙미용과를 개설해 '보호 대상 부녀자'를 위한 직업보도시설 운영을 제도화했다. 생활보호법은 신체장애자 수용시설에 목공∙철공∙제화∙양재∙이발 등 10개과를 개설해 1~2년간의 직업보도를 실시하도록 했다. 또한 원호대상자 직업재활법에 따라 상이군경과 유족을 위한 직업재활원을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보건사회부 내의 직업안정국이 노동청(1964년)으로 독립하기 이전이었다. 정부정책도 산업화를 위한 노동인력 공급이 아니라 사회안정을 위한 직업보도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날 인천에 설립된, 1500명의 고아를 수용할 수 있는 최초의 국립소년직업훈련소도 보육시설, 부랑아보호시설 등과 함께 아동복리법에 따른 아동복리시설이었다.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준공식 테이프 커팅 사진에는 이주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필두로 정희섭 보건사회부장관, 김병삼 내각사무처장 등 군사정부 요인들, 2억환의 자금을 기증해 훈련소 건축에 기여한 김영귀(풍한산업), 채몽인(대륭산업), 이봉수(신일기업) 등 독지가들과 외국인 등이 등장한다.
UPI뉴스가 발굴한 '미공개 대한뉴스'(KC 제375호) 4분50초 분량의 영상을 보면 3성 장군인 이주일 최고회의 부의장과 정희섭 보사부장관이 '훈시'를 하고, 건립 유공자들과 훈련생들에게 각각 감사장과 상장·상품을 수여하고, 외빈들이 직업훈련소 내외부 시설을 순시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극장에서 '대한뉴스'로 상영되지 않은 미공개 영상이어서 음성이나 내레이션이 없지만, "고아들의 배움의 전당이 될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본관이 인천시 구산동에 세워져 그 낙성식이 1962년 7월 19일 훈련소 광장에서 있었다"는 요약 설명이 붙어 있다.
천막이 처진 본부석에는 별을 단 군복을 입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멤버들과 나비 넥타이를 맨 외국인과 외빈들이 앉아 있고, 연병장(운동장)에는 앳된 소년훈련생 수백 명이 군대처럼 대오를 맞춰 긴장된 자세로 서 있다. 더러는 성숙해 보이는 '반장' 완장을 찬 훈련생도 있지만 대개는 14~15살쯤 된 앳된 아동들이다.
이날 소년훈련생들에게 훈시를 한 이주일 부의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처럼 만주 신경군관학교∙일본 육사를 졸업한 만주국(관동군) 장교 출신이다. 종전후 베이징의 광복군을 거쳐 국내 입국해 육사(7기 특별반) 졸업후 대위로 임관했다. 1961년 제2군사령부 참모장으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과 부의장을 역임했다.
이주일 부의장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박정희 의장은 "직업훈련에 그치지 말고 인간개조에 하나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면서 "많은 고아들이 기술을 배워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상에는 "기술은 일생의 재산이다"라고 쓰인 야외 게시판 옆에 앉아있는 소년들이 보이는데, 국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까지 가르쳐주는 직업훈련소의 행사를 부러움의 눈길로 쳐다보는 듯하다.
정희섭 보사부장관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개업의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군의관으로 1961년까지 육군군의학교 교장, 육군의무감을 역임하고 준장으로 예편했다. 5·16군사정변 후 1961년 7월 9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2년6개월간 근무하고, 1963년 9월 초대 노동청장을 거쳐 1966년 4월에 다시 12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기용돼 1969년 10월까지 3년6개월을 더 재직했다. 정 장관은 소년직업훈련소의 설립과 폐지에 모두 관여했다.
준공식로부터 4년여가 지난 1965년 11월의 어느 날 이번에는 계급장 없는 군복 차림에 허리에 45구경 권총을 찬 군인 2명과 군의관 2명이 직업훈련소를 방문해 훈련생들을 강당에 불러 모았다. 7개월 전에 부산의 희락원에서 올라와 입소한 홍재곤씨(당시 16세)도 그 자리에 불려왔다.
희락원은 원래 1953년 3월 6·25 전쟁 고아들을 보호·양육하기 위해 문을 연 보육시설이었다. 홍씨는 8살 때 소갈병(당뇨병) 환자인 아버지를 여의고 여동생과 함께 이곳으로 보내졌다. 홍씨는 희락원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국가에서 고아들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도 가르쳐주는 직업훈련소가 인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정○철과 함께 입소했다.
