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조부모님 영혼이라도 찾아오시라 행당동 평생 못 떠나"

장기현

jkh@kpinews.kr | 2020-06-22 10:41:33

민간 풀뿌리 통일운동 AOK 한국 상임대표 이기묘 씨
"6·25 때 민간인 학살서 살아남은 어머니도 행당동 지켜"
남북으로 헤어진 가족들…빨갱이 몰릴까 "입 닫고 살아"
"통일 당사자는 남과 북…민간 사회·문화 교류 중요"

"북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이 행당동에 살고 있다는 걸 아세요. 딴 데 가면 못 찾으실 것 같아서…그래서 행당동을 떠나지 못해요. 물론 북에 계신 조부모님은 돌아가셨겠지만 영혼이라도 자식 곁으로 찾아오시라고…그래서 태어나서 65년 동안 행당동을 벗어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곳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가족이 겪은 6·25 한국전쟁의 아픔을 담담히 전해주고 있는 이기묘 씨. [문재원 기자]

6·25 한국전쟁 발발 70년. 이기묘(64) 씨에게 전쟁의 아픔은 진행형이다. 이 씨는 한국전쟁 이후 태어나 직접 전쟁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부모들이 겪은 수난과 고통은 그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앨범 속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언제나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그 어딘가에 있었다. 휴전선으로 남북이 갈리는 바람에 졸지에 북에 남게 된 할머니, 할아버지가 언젠가는 찾아올 것으로 믿었기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 이기묘 AOK한국 상임대표가 11일 서울 종로구에서 <UPI뉴스>와 인터뷰 중 할머니, 어머니가 사용하던 시루를 보여주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기묘 씨의 조부모는 6·25 당시 이남 지역이었던 경기도 개풍군(현재 이북 지역)에 계셨고, 아버지는 서울 행당동에 살고 있었다. 같이 있던 큰아버지는 "금방 갔다 올게. 꼼짝 말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부모님을 뵈러 떠났고, 그 이후로는 남북이 갈려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외톨이가 됐다.

이 씨의 어머니는 전쟁 발발과 함께 국군으로 징집된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혼자 행당동 집을 지켰다. 아버지는 일제 말에 징집돼 훈련을 받다 해방이 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는데 5년 만에 또다시 국군에 들어간 것이다. 어머니는 서울에 남아 처음엔 인민군, 서울수복 이후 국군, 1·4 후퇴 때 중공군, 또 미군이 들어오는 과정을 홀로 겪어내야 했다. 어머니는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 부역자'로 지목당해 죽음 직전까지 갔다.

국군과 함께 완장을 찬 사내들은 행당초등학교 앞 우물로 주민들을 불러내 총을 들이대며, "인민군을 도운 사람을 아는 대로 지목해라. 지목한 사람은 살려주겠다"고 했다. 결국 살기 위해 서로를 지목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 이 씨 어머니도 지목당했다. 다행히 남편이 군대에 있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지목된 사람들은 당시 행당동에 있던 두 동산에 나뉘어 끌려가 총살당했어요. 실제로 부역자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지목만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발생했어요. 민간인 학살이 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분명히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직접 겪었고, 죽다 살았잖아요."

▲ 이기묘 AOK한국 상임대표가 11일 서울 종로구에서 <UPI뉴스>와 인터뷰 중 가족 사진 앨범을 보여주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깊숙이 남았다. 남북 분단은 이기묘 씨 가족에게 생이별을 안겼다. 이어진 이승만·박정희 정부에서도 이북에 있는 가족과 만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재갈을 문 것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감추는 삶을 살아야했다"고 표현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할머니 얘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가르쳤어요. 누가 알면 큰일 난다고…찾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이후 이산가족 신청도 하지 않았고. 만나도 문제, 못 만나도 문제니까. 특히 아버지는 하염없이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이후 공무원도, 은행원도 될 수 없던 이 씨의 아버지는 전차 운전으로 생계를 책임졌다. 왕십리에서 출발해 마포까지 다니던 전차가 1968년 운행을 중단하면서 실직한 후에는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했다. 생계는 오롯이 어머니 몫이 됐고,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5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고생 많으셨죠. 살림은 물론이고 생계까지 챙겨야 했으니까…아버지는 고향에 못 가는 대신에 향우회, 종친회를 다니며 허한 마음을 달랬어요. 이런 아버지와 종종 다투는 일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묵묵히 집을 지켰어요."

이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이었다. 특히 김영삼 정부에서 김일성 주석 사망 후 남북의 적대 모드가 격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젠 (가족상봉은)틀린 것 같아"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 씨는 "시대에 대한 슬픔, 나라에 대한 분노 때문이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목사인 자식(이 씨의 동생)의 권유에도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시부모님이 북에서 교회를 다니진 않을 텐데 나 혼자 천당 가서 못 만나면 어떡하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어서라도 만나길 희망하며 교회를 다니지 않으신 거다.

▲ 이기묘 AOK한국 상임대표가 11일 서울 종로구에서 <UPI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기묘 씨는 현재 AOK(Action One Korea) 한국 상임대표를 맡아 평화통일을 위한 풀뿌리 시민운동을 이끌고 있다. 이 씨의 통일운동은 6·25 관련 가족사와 함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공무원연금공단을 다니던 이 씨는 1987년 노동조합 결성과 함께 노조위원장을 맡게 됐다. 그때 당시 노무현 의원, 권영길 기자, 백 소장 등과 인연이 닿았다. 특히 백 소장과의 만남을 이 씨는 "내가 통일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라고 언급했다.

"1989년, 백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웠죠. 선생님이 주도하신 '장산곶매 산악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선생님과 함께 산에 올라 강연을 들었고 내려와선 음주가무를 즐기기도 했어요. 아직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데 제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이 씨는 퇴직 후 본격적으로 민간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기왕이면 내가 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평화통일의 당사자는 '남과 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정부의 정치·경제적 접근 뿐만 아니라 민간의 사회·문화적 교류가 중요하다는 게 이 씨의 생각이다.

"남북 분단의 책임이 있는 미국에 통일문제 해결을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선행돼야 해요. 남북정상의 합의 내용 잘 지켜지는 건 물론이고, 민간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에 한 발짝 가까이 갈 수 있어요."

이 씨는 최근 악화된 남북관계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다며 북한을 자극하는 전단(삐라) 살포는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정부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에 휘둘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라며 "김여정의 발언 전에 남북 사이에 지켜야 할 룰이라는 게 있고, 이런 경우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의 통일 문제에 적극 관여해, 옳은 판단을 통해 곧은 방향으로 가게끔 역량이 되는 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 씨는 앞으로도 남은 생을 통일운동을 위해 바칠 계획이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는 그날까지.

KPI뉴스 / 장기현 기자 jkh@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