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새로운 과거를 향해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12-26 16:12:43

세 번째 소설집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 펴낸 부희령
'체념'과 '포기'의 힘으로 자유를 확보해 담아낸 7편 수록
현대사, 다문화, 글 쓰는 자세, 욕망의 결까지 두루 포괄
"다른 존재들을 끌어들여 자아의 범위를 넓히려 애쓴다"

'이제껏 너는 내가 아니었으나, 저 문을 통과해서 포고령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너는 다시 내가 될 것이다. 너는 다시 내가 되고 우리가 될 수도 있겠지. 불안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네가 열린 문을 통과한다. 새롭게 되풀이될 과거를 향해.' 

 

▲ 오랜 침묵 끝에 두 번째 소설집을 펴내더니 2년 만에 폭풍 집필의 결실을 내놓은 부희령. 그는 "지금은 소설 쓰는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총독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곧 포고령을 선포할 거라는 예고를 한 그날 밤, '너'의 심장은 갑자기 차가워져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었고 몸은 덜덜 떨렸다. 너는 대통령 암살과 군사 쿠데타가 이어지던 시절에도 캠퍼스의 시위대와는 거리를 둔 채, 도서관에서 '유토'와 함께 '마의 산' 같은 관념적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자오'의 부추김으로 부정선거 감시단 일원으로 얼떨결에 구청에 들어갔지만, 진압이 임박하자 바리케이트 틈으로 빠져나온 적도 있다. '너'는 그 당시의 학살과 혼돈을 떠올리면서 경악한다.

그 시절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제국에 통합된 반도의 총독이 다시 포고령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너는 포고령 선포를 반대하는 비밀 집회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간다. 이 소식을 전해준 이는 당시 학생운동 선두에 섰지만 지금은 본국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반도의 사업본부장으로 일하는 '자오'였다. 일관되게 자본주의적 삶에 매진했던 '유토'가 세계적인 석학으로 금의환향해 강연하는 유리빌딩 48층 그랜드볼룸에 들르려던 '너'는 발길을 돌려 오래전 빠져나왔던 좁은 틈으로 들어간다. '새롭게 되풀이될 과거'를 향해.

부희령 세 번째 소설집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강) 표제작 이야기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 부적응자이지만, 자오나 유토는 '적합한' 선택을 했다. 한때 연인이었을지 모를 '유토'의 일관된 첨단 자본주의적 지향도, 빠른 판단으로 달라진 시대에 적응하는 '자오'의 능력도 너는 갖추지 못했다. 너는 48층에서 자오와 유토가 나란히 서서 너를 '낮은 곳에서 움직이는 발열체'로만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발열체들은 서로의 온기를 향해 골목골목으로 모여들 것이다.'

오랜 침묵을 깨고 11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내더니, 불과 2년 만에 폭풍 집필의 결실을 담아낸 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너와 나를 통합하고 우리로 나아가는, '다른 사람과 식물과 동물 같은 많은 존재를 내면으로 끌어들여' 자아의 범위를 넓히려 애쓴 단편들이 수록됐다. 연대와 온기로 확장되는 세계가 현대사와 다문화, 살아야 하는 당위, 마음의 경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형식 속에 녹아 있다.

-지난번 소설집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그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들은 다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학상이나 유명한 작가 같은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체념이 굉장히 힘이 세다는 걸 깨달았다. 체념하고 포기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고 나니 제가 바깥으로 더 시선이 향하는 것 같고 소설 쓰는데 부담이 없었다. 지금은 소설을 쓸 때 굉장히 즐겁다."

-작품 전반에서 내면을 매우 정직하고 치열하게 드러낸다.
"소설을 쓰는 목적이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비슷하고 보편적인 생각도 있겠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에서 나온 감정이나 사고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서로 나누는 게 소설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소설을 읽거나 쓰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내밀한 걸 보여줘야 서로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자리를 만들 것 아닌가. 만날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자기 것인 양 말하면 새롭게 보여주는 건 하나도 없게 된다. 소설이나 문학의 가치가 사실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표현이나 언어도 나름의 기능이 있지만,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감춰둔 걸 보여주는 것이 문학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전망 좋은 방'의 철저한 현실주의자 민수는 자살 시도 끝에 살아남아 정신과 병동에서 세상의 슬픔과 기쁨의 무게를 깨달은 후배 주연을 만나, 그녀가 이제 타인과 연결되어 진정한 생존의 의지를 얻었음을 확신한다. 주연은 말한다.

