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에 누더기 된 인생, 보상은 고작 7천만원"
이원영
lwy@kpinews.kr | 2020-05-27 10:21:09
'국보법' 위반자 낙인…폭력에 신체장애 얻고 가족 파괴
日·美 전전하다 30년 만에 '무죄'…보상금 7600만원
국가폭력으로 한 인생과 그 가족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다면 국가는 어떻게 응당한 보상을 해야 할까. 무법한 폭력으로 한 인생을 만신창이로 만든 '야만의 시대'에 저질러진 폭력 피해를 어찌 돈으로 다 보상 받을 수 있을까.
정정자(76) 씨는 '국가보안법' 실행자들의 국가폭력으로 무참히 짓밟힌 삶을 보상받기 위해 일생을 보내야했다. 그 결과 30년 만인 2014년 재심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고, 국가를 상대로 보상소송을 제기했다.
길고 긴 투쟁 끝에 빛이 드나 싶었다. 지난해 9월 법원은 정 씨 본인과 모친, 4명의 남동생 등이 겪은 평생의 고통에 대한 보상금으로 7600만 원을 판결했다. 애초 제기했던 5억5000만 원에 턱없이 못 미치는 액수였다. 정 씨는 분하고 억울해 이 보상금을 아직 수령하지 않고 있다.
"나와 내 가족의 일생을 이렇게 망쳐놓고 국가는 이런 푼돈을 주고 역사적인 죄업을 털겠다는 것인가요? 이래 놓고도 우리가 인권을 이야기하고, 민주사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정정자 씨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살기가 등등했던 1981년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불법 구금된 채 1주일 동안 모진 구타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한쪽 눈이 실명됐고, 한쪽 귀의 청력을 심하게 잃었다. 폭행 과정에서 자궁 부위가 파열돼 임신도 못 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대법원까지 갔지만 국가보안법 집행유예 판결로 '빨갱이' 낙인이 찍혔고 그 후로는 아무 데도 취직할 수 없었다.
애먼 형제들도 일터에서 다 쫓겨났다. 정 씨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나가 평생 피부관리사와 때밀이로 연명했다. 남자 동생들도 건축업, 미8군 등에서 일하다 '빨갱이 가족'으로 찍혀 쫓겨났고 두 명은 미국 괌을 거쳐 알래스카 등에서 어려운 노후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누나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형제들 인생이 풍비박산 났다'며 지금까지 연락을 끊고 산다. '야만의 시절'에 무심결에 내뱉은 말 한마디의 대가는 이렇게 혹독했다.
정 씨는 1944년 전남 함평군 대동면에서 농사꾼 부모의 4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 16살 때 가족을 따라 서울로 와 관광호텔 종업원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다음해인 1981년 2월,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광신교통에서 안내양 기숙사 사감 겸 교양주임을 맡았다.
그의 나이 37살이던 그 해 5월 어느 날, 15명 정도의 안내양을 모아놓고 좌담회를 갖던 중 안내양들이 5.18에 대해 물었다. 왜 젊은이들이 죽고 잡혀가느냐, 김대중은 왜 감옥에 갔느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정 씨는 '정치를 좀 알면 광주사태를 이해하게 된다' '순화교육(삼청교육대)은 사회불량배를 잡아다 교육시키는 것'이란 취지의 설명을 했다. 언론에서 본 대로 얘기했다. 그리고 김대중 씨가 외신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자유도 빵도 없는데 북한은 자유는 없다 해도 빵이 보호된다'고 말한 것이 죄목이 되었다는 언론 내용을 들려줬다.
'입 한번 잘못 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는 시절이었다. 누군가 정 씨의 말을 윗선에 알렸고 곧바로 해고됐다. 두 달 후 경찰이 들이닥쳤고, 1주일간 성남중부경찰서에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너 같은 X은 빨갱이 새끼 못 낳게 만들어주마'라며 구둣발로 음부를 수차례 걷어차 불임의 몸을 만들어버렸다.
신문에 났던 내용을 전한 것뿐이라고 자술서를 썼지만 담당 형사들은 수차례 찢어버리며 '빨갱이 사상교육은 어디서 받았냐' '조총련은 언제 만났냐'며 쓰라는 대로 쓰라며 머리채를 벽에 처박았다.
이런 폭력을 거치며 기소장은 '이북은 콩 한쪽도 공평히 나눠 먹는다'고 말한 것으로 바뀌었고, '북한공산집단의 사회제도를 은연중 찬양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확정 판결을 받게 됐다.
서슬 퍼런 시절 '국가보안법 유죄'는 곧 '빨갱이' '간첩'과 동의어였다. 6개월 철창생활을 마치고 나왔지만 세상은 가혹했다. 아는 사람들은 쉬쉬하며 피했다. 구타로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되고 귀는 난청이 되어 장애 등급을 받았다.
먹고살기 위해 열 군데도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국보법 전과자'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1970년대 중후반 역시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두 차례 고초를 겪었던 백승평(79) 씨와 1983년에 가정을 이뤄 떡볶이 장사 등 이력서가 필요 없는 일을 전전했다.
한국서 살기 힘들어 1990년 일본으로 향했고, 일본에서도 민단 쪽의 훼방을 받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5년 만에 미국 LA로 가 지금까지 때밀이, 마사지 등을 하며 힘든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남편은 서대문구에서 기초수급자로 근근이 살고 있다.
"두 번이나 자살하려 약을 먹었습니다. 지금도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억울함을 풀려고 평생을 보냈는데 돌아온 건 장례비용에나 쓸 푼돈이더군요. 판결에서 그 액수를 보상한다는 내용을 듣고는 인생이 두 번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누더기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인생과 가족에게 국가는 형식적 보상만으로 매듭지어버린 것이다. 정 씨는 아직도 "억울해서 죽고 싶다"고 말한다.
법적으로 다시 국가의 합당한 보상을 물을 방법은 없을까.
"국가 폭력에 대한 보상금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피해를 당한 것에 비하면 국가의 책임의식은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국보법이라는 괴물에 희생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한을 품고 살아야 했던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민주 정권에서는 국가 폭력에 희생 당한 이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 체계를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 장경욱 변호사의 말이다. 그리고 현 사법체계 상 정정자 씨 부부와 가족에 대한 재보상 방법은 없다는 쓸쓸한 답변을 들려줬다.
코로나19로 높아진 국격에 많은 국민들이 "이게 나라다"라고 뿌듯해하는 한편에선 "이게 나라냐"라고 울부짖는 목소리가 아프게 들려온다.
KPI뉴스 / 이원영 기자 lw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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