국립소년직업훈련소는 보육시설에 수용된 14~18세 남자아동에게만 입소 자격이 있었다. 정원은 △농축 △원예 △기계 △목공 △이용(理容) △프린트 △통신전자 △화공 △상업미술 △토건 등 10개과에 50명씩 총500명이었다. 홍씨는 농축과, 친구 정씨는 화공과에 각각 입소했다. 1년의 직업훈련 과정을 마치면 수료와 함께 훈련소에서 직장을 알선해 주는데 홍씨는 제주도의 국립말목장으로 취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홍씨의 소박한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훈련생들은 일과시간에는 각 과별로 실습 위주로 공부를 하고 일과가 끝나면 기숙사의 방 하나에 30명씩 군대 내무반처럼 생활했는데 강당에는 전교생이 모여 있었다. 단상의 '권총 찬 군인들'은 "너희들에게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를 주겠다"며 "우리와 함께 일하면 우리처럼 권총도 차고, 남자답게 적지에 침투해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연설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은 육군 첩보대 인천101지구대의 물색관들이었다. 물색관과 군의관은 훈련생들에 대한 3차에 걸친 신체검사와 인지능력검사, 용맹성과 정신력 테스트 등을 거쳐 최종 25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개별 면담을 거쳐 계약서를 쓰게 하고 회수해 갔다. 내용은 6개월 훈련을 받은 뒤에 이북에 가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면 성과에 따라 보상해주고 제대증과 함께 국가에서 평생 연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홍씨는 16세에 북파공작원 계약과 동시에 논산훈련소로 가서 전반기 육군 기본훈련을 받고, 후반기에는 무장공작원에게 필요한 기본훈련인 조준사격 및 돌연사격, 세열수류탄 투척, 독도법 등을 훈련받았다. 징집 연령에 미달한 홍씨와 동기생들은 논산훈련소의 '2훈특병77호'에 근거해 1966년 4월 27일부로 이등병 군번(11595728)을 받고 자대인 인천101지구대(위장 명칭 '한국문화사')의 '안가'로 복귀했다.
이어 이들은 인천 장수동의 소래산(해발 290m) 육중봉쇄 침투훈련장에서 30kg 모래배낭을 메고 시속 20km로 주파하는 체력훈련과 군사분계선(MDL) 너머 북방한계선까지의 육중봉쇄 지뢰밭 침투훈련, 그리고 목표지점의 폭파·기습공격·사살·납치·노획 훈련을 지겹도록 반복했다.
적진에서 유사시에 몸이 자동반응하는 '살인병기'로 숙달된 동기생들은 실전을 위해 인천101지구대와 속초903지구대, 그리고 5개 군단(201문산대·202춘천대·203양구대·205운천대·206전곡대)에 배속돼 1967년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해 휴전선 155마일 서부·중동부 전선으로 동시에 침투한 8개팀 48명의 북파 무장공작대 중에서 홍씨의 국립소년직업훈련소 8기 동기생 2명(강교춘·김용택)과 6개월 앞서 입소한 7기생 4명(김덕재·김창덕·장정혜·전운성) 등 6명이 전사했다. 북파 무장공작대 팀장은 8명 중 1명(사망률 12.5%), 팀원은 40명 중 6명(사망률 15%)이 전사했다.
홍씨는 남북간에 비무장지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1967~1969년 사이에 적진에 13회나 침투해 무장공작 임무를 수행해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북파 기간이 길어질수록 남은 것은 '개죽음'뿐이란 사실을 목도했다.
홍씨는 인천101첩보대장에게 끈질기게 계약해고를 요구해 마침내 공작원에서 하사관으로 양성화되었다. 그래서 홍씨는 병과 하사관, 두 개의 군번을 갖고 있다. 그는 69년부터 정보사에서 북파 무장공작대 및 단독첩보수집 공작원의 침투훈련과 1·21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만든 국내 유일한 수인(囚人)부대인 '선갑도 부대'의 훈련조교 등을 담당했다.
홍씨는 1998년 6월 30일 국군 제9965부대(국정사) 예하 902정보부대 대방동 캠프 그레이 에넥스 한미 합동대의 행정운영담당관으로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 정보사 소령과 함께 근무하다가 원사로 전역했다. 소년병으로 입대한 홍씨는 32년 군복무를 마치고도 49세였다.
정보사 예하부대 행정운영담당관으로 명예퇴직한 홍씨는 2000년부터 북파 공작원 이슈가 불거지자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동기생들을 찾았다. 8기 동기생과 7기생을 합쳐 50명이 확인되었다. 전사자들과 혼자만 살아돌아온 자책감과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으로 사망한 채○덕을 제외하면 홍씨와 강○석, 김○준, 박○희, 성○만, 송○호, 안○호, 안○섭, 전○춘 등 9명이 생존해 있다. 나머지는 연락 두절이다.
7기생 중에선 인천101지구대 번개2호팀의 이종승씨가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 첩보대 물색관들이 이들보다 앞서거나 나중 기수의 훈련생들도 북파공작원으로 물색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다. 하나같이 14~18세에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 입소해 목공이나 축산 기술을 배워 배고픔을 면하고 집을 짓는 목수나 목장 관리자가 되는 소박한 꿈에 부풀었던 소년들이었다.
정식 인가학교가 아니었고 1969년에 직업훈련소가 폐지돼 학적기록을 확인할 순 없지만 관보에 남은 운영규정을 통해 요강을 파악할 수는 있다. 당시의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운영규정'(보건사회부령 제155호)에 따르면 입소 연령은 '시설에 수용된 14세부터 18세 이하의 남아아동'으로 제한되었다.
