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난민 삶 이해하려 구멍 난 고무보트에 올랐다"

김혜란

khr@kpinews.kr | 2020-06-10 17:18:22

유럽·이라크·콩고 전역 난민의 삶에 천착한 사진작가 전해리
2015년 유럽 난민 이슈 불거져 그의 사진에 전세계가 주목
이듬해 '이라크 모술 탈환' 취재…"난민 이전의 삶 알기위해"
17~23일 ‹UPI뉴스›와 난민사진전…"무지 거두는 계기 되길"

2015년 9월 2일 참담하고 애달픈 사진 한장이 전 세계를 울렸다. 인류는 그날 터키 해변에 웅크린 채 숨져있는 세 살배기 에일란 쿠르디를 가슴 아프게 응시했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탈출하려던 쿠르드계 난민 가족의 비극이었다. 쿠르디의 '죄 없는 죽음'은 전 세계에 난민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고, 난민에 대한 인식을 바꿔놨다.

쿠르디의 죽음이 알려진 그날 사진작가 전해리는 터키에서 그리스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난민들의 유럽행 탈출 행렬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난민을 자처하며 난민 속으로 들어갔다. "시리아인과 결혼한 탈북민"으로 위장했다. 배라고 해봤자 뗏목에 가까운 조립식 고무보트. 게다가 물이 샜다. 신발로 퍼내야 했다. 그럼에도 요금은 1200달러에 달했다.

당시 전 세계 작가·언론인 중 '난민보트'에 오른 이는 전해리 작가가 유일했다. 쿠르디의 죽음에 놀란 세상은 난민의 삶에 깊숙이 들어간 사진 작가를 주목했다. 그가 찍은 사진과 영상은 전세계로 널리 퍼졌다. 신인임에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이 큰 무대에 전격 데뷔했다.

이런 성과를 그저 '초심자의 행운'으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전 작가는 "우연히 시기가 잘 맞았다"고 했지만 그의 진정한 무기는 진심을 전하는 '눈'이다. 요르단서 만난 한 난민은 생면부지의 그에게 '독일에 있는 약혼자에게 반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는 그렇게 에게해 위를 떠도는 난민보트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이라크 모술 탈환 작전의 복판에서 몸으로 난민의 삶을 겪었다. 실로 목숨을 건 취재였다. "IS(이슬람국가) 매복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있었다"고 전 작가는 말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난민에 천착하는 이유가 뭘까. 전 작가는 ‹UPI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무지'로 인해 편견이 생긴다"면서 "맥락과 이야기가 담긴 사진으로 타자였던 난민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 전해리 사진작가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중구 유엔난민기구 사무실에서 ‹UPI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전 작가의 투신엔 '소명'과 '우연'이 얽혀 있다. 2009년 워싱턴 코코런 예술대학(지금은 조지워싱턴 대학에 통합) 졸업 당시 시리아 내전이 국제적 이슈였다. "미국의 피 끓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은 현장이었지만, 동시에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 2013년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네덜란드에서 중동을 오가는 일이 잦아졌고, 우연한 만남 속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리아 현장'이 그의 삶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전 작가는 오는 17~23일 ‹UPI뉴스›, 유엔난민기구(UNHCR)와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세계난민 사진전'을 연다. 2015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리스를 거쳐 독일까지 이동하는 '시리아 난민 탈출'의 생생한 기록이 공개된다.

—어떻게 난민을 찍게 됐나

"2014년 '케어'라는 NGO(비정부기구)와 함께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활동하던 중 자원봉사자인 시리아 난민 오므란을 만났다. 그로부터 난민의 실상을 듣게 됐다. 오므란은 덤덤히 말하긴 했지만 그는 갑작스러운 총격에 어머니를 잃고, 누나는 충격으로 배 속의 아이를 잃게 됐다. 이때부터 유럽행에 오르는 난민들을 취재하고, 사진으로 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이집트에서 만나게 된 친구 무하마드가 제안했다. '우리와 함께 난민 보트에 직접 타보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무하마드는 '더 이상 우리 국민을 죽이기 싫다'며 탈영한 시리아 정부군 출신으로, 난민과 브로커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난관이 많았을 텐데

"무하마드와 함께 난민보트에 타기로 한 날, 그는 갑자기 위험하다는 이유로 '못 간다'며 막판에 일을 뒤집었다. 맥이 빠지는 소식이었다. 전날까지도 연락했고, 또 몇 개월을 준비했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스폰서십을 받으려고 해도, 안전 등 책임소지의 이유로 나를 받아주는 언론사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로이터통신이 '일단 찍고 와서 보자'라고 제안한 거다. 취재 비용은 모두 사비로 충당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어떻게 보트를 탔나

"이것 또한 우연이었다. 건너 알게 된 시리아인 루나와 바젤이 터키에서 그리스 레스보스로 향하는 보트에 탄다고 하더라. 사실 이들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나를 끼워줄 이유가 없다. 루나는 저널리스트 출신이라 내 취재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이들은 나를 탈북자로 소개하며 배에 태웠고, 나를 포함해 총 5명이 바닷길에 오르게 됐다."

