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박형준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들녘의 詩"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0-07-07 13:12:30

박형준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자기 연민에 빠지는 시인의 함정을 경계
슬픔으로 세상과 만나 위로하는 시의 힘
"대상을 오래 바라보면 그 순간이 온다"

밤새 엎드려 종이에 몇 자 끄적이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는데/ 밤하늘에 구멍이 난 듯 글자들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령 엄마는 왜 내 꿈에 한 번도 안 나와 같은,/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달, 별, 바람, 나무, 고향 같은/ 닳고 닳은 그리움이/ 구멍이 난 백지 아래로 떨어져 간다/ 밤하늘에는 그 말들을 위한 등대가 있을까/ 내 안에 쓸쓸하게 살다 간 말들을 받쳐줄/ 부드러운 손이 아직 있을까('은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하늘을 둘러친 검은 막에 뚫린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빛이라고, 시인은 중동의 어느 소설에서 읽었다고 했다. 시인의 꿈속에서는 밤하늘의 그 구멍으로 '닳고 닳은 그리움'의 언어들이 떨어진다. 달, 별, 바람, 나무, 고향, 그리고 어머니... 시인 안에서 살다 떨어져내리는 그 쓸쓸한 말들을 받쳐줄 부드러운 손이나, 정처를 알려줄 하늘 등대라도 있다면 좋겠다고, 시인은 쓴다.

▲ 고향의 배롱나무 곁에 선 박형준 시인. 그는 "고향의 중심인 부모님이 모두 떠나신 뒤 내 시가 기댈 곳이 사라져 새 시집을 내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형준(54) 시인이 새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비)을 펴냈다. '불탄 집' 이후 7년 만이고 내년 등단 30년을 앞둔 7번째 시집이다. 이전 시집들을 낼 때보다 간격이 길어졌다. 정신적 의지처이자 시의 본향이었던 부친과 모친이 모두 작고한 뒤 혼돈과 탐색의 시간을 거쳐 나온 시집이다. 그는 직전 시집 '불탄 집'은 어머니를, 그 이전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아버지에 기대어 쓴 시집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골 부모님과 떨어져 도시 변두리로 올라와 살다보니 자꾸 고향 생각이 나고, 그 중심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던 거죠. 그 분들이 저에게는 큰 힘을 준 존재들이었는데 이제 지상에 계시지 않고 상징적으로만 남은 상태를 견디느라 힘들었습니다. 이제 직접 노래할 대상이 저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에 뭔가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거죠."

 

박형준이 그동안 노래해온 고향의 서정이 이번 시집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비중이 줄어들면서 시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깃들고 그 결과물들이 반영된 것이 눈에 띈다. 그가 시집 첫 페이지에 내세운 '달나라의 돌'은 시에 대한, 혹은 시작법에 대한 탁월한 은유로 읽힌다.

 

아라비아에 달나라의 돌이 있다/ 그 돌 속에 하얀 점이 있어/ 달이 커지면 점이 커지고/ 달이 줄어들면 점이 줄어든다// 사물에게도 잠자는 말이 있다/ 하얀 점이 커지고 작아지고 한다/ 그 말을 건드리는 마술이 어디에/ 분명히 있을 텐데/ 사물마다 숨어 있는 달을/ 꺼낼 수 있을 텐데('달나라의 돌')

 

그는 자꾸 대상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물에서 자신이 발견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 순간이 오면 사물이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고, 그런 때가 되면 시가 써지면서 많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사물을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에서도 보는 습관은 어쩌면 시야가 툭 트여 있던 고향의 들판에서 배운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가 태어나고 열두 살 무렵까지 자란 곳은 정읍군 정우 들녘이다.

▲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정우'(淨雨) 들녘에 선 박형준 시인. 그는 "들녘에서 성장한 어린시절 덕분에 멀리 그리고 가까이서 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인도 카나우지 지방에서는/ 미티 아타르라는 이름으로/ 비 향기를 담아 향수를 만든다/ 사람들에게 비가 오기 직전의 고향 땅의 풋풋한 흙내음을/ 사실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흙 향수/ 내 고향은 정우(淨雨)인데,/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지평(地平) 마을이다/ 생땅을 갈아엎은 듯한/ 비에서 풍기는 흙내음,/ 비 향기 진동하는 지평선,/ 그 진동을 담은 시를/ 단 한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비의 향기') 

 

맑은 비, 정우(淨雨)가 뛰어다니는 들녘에서 비가 두들기는 생땅의 흙내음을 닮은 시를 쓰는 게 시인의 소원이라고 했다. 그 비 향기가 진동하는 시는 어느 경지일까.