입소 자격은 △육아시설에서 성장한 아동 또는 생활보호법에 의하여 자기주거에서 보호를 받는 아동 △국민학교 졸업 이상 학력자 △신체가 건강하여 훈련에 지장이 없는 자의 세 가지였다. 훈련생은 전원 기숙사에 수용해 무료 급식하고, 학용품과 교육자재 등도 무료였다.
1961년 8월 기준으로 전국 시설에 수용된 아동의 수는 남자 4만530명, 여자 2만2077명이었다('한국의 고용정책', 노동연구원, 2005년). 홍씨처럼 전국의 육아시설에 수용돼 있던 중학생 아동들이 대거 인천 국립소년직업훈련소로 몰려든 배경이다. 그런데 '고아이면서 신체가 건강한 소년들'은 물색관들이 북파 무장공작대의 '소모품'으로 충원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었다.
국방부와 정보사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은 100명에 1.4명꼴로 사망했지만, 북파 무장공작원은 10명 중 3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북파 무장공작원은 생존율로 따지면 대한민국 최고의 고위험 직군이다. 설령 적진에서 죽어도 찾을 가족이 없는 고아들로만 채워진 국립소년직업훈련소는 첩보대 물색관이 '소모품'을 지속적으로 보충할 수 있는 '물 반 고기반의 황금어장'이었던 것이다.
준공식 때 박정희 의장은 이주일 부의장이 대독한 훈시에서 "직업훈련에 그치지 말고 인간개조에 하나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면서 "기술은 일생의 재산이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는 그 몇 해 뒤부터 소년 훈련생들을 사탕발림과 목돈의 유혹으로 속여 대패와 보습 대신에 대검과 총을 쥐어주고 '살인병기'로 인간을 개조했다.
아동복리시설 아동의 소년병 징집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일 뿐만 아니라 당시 보사부가 스스로 제정·시행한 아동복리법을 위반한 것이다.
아동복리법(1962. 1. 1. 시행, 법률 제912호)에 따르면 정당한 직업소개기관 이외의 자가 '18세 미만인 아동'의 교육을 알선하고 아동을 학대하는 행위는 20~30만환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에 처한다고 돼 있다. 당시 10환에 붕어빵 1개, 세뱃돈 50~100환이었다고 하니 붕어빵 2~3만개를 사 먹을 수 있는 벌금이다(박정희 군사정부 1962년 6월 9일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해 구화폐 10환을 신화폐 1원으로 교환토록 했다).
50명의 아동을 북파공작의 '소모품'으로 데려간 국립소년직업훈련소는 1969년 6월 27일 정희섭 보사부장관이 공포한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운영규정폐지령(보사부령 제293호)에 의거해 폐지되었다.
그동안 다른 언론의 선행 보도를 통해 구직자 취업 알선, 범죄자 사면 등을 구실로 한 다양한 북파공작원 물색의 양태가 보도되었다. 하지만 국가가 책임·관리하는 아동복지시설에서 군이 직접 주기적으로 북파공작 소년병들을 '소모품'으로 충원한 사실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북파공작원 문제 선행 보도와 연재 예고
북파공작원 문제는 1999년 8월 〈한겨레21〉이 '북파간첩 7726명이 사라졌다'라는 표지기사로 처음 보도한 것을 계기로 2000년 10월 16대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김성호 의원이 음지에 있던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처음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후 2004년에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법 및 지원법'이 제정∙시행돼 최소한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졌다. 보상절차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특별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북파공작원 문제는 여전히 국가안보라는 구실로 그 실체가 가려져 있다.
그간의 주요 선행 보도와 경과를 일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8 한겨레21, '북파간첩 7726명이 사라졌다' 표지기사로 북파공작원의 실체 첫 보도
- 10. 2 MBC, '최초 공개 북파공작원 명단', '우리도 북한에 공작원을 파견했다' 보도(김성호 의원 국감자료)
- 10 김성호 의원, 국감에서 '종결공작원 명부'(1950년대 HID 교육대 1~3기 출신 명단) 최초 공개
- 11. 2 '설악동지회' 회원 100여명, 국군정보사(당시 서초동) 앞에서 첫 집단시위
- 11. 22 대한민국 첩보전 유공자대책위, 서울 삼성동 봉은사 충령각에서 첫 공개 추도회
- 1 국회, '특수임무수행자 보상 예우법' 제정 (현재도 국방부 산하에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 존치돼 있음)
- 3. 4 kbs, '북(北) 체포 추정 북파 공작원' 41명 명단 보도(HID 북파공작원 유족∙동지회 자료)
- 6 월간조선, '1·21 청와대 습격 보복작전...핵심 장교들의 최초 증언 - HID 대북 작전 비사' 보도
- 9 신동아,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말하는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보도
UPI뉴스는 선행 보도를 토대로 추가 취재해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1960년대 북파공작 소년병들의 집단 전사(戰死) △북파공작 소년병 물색의 '황금어장'이었던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북파공작 소년병들의 시신 인도를 거부한 대한민국 △국립현충원의 유골없는 묘역 △국가안전기획부가 국군정보사에 하달한 북파공작 지침 등을 탐사 보도한다.
((다음 번에는 '당시 소년병들은 어떻게 죽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갑니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