—그들 모두 난민 인정을 받았나

"그렇다. 두 명은 독일에, 나머지는 네덜란드에서 난민 인정을 받았다. 다만 이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난민정책 때문에 기약 없는 캠프(난민 인정을 받기 전 수용시설) 생활을 해야 했다. 이들은 1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
사실 고향을 떠난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유럽에 도착했다고 해도 끝난 게 아니다. 루나 같은 경우 고향에 두고 온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 난민 인정을 받아야 자녀를 초청할 수 있는데, 언제 비자를 받을지 모르니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했다. 뒤늦게나 알았는데 루나의 딸은 자살 시도까지 했다더라. 바젤 역시 갑자기 공황장애를 겪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나

"언론사의 캠프 출입이 막혀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2016년 이라크에 가게 됐다. 대체 이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길래 집을 떠나야 했는지 궁금했다. 당시는 이라크 쿠르드 민병대가 급진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로부터 이라크 모술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 때였다."

—말 그대로 전쟁터에 뛰어들었는데

"전쟁을 직접 경험한 건 처음이었다. IS 매복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은 뻔한 순간도 있었다. 난민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구나'라고. 이라크에 이어 방글라데시에 건너가 로힝야 난민을 취재했다. '난민' 하면, 시리아로 대표되는데 그 외 다른 지역을 다루며 난민의 외연을 확장한 계기가 됐다."

—배를 타기 이전으로, 역순으로 간 셈인가

"맞다. 난민 이전의 삶, 난민이 되는 과정, 난민으로 정착하는 과정 등 그들이 겪는 다양한 삶의 국면을 다루고 싶었다."

—코로나19로 발이 묶였다고

"지난해 유럽을 떠나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지금은 알다시피 어디를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여러모로 코로나가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난민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공감할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작년에 취재로 간 콩고민주공화국은 에볼라가 창궐한 상황이기도 했고, (난민 등이)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정상의 삶을 찾기 위한 노력은 이전에도 많이 목도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UPI뉴스›와 사진전을 하게 되지 않았나."

▲ 사진가 전해리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중구 유엔난민기구 사무실에서 ‹UPI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번 사진전은 어떤 의미인가

"한창 제주 예멘 난민 사태가 극심했을 때, 몇몇 예멘인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언론에서는 연일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다루는데 실제 제주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들과 직접 살을 맞댔던 도민들은 우호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단다. 사진전도 마찬가지다. '무지'로 인해 편견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맥락과 이야기가 담긴 사진으로 타자였던 난민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제주 예멘 사태는 2018년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입도하면서 시작됐다. 말레이시아-제주 직항이 생긴 영향이었다. 그해 예멘인 515명이 난민 인정 신청을 했다. 이에 '제주 예멘 난민 반대' 국민청원이 올라오는 등 '반난민 정서'가 퍼졌다. 입도한 예멘인 대부분이 무슬림이라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쿠르디에 동정하다가도 '우리 일'이 되니 달라졌다

"그리스에 15년간 난민을 위해 봉사한 노르웨이 출신 신부가 있었다. 그가 그러더라. '(2015년 쿠르디의 죽음으로) 이런 관심은 처음이다'라고. 난민의 물결은 항상 있었다. 집을 떠나는 이들은 쿠르디 이전에도, 제주 예멘인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독 예멘인 500명에 대해 그렇게까지 반응했어야 했나 아쉬운 마음이 든다. 물론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대규모 이주, 이민 역사가 없어 낯설었던 것이다.
그 노르웨이 신부는 '내가 저 보트를 타고 왔을 때를 상상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육지에 도착했을 때 그 사람들이 날 어떻게 해줬으면 좋을지 생각해본다'라고 하더라. 난민 수용은 그리 거창한 일이 될 필요가 없다. '수고했다'라며 따뜻한 차를 건네는 마음이면 되지 않을까."

—다음 행보는


"나의 그간 여정이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정해 놓은 길은 따로 없다.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발굴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에 간 것도 순전히 '일'로 방문한 것이었다.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이 아니라서 그곳에서 작업을 이어나갈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무퀘게를 만나게 되었고 다른 콩고인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이런 인연으로 콩고에 대해 더 취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앞으로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 곁에서, 더 나은 '휴먼비잉(human-being)'이 되고 싶을 뿐이다."

전 작가는 201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드니 무퀘게 인터뷰로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한 NGO의 초대로 콩고민주공화국에 머물던 중 성사된 취재였다. 현재 진행 중인 콩고 분쟁은 사실상 '잊힌 이야기'였는데 무퀘게의 수상으로 관심을 끌게 됐다.

◆전해리 작가는…

1978년 미국 필라델피아 태생인 한국계 미국인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국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2007년 파키스탄 지진피해지역을 시작으로 지난 13년간 아이티, 시리아, 이라크, 미얀마(로힝야족), 콩고민주공화국 등 분쟁지역을 취재했다. 2009년 코코런 예술대학을 졸업했고, 2013년 네덜란드로 이주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구호·인권 NGO와 함께 중동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전쟁과 난민의 참상을 기록했다. 2015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그리스를 거쳐 독일까지 이동하는 난민들의 탈출 행렬에 동참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쿼츠, NBC 등 미국 주요 매체와 한겨레, JTBC에 기고했다.
KPI뉴스 / 김혜란·강혜영 기자 kh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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