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고대의 바람 속에서 전하는 오늘의 슬픔 …앤 카슨, 2026 노벨문학상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6-10-09 06:03:09

캐나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번역가, 고전학자 앤 카슨
고전 전통과 대화하며 동시대 문학 새로운 형식 만들어
누구보다 깊은 개인적 상실, 작품으로 승화시켜온 여정
그리스 고전의 파편과 현대인 상흔이 마주치는 교차로
아이슬란드에서 전한 첫 말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고대 그리스 고전의 틈에서 21세기 인간의 상흔을 엿본 캐나다 시인 앤 카슨(76)을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했다. 한림원은 8일(현지시간)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번역가, 고전학자인 카슨을 선정하며 "고전 전통과 유희적으로 대화하며 동시대 문학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이유로 들었다. 

 

▲ 2026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 시인 앤 카슨. [위키미디어 커먼즈(CC BY-SA 4.0)]

 

아이슬란드에서 수상 소식을 들은 카슨은 잉그리드 칼베리 한림원 사무총장과의 짧은 통화에서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listening to the wind)"고 답했다. 칼베리 총장은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며 "그는 몹시 놀랐지만 무척 기뻐했고, 목소리에서 그 기쁨이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카슨은 202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고 공개한 바 있다. 캐나다 작가의 수상은 2013년 앨리스 먼로 이후 13년 만이다.

1950년 토론토에서 은행원의 딸로 태어난 카슨은 고교 시절 라틴어 교사가 점심시간마다 따로 가르쳐준 고대 그리스어로 사포를 읽으며 고전의 세계에 들어섰다. 토론토대에서 고전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프린스턴·맥길·미시간·뉴욕대 등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그는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책에 실리는 저자 소개는 대개 '캐나다에서 태어나 생업으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친다'는 한 문장이 전부다. 작품을 자전적으로 읽는 시선도 경계해 왔다. 자신의 삶 역시 세상의 수많은 사실 가운데 하나로 '민주적으로' 다룰 뿐이라는 것인데, 그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깊이 개인적 상실에 닿아 있다.

첫 책 '에로스, 달콤씁쓸한'(1986)은 그 상실을 사유하는 문법의 출발점이다. 사포가 에로스를 가리켜 지어낸 말 '글루쿠피크론'(달콤씁쓸한)을 실마리로, 카슨은 욕망이 충족이 아니라 결핍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원하는 자와 원하는 대상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거리, '나, 당신, 그리고 둘 사이의 간격'이라는 삼각형의 틈새에서 문학적 언어가 태어난다는 통찰이다. 그는 "우리가 읽고 쓰는 단어는 우리가 진정으로 뜻하는 바를 온전히 말하지 못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우리가 욕망하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에로스는 바로 그 틈에 존재한다"고 썼다.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1998)은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 곧 붉은 괴물 게리온을 죽이고 소떼를 빼앗는 신화를 죽임당한 쪽의 목소리로 다시 쓴 '시로 된 소설'이다. 고대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헤라클레스 신화 파편을 전복한 이 작품은 붉은 날개를 달고 태어난 괴물 게리온의 소외와 성장을 현대적 퀴어 서사와 감각적 시어로 직조해내며, 고전 신화가 어떻게 동시대의 가장 아픈 상처를 위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앨리스 먼로는 몇 년 동안 이토록 자신을 흔든 글은 없었다고 했고, 카슨은 게리온의 괴물성에 끌린 이유를 "우리 모두 항상 자신이 괴물이라고 느끼니까요"라고 말했다. 

 

'남편의 아름다움'(2001)은 거짓말을 일삼는 아름다운 남편과의 결혼이 무너지는 과정을 29편의 '탱고'로 엮은 '허구의 에세이'다. 카슨은 자코멜리라는 성을 쓰던 첫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8년 만인 1980년에 끝냈다. 이 결혼과 파경은 '남편의 아름다움'과 초기작 '물의 종류들'의 원천으로 거론된다. 이혼할 때 남편이 자신의 노트를 가져갔다가 나중에 돌려줬다는 일화는 카슨이 인터뷰에서 직접 확인했다. 책 속 아내가 겪는 일과 똑같다. 이 책으로 카슨은 여성 최초로 영국 T.S. 엘리엇상을 받았다.

 

▲ 국내에는 9종이 출간된 상태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플로트' '빨강의 자서전' '남편의 아름다움' '레드 닥>' '플레인워터'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에로스, 달콤씁쓸한' '녹스', '짧은 이야기들' (가운데).

  

카슨의 작품에는 가족을 잃어가는 시간이 겹겹이 새겨져 있다. 알츠하이머를 앓은 아버지 로버트의 쇠락은 대표 장시 「유리 에세이」와 「아버지의 낡은 파란 카디건」 등에 담겼다. 어머니 마거릿은 카슨이 시집 '한가한 시간의 남자들'(Men in the Off Hours)을 쓰던 중 세상을 떠났다. 카슨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와 원고에서 줄을 그어 지운 구절들을 모아 어머니의 묘비명을 짓고, 그것으로 시집을 닫았다. '빨강의 자서전'의 속편 '레드 닥>'(2013)도 어머니를 위한 두 번째 애가로 읽힌다.