'선배. 내가 병원 창밖에서 본 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우리가 보는 현실은 극장에서 보는 영화 같은 거야. 진짜 현실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몸에 켜켜이 쌓여 있고 그게 마음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투영되는 거야. 사람들은 다른 몸으로 살고 있지만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남들이 느끼는 모든 기쁨과 슬픔을 다 아는 거야. 우리는 다 알고 있어. 모르는 척할 뿐이지, 모르지 않아.'

-눈에 보이는 현실이야말로 영화 같은 것?
"몽상가라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좀 현실적으로 살아라,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거꾸로 생각한다. 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쓰는 사람들 보면서 저런 행위들이야말로 몽상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돈이나 화려한 삶 같은 것들이 그렇게 행복한 건지 잘 못 느끼겠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세뇌를 당해서 저렇게 기를 써서 돈을 벌고, 사람들 머리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 생각해보고 싶었다."

'마중'은 생의 마지막 어둠에 직면한, 치매 걸린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다. 이북 출신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6.25전쟁을 겪으며 천신만고 끝에 귀향했다가 월남한 인물로 그 시대의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다. 딸이라고 자식 취급도 제대로 안 하던 그이에 맞서는 '양경'의 대사는 치열하고 생생하다. 아버지 세대의 간난신고와 신산한 삶, 가부장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이에 대한 미움과 안타까움이 현대사를 건너온 군상의 벽화 한 귀퉁이로 그려진다.

제주 4·3의 폭력적 기억에 붙들려 평생을 남의 이름을 빌려 살았던 '봄잠'의 강 여사는 자신을 두 번 살려낸 할망처럼 자신이 진정한 '생존자'임을 깨달으며 마침내 자신의 말(제주 사투리)을 되찾는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첫사랑을 포기했던 '찬투'의 중국 동포 간병인 향숙은 중년의 고된 돌봄 노동자다. 그녀는 성공한 옛 남자를 만나러 나섰다가 캄보디아 이주노동자의 침대 곁으로 돌아가는, '발열체'들의 온기를 선택한다.

'출간기념 파티'의 소설가는 어린시절 굿판 깃발에 그려진 그림을 보지 못해 화가의 길로 나서게 됐다는 강 화백의 말에서 예술의 운명을 읽는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궁극적인 소설의 답을 알지 못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아닌지 돌아본다. 굿판에서 제상에 쌀을 올려 소설 쓰게 해달라고 비는 대신 '누구한테 신명을 청하고 빌 것인가. 내 것을 돌려달라고 할 때는 나에게 빌어야겠지'라고 다짐하는 작가의 태도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 부희령은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깊은 꿈속일지도 모른다"면서 "슬픔과 기쁨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천지신명 대신 '나'에게 빌겠다는, 거짓 없이 미뤄두지 않고 도망치지 않겠다는 소설가의 다짐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좀 자유롭게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느낌이다. 가상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옛 연인…'을 두고 실제로 일어난 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의미 없다.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리 리얼하게 써도 허구 아닌가. 이제는 그 경계를 허물어가면서 쓸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에 기반을 두되 상상력의 경계를 짓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이제야 비로소 그런 상태에 왔다는 느낌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형식이나 주제에서도 좀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에 배치한 '마음의 경로'는 등단 무렵인 1990년대 후반에 썼지만 당시 유행했던 여성작가들의 욕망을 추종한 것 같아 방치해두었던 작품을 이번에 재발견한 경우이고, '출간기념 파티'는 본격적으로 자아를 확장하면서 소설 쓰기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다짐하는 길목의 단편이다. 부희령 소설의 시발점과 변곡점인 셈이다.

'찬투'의 향숙은 첫사랑 용선을 만나러 가다가 불현듯 뒤돌아서며 "그래, 과거는 흘러간 거지. 그 시절의 용선도 지금은 없는 거지"라고 되뇐다. 부희령은 "우리는 언제나 그 순간에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건데, 상황이 바뀌니까 후회를 하는 것"이라고 향숙의 편을 들었다.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은 부질없지만 '새로운 과거'를 다짐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

'소설은 소설가 혼자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마음, 사회적 조건, 자연 환경 등등이 모두 협조한다. 부끄러움 끝에 늘 벅찬 감사의 마음이 남는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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