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나보다 먼저 있고 나중에 없어질 할매여"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12-12 16:44:35

600살 팽나무 소재로 장편소설 '할매' 펴낸 황석영
작은 새 한 마리로부터 시작된 순환의 관계와 변화
밀도 높은 문장으로 사람 아닌 것들의 세상도 묘사
"생사는 물론 세상만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것"

'기진맥진한 작은 새의 몸 위에 눈보라가 들씌워졌고 체온이 떨어진 개똥지빠귀는 숨이 끊어졌다. …개똥지빠귀의 뱃속에 팽나무 열매 몇개가 있었다. 열매의 거죽은 새의 시신과 함께 곧 사라졌지만, 딱딱한 굳은 씨앗은 부드러운 모래흙 속으로 들어가 스며드는 물기와 더불어 차츰 땅속으로 묻혔다.' 

 

▲ 5년 만에 새 장편을 펴낸 소설가 황석영. 그는 "이번 소설을 시 쓰듯 썼다"면서 "젊었으면 느끼지 못할 기쁨을 누렸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개똥지빠귀의 분해된 몸이 녹아든 기름진 땅속에서 팽나무 뿌리는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머나먼 북방대륙에서 날아와 반도의 남쪽 서해안에 인연의 씨앗이 되어 팽나무가 생겨난 지 250년쯤 지날 무렵, 사람의 세상은 조선이라는 왕국이었다.

대기근이 찾아와 유민으로 떠돌던 어머니가 장남만은 굶주림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 절집에 맡겼다. 그 아이는 꿈에서 깨어날 각이라 하여 '몽각'이라는 스님으로 자라나고, 서해 갯벌로 스며들어 홀로 팽나무 곁에서 살아가다 어린 팽나무 한 그루 더 키운 뒤 갯벌로 나아가 자신의 몸을 보시하며 스러진다. 분해된 몽각의 몸을 칠게가 먹었고, 다시 북방에서 오가는 암컷 마도요를 축으로 한 도요새 무리가 칠게의 잔해를 먹었다. 먼 길을 날아와 지친 마도요가 태풍을 만나 검은 파도 속으로 내던져져 갯벌에 처박히자, 그 분해된 유기물은 부드러운 모래땅을 비집고 올라온 생합들이 흡수했다.

생합은 다시 군산 하제 마을, 팽나무가 서 있는 그곳 여인들이 캐서 먹는 순환의 관계로 이어졌다. 개똥지빠귀에서 팽나무로, 몽각의 몸이 칠게로, 마도요와 생합으로, 다시 사람으로 전이되는 대순환의 장관이다. 이 과정은 소설가 황석영이 '철도원 3대' 이후 5년 만에 펴낸 신작 장편 '할매'(창비)에 서사시 같은 산문으로 오롯이 담겼다.

이후 팽나무를 축으로 천주교 박해, 동학, 일제 강점기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전개된다. 600년 된 팽나무는 미군 비행장 건설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환경운동가와 정력적인 활동가 신부에 의해 가까스로 보호된다. 몽각이 심은 것으로 설정한 300년 된 '어린' 팽나무는 일본군의 사격 표지판이 된 이래 무참히 베어졌다. 팽나무를 모셨던 무당의 핏줄이자, 우금치 전투에 농악패와 참전해 죽어간 배경순의 후손인 환경운동가 배동수는 하제 갯벌에서 생합을 캐는 여인들을 따라 갯벌 깊숙이 들어갔다가 달밤에 홀로 나오면서 압도적인 생명의 노래를 듣는다.


'동수는 저 혼자 이 너른 갯벌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멈춰 서서 들어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아주 작은 소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이 온통 가득했다. 그는 한참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엔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게 다 무엇이었을까. 헤아릴 수 없는 구멍마다 생명들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합창이었다. 갯벌이 밤에는 거대한 노래밭인 거다. 동수는 그 정적 속의 소리를 방해할까 두려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갯벌의 수많은 생명들은 새만금 방조제로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황석영은 "이 나무를 둘러싼 육백년은 역사가 아니라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며 카르마의 계속되는 전이에 관한 이야기"라면서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던 생각이 군산에 와서 '팽나무'를 만나면서 이제야 성사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생사는 물론 세상만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개벽은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큰 바람일 것"이라고 '작가의 말'에 덧붙였다. 신작 출간에 맞춰 군산에서 상경한 그가 기자들과 만났다.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은?

