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4~17세 소년도 북파공작에 동원했다
김당
dangk@kpinews.kr | 2021-03-23 16:54:17
북파공작 8개팀, 1967년 7월 서부∙중동부 전선 동시 침투
전사 7명 중 6명이 10대 소년병…국제법∙아동복리법 위반
UPI뉴스는 북파공작원 모집∙물색 단계부터 훈련∙양성 과정, 그리고 정리∙해고 단계까지 인권을 유린하고 '소모품' 취급한 국가범죄의 흑역사를 단독발굴해 7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탐사보도를 계기로 관련 제보가 이어져 이 연재가 더 늘어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편집자
1967년 7월 13일(음력 6월 6일) 저녁 8시쯤 백두산부대(육군 21사단)가 관할하는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의 GOP(일반 전방초소) 통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조선인민군 복장에 개머리판 없는 M2칼빈소총으로 무장한 10여명의 청년들이 한국군 장교와 호송조의 안내를 받아 비무장지대(DMZ)로 미끄러지듯 어둠을 가르고 사라졌다.
이 가운데 6명은 육군 첩보대(1961년 7월 HID에서 AIU로 영문 명칭이 바뀌었으나 관행적으로 HID 명칭을 사용했음) 예하 인천 101지구대(위장명칭 '한국문화사')의 북파무장공작 대원들이었다. 101지구대는 번개1·2호 두 팀을 운용했는데, 이 팀은 이행근 육군 대위를 팀장으로 한 번개2호팀이었다.
휴전협정 제1조에는 DMZ에 관한 규정이 명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사령관은 군사분계선(MDL)을 기점으로 남북 2㎞ 지점의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에 표지를 세우게 되어 있으며, 이 지역은 군사정전위원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DMZ의 중요 기능이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 역할이기에 DMZ 안에서나 DMZ를 향해서는 어떠한 적대 행위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누구든 DMZ에 들어가려면 군사정전위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 경우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총인원은 1000명을 넘지 못하고 무기를 휴대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양측은 이미 1953년 휴전 직후의 군사정전위 제3차 본회의에서 DMZ 내의 민사행정경찰 업무를 수행할 경찰을 휴대무기를 소지한 군사경찰(헌병)로 대체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어 북한은 1959년 여름부터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들을 요새화했으며 1965년 무렵부터는 대부분의 양측 초소가 요새화되었다.
DMZ 안의 육중봉쇄 장애물
DMZ에 들어간 번개2호팀도 군사정전위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 다만 백두산부대의 최전방 초소(GOP)와 감시초소(GP) 병력에게는 이들의 진입이 통보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이들을 '북괴군'(당시 공식 표현)으로 오인 사격할 가능성이 십중팔구이기 때문이다.
평소의 교대 병력보다 많은 병력이 이동하려면 북한군 GP의 포대경(망원경)에 포착되지 않도록 허리를 구부려 낮은 자세로 움직여야 했다. 이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70~80도 경사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 아군 304GP에 도착했다.
포대경 2대가 설치된 GP관측소는 보병이 아닌 포병이 관리한다. 포병이 GP에 파견된 이유는 유사시 적에게 포탄 세례를 주기 위해서다. 후방에서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적의 진지와 이동병력을 감지할 수 없다. 그래서 후방의 포병대는 GP 파견 관측장교가 무전으로 불러주는 좌표를 듣고 포신을 조준해 포탄을 발사하게 된다.
이행근 팀장은 포대경으로 적진 침투로 상의의 지형지물을 관측하고 타격임무 목표지점까지의 도상거리와 실거리의 오차를 계산해본다. 팀장과 대원들은 14일 하루 내내 DMZ 안의 지형과 적 초소 및 잠복호의 병력 움직임을 손금 보듯 꿰고 있는 304GP장에게서 관련 정보를 숙지했다.
GP 장병들에게 이들은 '위험한 불청객'이다. 이들이 오면 군사분계선까지 호송해야 하는 가욋일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7월 15일 군사분계선까지 호송할 304GP장과 병사 3명, 101지구대장과 공작담당관 그리고 6명의 북파무장공작원의 순서로 줄지어 이동을 개시했다. 어깨에는 각각 25Kg 무게의 침투장비와 비상식량을 담은 배낭과 개머리판 없는 M2 칼빈소총이 걸쳐져 있다.
