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20세기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0-06-12 14:18:28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 받은
예술가 심시선 여사가 살아낸 20세기의 삶
제삿날 하와이에 모인 자손들의 추억과 분투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만약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 쉽지 않을 해피엔딩을 말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나혜석(1896~1948)은 도쿄 유학을 거쳐 파리까지 다녀오며 연애와 이혼도 불사했지만, 당대의 사회적 비난과 조소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경제적 어려움과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거리의 행려병자로 죽어갔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로 살았던 김명순(1896~ )은 여성해방을 추구하며 여성 주인공의 내면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남겼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 도쿄 아오야마정신병원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 정세랑(36)이 펴낸 신작 장편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는 가혹했던 시대에 비극으로 생을 마무리한 선구적 여성들이 끝까지 살아 해피엔딩으로 삶을 마무리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는 맥락에서 태동됐다. 작가의 희망은 이 소설에서 심시선이라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에 투영됐다. 이 인물은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으며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녀의 자손들은 술회한다.
전쟁 중에 심시선은 일찌감치 육촌 오빠 부부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했지만, 다른 가족들은 일본에서 유학했던 둘째 심시철이 공산주의자 간첩이라고 이웃이 주장해 사흘에 걸쳐 가족이 끌려가 총살당했다. 홀로 살아남은 시선은 마지막 '사진 신부'로 하와이로 가서 빨래 일을 하다 독일의 세계적인 천재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의 눈에 띄어 뒤셀도르프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마티아스는 가학적 학대자였는데 그의 공격으로부터 도와준 말레이시아계 혼혈 요제프 리와 결혼,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다. 이후 첫 남편 리가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독일로 돌아간 후 광고쟁이 홍낙환과 재혼하지만, 두 번째 남편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심시선은 이들과의 결혼생활에서 두 번째 남편이 데려온 딸을 포함해 3녀 1남을 슬하에 두었다.
시선은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제사 같은 건 지내지 말라고 당부했고, 자녀들은 그 약속을 지키다가 그녀의 십주기를 맞아 장녀 명혜가 딱 한 번, 어머니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하와이에 자손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자고 제안해 실천에 옮긴다.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지 않을 것이며, 각자 기일 저녁까지 하와이 여행을 하며 기뻤던 순간을 수집해 제사상에 올리는 조건이다.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다는 것이다.
명혜, 명은, 명준, 경아가 각각 낳은 아이들 화수, 지수, 우윤, 규림, 해림의 다양한 사연들이 펼쳐지면서 이들이 하와이에서 각자 어떤 기쁨을 누리며 어떤 희망을 담아 제사상에 올리게 되는지 풀어간다. 이와 함께 심시선이 생전에 남긴 글이나 각종 강연회에서 했던 말들, 방송 자료들을 조금씩 각 장 서두에 배치해 그녀의 생각과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이다. 이를테면 서두에 배치한 여성단체 다과회 녹취록의 한 대목은 독자들이 이 인물에 급격히 흡인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질문자가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에 대해 묻자 심시선은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라고 거침없이 답한다. 이어 질문자가 그런 조건이야 '너무 베이직 아니냐'고 되묻자 "베이직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면서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족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로든 아무데도 갖다 못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라고 답한다. 그녀는 "남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라면서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답변해 좌중을 웃음과 웅성거림 속에 파묻는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작가로서 다양하게 써낸 글로, 심시선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이런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만든 추억들을 반추하며 자손들은 각자 하와이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기쁨의 순간들을 찾아 나선다. 명혜의 큰딸 화수는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데, 이는 할머니의 불행을 대를 이어 반복하는 셈이다. 큰 틀에서 보면 제도적인 폭력 탓이기도 하지만, 가까운 원인은 둘 다 비틀린 남성들의 폭력성 때문이다. 납품가를 깎으려 드는 대기업에 반항했다가 망하게 된 중소기업 사장이 애꿎게도 경영지원부 여사원들에게 염산을 뿌린 뒤 자살했는데, 이때 화수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그녀는 정작 가해자인 자살자가 피해자인 양 동정을 받는 상황이 너무 억울하다. 할머니 심시선은 마티아스 마우어가 그녀를 폭력적으로 대하다 요제프 리 도움으로 그의 곁을 떠나 임신까지 하자, 자살하면서 유서에 그녀를 사랑했노라고 써서 전 유럽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만들어 죽으면서까지 그녀를 학대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심시선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가까이 두는 사람의 기준을 분명히 설정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이 기준에 부합된 이들 중 하나가 '타고난 광고쟁이' 홍낙환이다. 첫 남편 요제프 리가 독일로 가버린 뒤 두 번째 남편이 된 그는 삶의 모든 것을 '재미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홍낙환은 처음 만난 날부터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내내 그녀를 재밌어 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이로울 만한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홍보하고 포장하고 팔아주었다고 술회한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수배자들을 집 가까이에 은신처를 따로 만들어 숨겨주기도 했다. 시종 흥미로운 수다로 이야기를 재기발랄하게 이어가는 정세랑은 '재미'를 중요한 자산으로 삼는 홍낙환을 닮았다.
마지막 날 하와이 제사상에 오른 자손들의 제수는 어떤 것들일까. 사위 태호는 하와이에서만 먹을 수 있는 뜨거운 도넛을 자전거로 배달해오고, 화수는 이동식 조리대를 갖춘 트럭을 동원해 팬케이크를 준비한다. 새를 좋아하는 손녀는 하와이 새들의 깃털을 모은 컬렉션을, 어린시절 큰 병을 앓았던 또다른 손녀는 서핑에 도전해 성공한 뒤 바다 거품을 병에 담아 올린다. 다른 손녀 하나는 무지개 사진을, 다이빙에 도전한 손자는 할머니 이름을 붙인 산호 다섯 개에 관한 종이증서를, 전처의 딸이지만 시선이 아꼈던 딸 경아는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했던 커피를 각각 올린다. 이들 '시선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가지들은 모두 현실에서 각자 분투하는 사연들을 안고 있지만, "우리집은 모계사회니까 내가 제일 어른"이라고 큰소리치는 큰딸 명혜는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등진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재기발랄한 젊은 이야기꾼 정세랑의 소설을 따라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이번 장편에는 '재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거대 폭력과 뿌리 깊은 젠더 폭력에 대한 날선 비판이 담겨 있다. 심시선은 외아들 명준과 산책할 때, 작은 암컷 개가 겁먹을까봐 이십 미터 앞에서부터 납작 엎드려 기다리는 수컷 개에 감탄하면서 그런 동네 개 같은 남자가 되라고 일찍이 당부했다.
정세랑은 "엄마의 형제들 중 한두 사람은 언제나 북미나 중남미에 있어서 하와이에서라도 만나 제사를 지내야 한다"던 농담 하나와, "6.25전쟁 중 국군의 손에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의 비극" 하나를 가족에게서 빌려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그는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면서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밝혔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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