 

가장 오래 비어 있던 자리는 네 살 위 오빠 마이클이었다. 1978년 마약 거래 혐의로 체포된 그는 보석으로 풀려난 뒤 캐나다를 떠나 행방을 감췄다. 2000년 마침내 연락이 닿아 그가 살던 코펜하겐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오빠는 재회 전에 숨졌다. 한림원이 특히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은 '녹스'(2010)는 오빠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겨울부터 카슨이 손으로 만들어 펴낸 오빠의 묘비명이다.

형제를 잃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101번 시를 한 단어씩 사전 항목처럼 풀어낸 왼쪽 면과, 오빠의 편지·사진·콜라주를 붙인 오른쪽 면이 맞물린다. 한 장의 긴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접어 상자에 담은 책이다. 책을 펼치는 일은 끝없이 이어지는 유물 상자와 묘비석을 손으로 더듬는 의례가 된다. 카슨은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애도는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누군가 죽은 뒤 남는 추한 혼돈으로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번역 역시 창작과 분리되지 않는다. 사포의 단편을 옮긴 '만약 겨울이 아니라면'(If Not, Winter)에서 그는 파피루스가 훼손된 자리를 대괄호와 여백으로 남겨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독자가 감각하게 했다. 그리스 비극 10편을 옮겼고, 한림원은 이 번역들을 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으로 평가했다. 그는 비극에 대해 이렇게 썼다. "왜 비극이 존재하는가? 당신이 분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왜 당신은 분노로 가득 차 있는가? 당신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2016년 첫 번역 이후 10년 동안 출판사 세 곳에서 아홉 권이 나왔을 만큼 꾸준히 소개돼 왔다. 한겨레출판은 '빨강의 자서전' '남편의 아름다움' '레드 닥>'을, 1인 출판사 봄날의책은 '녹스'와 '플로트'를, 난다는 '짧은 이야기들'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에로스, 달콤씁쓸한' '플레인워터'를 각각 펴냈다. 창작과 사유의 본질에 관한 카슨의 생각.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 그 생각의 끝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이 당신을 벌할 것입니다. _ '리터러리 허브(LitHub)' 인터뷰 

 

▲ 앤 카슨은 "언어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닫혔던 상처를 다시 찢어 벌리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즈(CC BY-SA 4.0)]

 

■앤 카슨 (Anne Carson) 연보

* 1950년: 6월 21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출생.
* 1974~1981년: 토론토 대학교 세인트 마이클스 칼리지에서 고전문헌학 전공으로 학사(1974), 석사(1975), 박사(1981) 학위 취득.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에서 고대 그리스 운율학 연구.
* 1980년대~현재: 맥길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등 유수 대학에서 고전문학 및 비교문학 강의.
* 1986년: 박사학위 논문을 개작한 첫 비평 에세이집 '에로스, 달콤씁쓸한' 출간.
* 1992년: 첫 시집 '짧은 이야기들' 출간.
* 1995년: 시, 산문, 여행기를 결합한 복합 장르집 '플레인워터' 및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발표.
* 1996년: 미국 래넌 문학상 수상.
* 1997년: 푸시카트상 수상.
* 1998년: 전위적 운문 소설 '빨강의 자서전' 출간. 전미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 및 뉴욕타임스 '올해의 주목할 책' 선정. 구겐하임 펠로우십 수혜.
* 2000년: 맥아더 펠로우십 수상.
* 2001년: '남편의 아름다움' 출간. 여성 최초로 영국 T. S. 엘리엇 상 수상. '한가한 시간의 남자들'로 제1회 그리핀 시문학상 수상.
* 2002년: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사포의 단편들을 번역하고 훼손된 공백을 대괄호([])로 살려낸 '만약 겨울이 아니라면: 사포의 단편들(If Not, Winter: Fragments of Sappho)' 출간.
* 2005년: 캐나다 훈장 수훈.
* 2010년: 세상을 떠난 오빠를 기리는 아코디언 병풍 구조의 상자형 오브제 북 '녹스(Nox)' 발표. '오레스테이아(An Oresteia)' 번역으로 미국 PEN 번역 시문학상 수상.
* 2013년: '빨강의 자서전' 후속작 성격의 '레드 닥>' 발표.
* 2014년: 그리핀 시문학상 두 번째 수상.
* 2016년: 22편의 분철 소책자를 투명 케이스에 담아 비선형적 읽기를 유도한 '플로트(Float)' 출간.
* 2022년: 아이슬란드 시민권 취득.
* 2024년: 산문시집 '롱 노르마(Wrong Norma)' 출간. 파킨슨병 투병 사실 공개.
* 2025년: '롱 노르마'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 수상.
* 2026년: 10월 8일 노벨문학상 수상.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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