앞에는 해발 700~800미터 높이의 산들이 즐비하다. 번개2호 팀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군사분계선 전방 50미터 지점에 도착해 호송 GP장 및 101지구대장과 헤어졌다. 침투 예정시각인 밤 10시가 되자 척후조와 팀장, 그리고 팀원들 순으로 5미터 간격을 유지한 채 일렬 종대로 군사분계선 가시철조망을 넘는다.
이제부터는 육중봉쇄 장애물이 설치된 고립무원의 적진(敵陣)이다. 육중봉쇄 장애물은 말 그대로 여섯 겹으로 펼쳐진 장애물을 지칭한다. 철조망 장애물, 각종 지뢰, 모래장애물, 실장애물, 전기장애물, 함정장애물 같은 것들을 통틀어 그렇게 불렀다.
육중봉쇄라고 해서 어느 지역이나 똑같은 순서로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형지세에 따라서 어떤 장애물을 보태거나 빼고 설치한다. 가장 흔한 장애물인 철조망은 상해를 입힐 뿐이지 사람의 생명을 직접 빼앗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하게 해 노출 위험에 빠트린다.
문제는 직접 생명을 빼앗거나 위험에 노출시키는 각종 지뢰와 인계철선이다. 군사분계선에서 DMZ 북방한계선까지 직선거리는 2km. 평소 같으면 도보로 20분 거리이지만, 야간에 이것들을 탐색하고 제거하려면 하룻밤에 전진할 수 있는 거리는 고작 수십m에서 수백m까지다.
이동하는 밤 시간에 생명을 지키고 발각되지 않으려면 낮 시간에 개인 비트(은신처)를 파거나 지형지물을 이용해 몸을 은폐하고 죽은 듯이 숨어서 동물적 육감으로 관찰하며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한다. 침투훈련 때 적진을 본뜬 사판(沙板) 모형에서 익힌 적 초소와 지형지물을 육안으로 파악하고, 순찰 시간과 보초 근무 교대 시간을 알아내 장애물을 통과할 루트를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는 DMZ 안의 각종 지뢰들
함정장애물을 우회해 침투하니 지뢰(地雷) 지대 푯말이다. 지뢰는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북한군도 목함지뢰, 플라스틱지뢰, 말뚝지뢰 등을 심어놓고선 '지뢰'라고 안전표식을 해놓는다. 표식이 없으면 DMZ 내 정찰·수색병들은 물론, 심지어 지뢰를 매설하고 뒤돌아가다가 밟는 수도 있다.
목함(木函)지뢰는 구소련이 개발한 대인지뢰다. 판자조각으로 엉성하게 만든 것 같지만 밟으면 발목을 날려 피를 흘려 죽게 만드는 경제적(?)인 대인살상무기다. 담배상자 크기의 직육면체 나무함에 비누 한개 분량의 단단하고 누르스름한 고체폭약인 '뜨로찔'(тротил) 200g을 넣어 뚜껑이 조금 열린 상태로 땅에 묻는다.
압력식과 인력(引力) 해제식, 두 종인데 압력식은 사람이나 짐승이 밟아 15kg 이상 압력이 가해지면 목함 뚜껑이 닫히면서 뇌관의 핀이 빠져나가 폭발한다. 안전핀을 제거하면 1kg의 압력에도 터진다. 인력 해제식은 여러 개의 목함지뢰를 끈으로 연결해 끈을 건드리면 부비트랩처럼 터지는 방식이다. 제작과 매설이 간편한 데다가 침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점 때문에 많이 사용했다.
번개2호 팀원들은 훈련받은 대로 각자 칼빈소총의 멜빵을 늘려 등 뒤로 돌린 뒤에 상의의 왼쪽 호주머니에 넣어둔 탐침을 꺼내 오리걸음으로 걸으며 발 딛을 곳을 45도 각도로 찔러가며 전진한다. 탐침을 찔러보면 목함의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목함지뢰 지대에서는 오리걸음으로 전진하면서 말뚝 대인지뢰(POMZ) 인계철선도 찾아내야 한다. 말뚝지뢰는 목함지뢰 주변에 말뚝을 박아 발목 높이로 인계철선을 연결해 놓고 이 선을 건드리면 핀이 빠지며 뇌관을 쳐 폭발하는 순간 50여개의 파편이 비산하는 살상무기다.
