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가해자 복귀 소식은 지뢰 밟은 듯한 공포심 불러"
이민재
lmj@kpinews.kr | 2019-12-26 16:08:02
"변신하는 가해자들 네트워크는 견고"
"가해자 이름만 들어도 헉! 트라우마"
공연 예술계를 중심으로 '미투'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한국연극계의 대표적 연출가인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지난 7월 징역 7년을 확정받았다. 조증윤 극단 '번작이' 대표는 지난해 3월 구속됐다.
그러나 이처럼 사건이 마무리된 건 소수에 불과하다. 별다른 해명, 사과,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극단 '목화'의 대표로 유명한 오태석 연출가는 미투 가해자로 지목받았으나 별다른 해명 없이 모습을 감춘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는 논란이 잠잠해지자 되레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연극 연출가로 이름이 높은 김석만 전 한예종 교수는 지난 24~25일 서울가톨릭연극협회(서가연) 주관으로 열린 연극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연출을 맡았다.
이에 연극계 일각에서는 "피해자들은 언제 어디서 가해자와 부딪힐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의 활동 재개를 바라보는 연극 현장 작업자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 배우이자 연출가인 박영희 씨와 공연 기획자 최샘이 씨를 ⟨UPI뉴스⟩가 만났다. 두 사람은 연극계 성폭력 근절을 위해 지난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연극인 공동체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구성원이다.
ㅡ연극계 미투 가해자의 활동 재개가 종종 보인다. 연극계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나?
(박영희) "이윤택이나 오태석 등은 향후 재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런 케이스는 극히 소수다. 대부분은 업계에서 잠시 사라졌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시 연극계에 직간접적으로 다시 발을 들이고 있다. 피해자들은 '언제 어디서 가해자와 부딪힐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김석만 연출만 해도 대학로가 위치한 혜화에서 이번 명동성당 성탄극 연출을 맡으며 명동에서 활동했다. 혜화역에서 명동역은 불과 4정거장 떨어져 있다."
ㅡ미투 논란의 규모는 컸다. 어떻게 미투로 지목된 이들이 다시 연극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나?
(박영희) "그들의 네트워크는 견고하다. 세간의 이목을 피해 원래 쓰던 이름 대신 예명, 가명, 세례명 등을 사용하거나 지역을 옮겨 활동하면 가능한 일이다. 김석만 전 한예종 교수는 명동성당 성탄극에서 본명 대신 김 프란치스코(세례명)라고 표기했다. 자신도 부끄러우니까 본명을 숨긴 거라고 본다. 김소희 전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우여진'으로 이름을 바꿔서 부산·김해 일대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는 '이윤택 조력자'라는 타이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ㅡ서가연 측은 김석만 연출의 활동에 대해 '연극으로 봉사를 하려는 취지'라고 밝혔다.
(박영희) "그분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보속, 즉 봉사의 의미로 재능을 활용한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해자가 자신의 위계를 유지하던 수단이었던 직책이나 재능을 통한 보속행위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보속이라는 관점으로만 볼 수 없는 문제다. 교회가 가해자에 대한 보속, 용서라는 교리와 더불어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치유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ㅡ사과하거나 형을 마친 뒤의 활동 재개는 '개인의 자유'라는 시각도 있다.
(박영희) "이윤택, 오태석이 다시 돌아와도 전처럼 발붙일 수 없는 환경이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난 미투 운동을 통해 당장 급한 '큰불'은 잡았을지 몰라도 공연예술계의 환경과 문화가 여전히 취약하다. 바람이 훅 불면 불은 다시 붙을 수 있다. 아직 잔불도 잡히지 않은 상황인데 불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오는 상황이니 피해자들은 속이 탄다. '개인의 자유'로만 용인하기는 어렵다.
물론 연극을 아예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지금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각기 다른 대처에 비유하고 싶다. 독일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는 방안을 강구해왔으나, 일본은 그러한 노력이 미비했다. 다르지 않다고 본다. 연극 사회 안에서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가 수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재발을 막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미비했다."
ㅡ대안이 될 만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있을까?
(박영희) "'몇 년 동안 어떤 방식으로 자숙해'라고 정해 말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모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없다. 모두 이 상황을 처음 겪고 있다. 정답을 찾아가는 여정 한가운데 있는 셈이다.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ㅡ미투 이후 연극계 조직 문화 등은 어떻게 바뀌었나?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보나?
(최샘이) "혼란하고 복잡한 상태다. 우선 가이드의 부재 상태에서는 안전에 대한 확신이 안 생긴다. 여전히 불안한 셈이다. 서로가 서로를 검열하고 단죄하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선배들은 "야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혹시 누군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런 분위기가 무섭고 불편하다. 연극은 공동작업이며 소통은 필수인데 안타깝다."
ㅡ연극계에서 유독 위계에 의한 폭력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박영희) "회사 다니는 사람이 위계에 의한 폭력을 당하면 HR 담당 부서에 진정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노동부에도 진정할 수 있다. 공식적인 노동자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그게 없다. 대부분 프리랜서 지위이다 보니 법과 제도적 차원에서 노동자의 지위를 보호받기 힘들다."
ㅡ피해자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에 대해 전해줄 수 있나?
(박영희) "어떤 분들은 최근까지도 위계에 의한 폭력을 당했다. 많은 피해 생존자들이 5, 10년 전 겪은 일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여전히 가해자 이름만 들어도 그냥 숨이 막 쉬어지지 않아 일상생활이 어려운 분들도 있다. 가해자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은 피해 생존자에게 마치 눈을 감고 지뢰밭을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미투 이후 새로운 일상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다가도 가해자들의 복귀 소식을 접하면 마치 지뢰를 밟는 것 같은 공포와 마주하는 것이다."
KPI뉴스 / 이민재 기자 lmj@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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