 

"초여름 푸릇푸릇 뻗어 올라가 햇볕과 만나 금방 열매를 맺을 거 같은 느낌을 주는, 이런 상태를 언어로 표현한다면 가장 좋은 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살면서 마주치는 기쁨이나 슬픔, 그런 한 장면을 솔직히 언어가 온전하게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상태에 가 닿으려는 과정에서 상상과 영상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시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나 자연이 가지고 있는 힘에 최대한 근접하려는 자세가 자신이 시를 쓰는 태도라고 했다. 시인보다 항상 자연이나 사물이 위에 있다는 생각이다. 시적 대상인 동물이나 사물의 마음이 시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길 바란다. 그는 오래 전 사보 인터뷰로 생계를 보탤 때 만난 어느 북 장인의 이야기로 자신의 시론을 보충했다. 그 장인은 "북은 마음"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곧 북"이라고 했다. 그는 "북쟁이가 북에 빠지면 북을 만들 수가 없는 법"이라고도 했다. 박형준은 마찬가지로 "시를 업으로 삼으려는 시쟁이가 자신의 언어에 빠지면 시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면서 "사자의 울음 한 번에 여우의 두개골이 빠개지듯이, 나는 내 시가 나 자신의 연민의 산물임을 깨달았다"고 '어느 북 장인과의 인터뷰'에 썼다.

한강으로 이어지는 집 주변 물가를 주로 밤에 산책하면서 얻은 상념들도 이번 시집에 반영돼 있다. 물가의 오리 한 쌍, 밤의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 산책로에 나왔다가 길을 잃은 토끼들이 시인의 눈에 밟힌다. 이런 산책자의 명상도 시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지향점으로 이번 시집의 중요한 지점이긴 하지만, 역시 그가 그리움과 고향을 여전히 이야기할 때 읽는 이의 가슴은 더 젖어든다. 

 

한가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붐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겨울 저녁의 전철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 잠깐 생각이 안 나는 사이// 황혼은 향수(鄕愁)의 향수로/ 몸에 스미는지/ 저기/ 전철 출입문에 얼굴을 대고/ 한 여자도 울고 있다// 우는 동안만/ 모든 것을 잊지 않겠다는 듯/ 출입문 유리에 흐르는/ 눈물 자국에/ 황혼이 입김처럼 서려 있다// 나와 거리가 멀지 않은/ 저 짧은 황혼에/ 나도 잊지 못한/ 어떤 숨결이 창에 이마를 대고/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전철의 유리문에 비친 짧은 겨울 황혼')

 

황혼이 내릴 무렵 전철 출입문에 얼굴을 대고 울고 있는 한 여자를 시인은 보았다. 평상시에는 꾹꾹 눌러 참고 현실을 견디었지만 우는 동안만은 그리움에 무너지는 자신을 허락하는 듯한 그 여자. 출입문 유리에 흐르는 눈물자국에 노을이 반사돼 붉다. 숨결이 서려 흐려진 그 유리에 이마를 대고 우는 여자에게서 시인은 자신의 그리움을 본다. 슬픔을 매개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시의 중요한 위로 기능이라고 박형준은 믿는 편이다. 그는 불을 켜놓고 나오곤 하던 반지하 집을 떠올리며 이렇게 슬픔에 불을 밝힌다.

 

능금나무나 살구나무가 반지하 창문을/ 가리던 집,/ 능금나무는/ 살구나무는/ 산들바람에/ 얼마나 많은 나뭇잎과 꽃잎을 가졌는지/ 반지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떨어지기만 했지/ 슬픔도 환할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없는데 환한/ 저녁나절의 반지하집은 말해주었지// 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 아직도 나는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린다('저녁나절')

 

▲ 이즈음은 주로 밤에 집 주변 물길을 산책하며 새로운 시의 행로를 탐색한다는 박형준 시인. [창비 제공]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이나 연민을 다른 이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잖아요? 그런데 시를 쓰면 자신의 슬픔이나 연민을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만나게 함으로써 그 슬픔이 환해질 수 있고, 이 세상과도 조금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게 되는 거죠. 슬픔으로 만나는 거죠."


슬픔이 환하다는 건, 슬픔을 극복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슬픔을 넘어서는 위로와 정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일 터이다. 박형준은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슬퍼하는 상처가 있어야/ 위로의 노래도 사람에게로 내려올/ 통로를 알겠지'라고, 세상 모든 것들의 한계를 상징하는 '테두리'의 시학도 펼친다. 이번 시집에는 등대가 있는 꿈속 밤하늘을 유영하며, 슬픔을 밝히는 언어들이 모여 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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