척후조가 목함지뢰를 탐침으로 발견하자 상자 위의 흙을 조심스럽게 쓸어내고 그 위에 식별이 뚜렷한 둥근 야광비닐을 놓아 둔다. 그러면 팀원들은 야광비닐 표식을 피해 오리걸음으로 침투를 이어가고, 마지막으로 후방경계조가 야광비닐을 회수해 흔적을 인멸한다. 일부는 철수∙귀환시 안전을 고려해 뇌관을 제거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척후조가 말뚝지뢰를 발견해 인계철선 위치를 확인해 팀장에게 인수하고 발을 높이 들어 인계철선을 넘는다. 인계철선이 발에 걸리면 핑~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폭발한다. 그러니 핑 소리는 죽음을 의미한다.
자칫하면 자신의 발목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의 목숨까지 잃게 된다는 긴장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온몸이 땀에 젖는다. 칡넝쿨과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는 숲을 헤치고 제2 잠복지점에 도착하니 시계바늘은 새벽 5시(17일)를 가리킨다. 여기서 다시 비트(은신처)를 구축해 잠을 자고 야간에 다시 밤을 새워 제3 잠복지까지 이동해야 한다.
육안으로 지형 관측하기 적당한 위치를 선정해 야전삽을 꺼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땅을 파서 일렬 횡대로 3m 간격으로 은신처를 구축한다. 팀장은 5만분의 1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마지막 제3 잠복지점까지 지형관측을 한다. 이어 비상식량으로 식사를 하고 3명씩 2교대로 수면을 취한다.
하지만 폭파조 홍재곤과 이종승은 '홍천에서 헤어진 번개1호팀도 잠복지에 안착했을까' 하는 상념과 긴장감으로 잠을 못 이룬다. 어느덧 17일 밤 8시가 되자 우유와 쌀가루를 섞어 눌린 비상식량과 육포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해발 600m 고지 중간 하부능선의 제3 잠복지점으로 침투를 개시한다.
중앙정보부와 HID본부에서 인천101지구대에 지령으로 하달된 임무
첫 장애물은 지붕형 철조망이다. 칼빈총과 배낭을 벗어 옆에 두고 누운 채 양손으로 가시철조망을 위로 들어올리면서 양발의 뒤꿈치로 밀면서 통과한다. 가시철조망에는 수많은 깡통이 달려 있어 자칫 총부리에 닿아 건드리면 요란한 딸랑딸랑 소리를 내 북한군 잠복조에 들키고 만다.
18일 새벽 5시경 북방한계선 250m 앞 3부능선의 제3 잠복지점에 도착했다. 쌍안경으로 군관 막사와 지형지물을 관측하니 북방한계선 근처의 세 갈래 길에 '승리'라고 쓴 차량 10대에 북괴군 병력을 싣고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비상식량으로 마지막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둠이 깔리자 척후조를 시작으로 침투를 개시한다. 얼마 안가 북한군 GP와 GP 사이 2개의 잠복호에 3~5명의 잠복조가 경계를 서고 있어 우회하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걷혀 사위가 밝아진다.
모래장애물에 도착했다는 척후조의 완수신호에 따라 시계를 보니 19일 새벽 1시다. 250m 거리를 5시간 걸렸으니 1시간에 50m씩 전진한 셈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래장애물과 실장애물은 인간의 방심(放心)을 노리는 추적장애물이다.
밭고랑이나 모래장애물에 발자국을 남기면 즉시 군견을 풀어 수색∙추적한다. 풀섶에 늘어놓은 실장애물은 발에 걸려 실이 끊긴 방향을 보고 전진한 방향을 탐지해낸다. 모래장애물 지대는 엄폐물이 없기에 산그림자와 나무그늘의 어두운 지형을 이용해 최대한 낮은 자세로 움직여야 한다. 또한 후방경계조는 빗자루를 꺼내 뒷걸음치면서 발자국을 쓸어 흔적을 지운다.
마지막 장애물은 2m 높이의 고압전기 철조망이다. 철조망에 스치는 모든 생명체는 고압전류에 감전돼 숯덩이가 된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주위에는 풀과 나무도 시들시들 말라 죽는다. 배낭에서 1만볼트를 견딜 수 있는 절연고무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고 Y자형 받침대를 세워 그 틈새로 통과한다. 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전류는 흐르지 않지만 북한군이 불시에 전류를 흘려보낼 수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마침내 2km에 걸친 육중봉쇄 장애물 지대를 통과해 북방한계선 2m 높이의 철책 장애물에 도착했다(현재는 북한이 철책선을 군사분계선 쪽으로 전진 설치해 놓았지만 당시는 한국처럼 군사분계선 2km 후방에 설치했다). 척후조가 배낭에서 6인치 소형절단기를 꺼내자 팀장이 제지하면서 철책선이 늘어진 곳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척후조가 경사진 언덕이 비에 쓸려 패인 곳의 철조망 밑 양쪽에 Y자형 받침대를 세워 공간을 확보하자 땅바닥에 판초 우의를 깔고 칼빈소총과 배낭을 벗어 포복으로 통과한다. 낮은 자세로 조금 더 전진하니 전방 100m 지점에 흐릿한 건물이 보인다. 보름 전에 중앙정보부와 한남동 HID본부에서 전통(電通) 지령으로 인천101지구대에 하달된 임무 목표지점(CT234 567)의 군관 막사다.
예하부대의 북파무장공작 8개팀이 동시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적진으로 침투해 북한군 군관 막사 건물을 폭파하고 기습해 적병을 사살하고 장비를 노획해 오라는 지시였다. 번개1호팀은 인제 12사단, 번개2호팀은 양구 21사단 관할 GOP 철책선 통문으로 침투∙귀환하라는 지시였다.
번개1팀(6명)과 번개2팀(6명)은 붉은 황토를 물로 반죽해 번호판에 덧칠한 지엠시(GMC) 차를 타고 밤새 달려가다가 홍천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번개1팀의 김창덕∙김덕재∙장정혜∙전운성과 번개2팀의 홍재곤∙이종승∙채희덕은 서로 부둥켜안고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인천 장수동 소래산의 육중봉쇄 침투훈련장에서 30kg 모래배낭을 메고 1시간에 20km를 주파하는 훈련을 함께 받은 동기들이었다.
"우리 죽지 말고 임무를 성공해 반드시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나자."
군사분계선 푯말을 보니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
척후조와 팀장, 그리고 폭파조는 덤불 속으로 은신해 북한군 동태를 파악한다. 군관 막사는 창문과 굴뚝으로 보니 12가구 정도의 집단 살림집으로 추정된다. 300m 떨어진 곳에 집단농장 마을이 있고, 500m쯤 떨어진 곳에는 대대 병력으로 추정되는 부대가 주둔해 있다.
새벽 4시30분 북한군 매복조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팀장과 척후조는 각각 군관 막사 방향으로 크레모아 지뢰 한 발씩을 설치한다. 이어 폭파조 둘은 군관 막사 목책 앞의 철조망을 헝겊으로 싼 절단기로 끊고 다가가 막사 처마 밑에 구덩이를 파서 황갈색 C-4(군사용 플라스틱 폭약) 6개를 묶은 더미를 묻어놓고 신속하게 안전지대로 대피한다.
이제 임무를 수행할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C-4 콤포지션 폭약만으로도 군관 막사를 날려버릴 수 있다. 미군이 개발해 월남전에서 위력을 떨친 크레모아는 750여발의 쇠구슬 베어링이 폭발과 동시에 총탄으로 변해 부채꼴로 비산하는 공포의 무기이다. 두 곳에 설치한 1500개의 쇠구슬 총알은 전방 120도 각도 안의 적을 살상할 수 있다.
팀장이 완수 신호를 보내자 폭파조는 폭약 격발기의 안전핀을 풀고 손아귀에 힘을 줘 눌렀다. 순간 콤포지션 폭약과 크레모아가 폭발하는 진동과 굉음이 지축을 흔든 가운데 매캐한 화약냄새가 코를 찌른다. 팀장과 납치조는 민첩하게 뛰어들어 막사가 파괴된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일제히 막사 안으로 수류탄을 투척한다.
이어 M2 칼빈소총 연발사격으로 총알을 쏟아붓자 어디선가 다급하게 종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막사에서 300~500m쯤 떨어진 대대병력과 따발총과 AK소총을 든 집단농장 노동청년근위대원들이 몰려온다. 번개2호팀은 군관 막사 폭파 임무를 완수했으므로 팀장의 철수신호에 따라 신속하게 퇴각한다.
척후조가 5만분의 1 지도와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해 퇴로를 선정한다. 이행근 팀장은 "7부 능선에선 북괴군 연대병력을 동원해도 우리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을 시키며 "만약 헤어지게 되면 21사단 남방한계선 GOP철책선 통문 앞에서 만나자"고 소리친다.
안개가 끼어 10m 앞도 안 보이지만 북한군 관측소의 포대경에도 노출이 안 되니 천만다행이다. 번개2호팀 6명은 다시 일렬 종대로 신속하게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 가능한 한 지뢰가 없는 돌멩이를 밟고 가고, 흔적을 인멸할 필요가 없어 철책선 장애물도 절단기로 뚝뚝 끊으며 가니 순식간에 군사분계선이다.
갈 때와 달리 군사분계선 푯말을 돌아올 때 보니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뿐이다. 군사분계선 남방의 교통호로 들어서자 머리 위로 슝슝슝 소리와 함께 박격포탄 세 발이 남방한계선 철책선 방향으로 날아간다. 군관 막사 폭파에 대응한 북한군의 응징보복이다. 철책선 통문에 도착하니 다행히 포탄 피해는 없다. 번개2호팀 6인은 GOP에서 숨을 돌린 후에 인천의 안가로 철수해 번개1호팀이 복귀하기를 기다린다.
서부·중동부 전선에 8개팀 48명 동시침투…왜 1967년인가
이날 휴전선 155마일의 남방한계선에 걸쳐 있는 GOP 통문을 통해 DMZ로 들어간 병력은 번개1∙2호팀만이 아니었다. 인천대의 번개1·2호팀뿐 아니라 속초903지구대, 그리고 서부·중동부 전선 5개 군단에 배속된 201문산대·202춘천대·203양구대·205운천대·206전곡대('4'자의 발음이 죽을 '死'자를 연상시켜 204첩보대는 없음)의 6개팀을 더해 총 8개팀 48명이었다.
선박대를 운용한 101인천대와 903속초대는 원래 해상침투를 위한 북파공작 지구대였고, 5개 군단대는 육상침투를 위한 북파 무장공작대였다. 인천과 속초 지구대원들까지 차출해 서부·중동부 전선에서 동시에 침투하기는 처음이었다.
현재의 남북관계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남북한 공히 특수부대 또는 유격대가 휴전선을 넘나들며 적진에서 폭파·납치·사살하는 '전선공작'을 벌인 것이 비일비재한 일상이었다. 그만큼 남북한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휴전선 155마일에서 가장 뜨거운 열전을 치른 시기였다.
흔히 남북한의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불거진 해를 북한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기습과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그리고 울진·삼척 무장공비(共匪) 침투가 이어진 1968년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무장공비·남파공작원 침투 검거 현황과 대(對)비정규전 작전 결과를 담은 각종 통계는 하나같이 1967년을 가리킨다.
1967년 주요 대남 도발 사례를 보면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1. 19) △중부전선 교전(4. 12)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침(4. 17) △화천군 비무장지대 침투(4. 12) △서부전선 미군막사 폭파사건(4. 22) △강릉 고단지구 무장공비 침투(5. 21) △연평도 근해 어선 포격사건(5. 27) △대성동 미군트럭 기습사건(8. 7) △서부전선 군용트럭 기습사건(8. 10) △판문점 미군 막사 기습사건(8. 28) △경원선 폭파사건(9. 5) △경의선 폭파사건(9. 13) 등으로 북한의 도발이 점점 대담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67년 1월 19일 명태잡이 어선들의 월경을 막기 위해 초계작전을 펼치던 해군 당포함(PCEC-56함, 만재 650톤)이 북한 동해안 포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과 맞먹는 대형 사건이었다. 천안함 폭침으로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실종 6명)했는데, 당포함 피격 때도 승조원 79명 중 39명(장교 2, 사병 37명)이 전사했다.
북한이 이처럼 대담한 도발을 감행한 배경은 베트남전(1965-1975)의 확전과 국제화에서 찾을 수 있다. 주월 미군의 경우 66년말에 39만명을 돌파해 한국전쟁 당시 주한미군 최고병력을 초과했고, 67년말에는 48만명을 상회했다. 즉 한반도에서 도발을 해도 미국이 동시에 2개의 전쟁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지하조직을 강화해 거점을 확보하고 무장공비를 남파시켜 내부 혼란을 야기해 허점이 노출되면 무장봉기에 의한 베트콩식 통일을 이룬다는 대남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대비정규전사2'(국방부 군사편찬위, 1998년)의 대간첩작전 연도별 작전결과를 보더라도, 연도별 침투(사살·검거·자수·도주) 인원은 △1961년 115명 △1962년 104명 △1963년 57명 △1964년 96명 △1965년 142명 △1966년 210명 △1967년 694명 △1968년 601명 △1969년 429명 △1970년 245명 등으로 1967년에 정점을 찍었다.
북파공작 침투 인원과 전사자도 그에 비례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에 따르면, 연인원 32만5천명이 참전한 베트남전(1964. 9~1973. 3)의 국군 전사자는 4601명이다. 하지만 국군 정보사가 2002년 9월 국회에 보고한 북파공작원 현황에 따르면, 국군이 북파 무장공작을 벌인 기간(1951~1972년)의 북파 요원 1만1273명 중 희생자는 7987명이다.
베트남전 참전자 전사율이 1.41%인데 비해 북파공작 침투요원의 희생율은 무려 70.9%나 된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 생존율을 따져야 할 정도다. 베트남전에서는 100명 중 1.4명이 전사했지만, 북파공작원은 10명을 보내면 7명이 죽거나 체포되고 3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이 가운데 태반은 10대 소년병이었다.
적진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소년병들
번개2호 폭파조 소년병 홍재곤∙이종승은 인천에서 함께 물색돼 훈련받은 번개1호팀 동료들이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나, 귀환자는 척후조 신장환뿐이었다. 최강형 팀장(육군 대위)과 폭파조 김창덕∙장정혜, 전후방 경계조 김덕재∙전운성 등 5명이 적진에서 교전 중 전사했다. 홍재곤과 함께 인천에서 물색돼 속초903지구대에서 침투한 동기생 강교춘∙김용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서부∙중동부 전선에 동시침투한 8개 북파 공작팀에서 전사한 7명 중 최강형 팀장을 제외한 6명이 16살에 첩보대에 물색돼 안가에서 훈련받고 17살에 적진에 침투한 소년병이었다. 이는 16살에 첩보대에 물색돼 음지에서 3년 동안 13회 북파무장공작을 마치고 양성화돼 30년 동안 정보사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원사로 전역한 홍재곤씨의 증언과 당시 HID공작담당관 김원한 대령(예)의 사실확인서, 그리고 정보사의 기록 등으로 확인된다(이와 관련된 상세 기록은 다음호에 공개한다).
지난 2000년 10월 당시 김성호 의원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1950년대 HID교육대 1, 2, 3기생 명단과 생년월일, 공작형태 등을 기록한 '종결공작원 명부'를 공개해 음지의 북파공작원 이슈를 처음 공식화했다. 이 명부에 따르면 1∙2∙3기 교육생 366명 중 20대가 다수(40%)인 가운데 14살짜리를 포함해 10대 비율은 27.3%였다. 전시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적지 않은 비율이다.
그런데 이번 UPI뉴스 취재를 통해 첩보대가 HID에서 AIU로 바뀌고 훈련이 체계화된 1960년대에도 군 당국이 생존율이 30%에 불과한 북파무장공작의 '소모품'으로 10대 소년병을 모집해 침투시켰음이 처음 드러났다. 유엔의 아동권리협약 제1조는 '아동은 18세 미만의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년병 물색과 징집은 일제 군부의 위계에 의한 한국인 소녀 위안부 모집과 유사한 국가 범죄이다. 현재의 인권 기준에서는 물론, 당시의 법체계에서도 불법 행위이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처음으로 제정·시행한 아동복리법(법률 제912호)에서 '아동은 18세미만의 자를 말한다'(제2조)고 돼 있다. 또한 '아동을 학대한 자는 30만환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에 처한다'고 돼 있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와 군은 징병제에 따른 정규군은 20세(만19세) 이상이지만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북파공작 대원은 연령제한을 두지 않았다. 65년부터 시작된 월남 전투부대 파병과 무장공비 침투에 대한 응징보복 수요가 커진 가운데 나이가 어릴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적은 반면에 통제하기는 쉬워 응징보복의 '소모품'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 아래 1967년 7월 서부중동부 전선에서 동시에 침투한 8개팀 48명 중에서 장교 8명을 제외한 40명의 대부분이 홍씨처럼 '18세 미만의 아동'이었다. 그리고 이 중 6명이 성년이 되지도 못한 채 적진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다음 번에는 첩보대 물색관들은 '어디에서 그 많은 소년들을 북파공작원으로 데려왔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봅니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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