"코로나 기간에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 못하고 방 안에 앉아서 불경과 시집을 많이 읽었다. 열반경을 읽으면서 죽음이라든가 존재라든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등을 주제로 놓고 생각했고,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의 관계에 대해 하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시절 영등포 분위기와 비슷한 군산에 가서 살려고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미군 부대에 수용된 포구 마을 팽나무 사연을 접했다. 팽나무를 상징화해서 그 터를 지키는 환경 활동가들을 보고, (역사의 현장을 내내 떠돌아 다녔던 운명인데) 그래서 거기 또 내가 찾아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운동가나 평화운동가의 입장에서만 쓴 게 아니라 총체적으로 지구가 겪고 있는 인간의 문명에 대한 시선으로 이 작품을 다루기 위해 역으로 600년 된 팽나무가 태어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소설이 한참 진행될 때까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로서도 사람이 빠진 소설을 쓰는 게 처음이라 굉장히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써 나가는 중에 제가 만들어 놓은 문장에 저도 빠져서 아, 이런 산문을 내가 처음 쓰는 구나 싶은 기쁨과 놀라움을 경험했다. 헤밍웨이가 만년에 '노인과 바다'를 쓰면서 느꼈던 자연과의 교감, 이런 데서 얻은 기쁨들과 상통할 거라고 생각한다. 제가 아마 젊었으면 이런 느낌을 갖지 못했을 것 같다. 그 작은 새들이 천적들에게 당하기도 하고 자연적 조건에서 죽기도 하고,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면서 지나가기도 하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사람이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것들이 너무 호들갑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죽음은 단지 관계의 변화일 뿐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을 영어로 얘기하면 릴레이션십(relation­ship)이 적당할 것 같다. 릴레이션십의 순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도 그런 관계의 변화이다. 다만 사람이 됐든 다른 생물체가 됐든 간에 그것들이 지어낸 행위들이 카르마(업보)가 돼서 이월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월되면서 계속 카르마는 이어지고 관계는 순환되면서 변화해 간다. 이렇게 세상을 봤다. 그래서 할매에 나오는 여러 가지 서사들은 역사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바로 그런 관계의 순환과 카르마의 이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팔순을 넘겨서도 밀도 높은 소설을 써내는 동력은?
"70대 말까지는 멀쩡했는데 80이 넘으면서 기운이 확 떨어졌다. 작년에 해외에 나갔다가 욕실에서 넘어져 왼쪽 발목이 부러졌는데, 한 반 년 다리를 못쓰니 근육이 빠지면서 폭싹 늙었다. 지금 오른쪽 눈이 안 보여서 한쪽 눈을 감고 컴퓨터를 쓰는데 해보니까 쓸 만하다. 다음 작품을 금방 또 쓰고 싶어서 지금 움찔움찔하고 있다. 지금 생각은 두세 편쯤 더 쓸 수 있겠다 싶다. 88세, 미수가 되려면 한 5년 남았는데 그때까지는 써야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소설 쓰기가 너무 힘들면 일기 같은 형식으로도 죽을 때까지 쓰려고 한다."

-작가로서 나이 드는 것이 좋은 점은?
"일종의 '원로병'이라는 게 있다. 원로는 안정되고 완성돼서 근사하게 잘 쓸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위기의 시간이다. 왜냐하면 동어반복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길이 없어 딜레마가 생기는 거다. 그러니까 원로들이 굉장히 불안정하다. 대개는 아주 심플하게는 절필 선언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늙은 작가의 소망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이다. 높은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생에서 가장 새로운 작품을 쓰고 싶다. 진짜 예술가라면 그런 기도를 하는 거다. 저는 일단 그 위기는 넘긴 것 같다. '수인'을 쓰고 나서 그 위기가 있었는데, '철도원 3대'를 쓰면서 서사의 힘을 회복한 느낌이 든다. 그 힘으로 할매를 쓴 것 같다. 할매는 굉장히 힘들게 썼지만 굉장히 기쁘고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 황석영은 "원로가 되면 위기가 찾아온다"면서 "백척간두진일보의 정신으로 동어반복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12·3 사태 1주년을 넘긴 지금,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우리가 분단 체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늘 위협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평화적으로, 멋지고 유니크하게 세계 유례가 없는 변혁을 이루어내고 민주주의를 이어가고 있는 건 대단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중요한 것은, AI 시대 양극화는 더 심해질 거고 일자리도 줄어들 텐데 선의를 가진 정치 권력을 우리가 매번 내놓기 위해서는 결국 민주주의가 문제다. 기본소득 문제라든가 일자리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을 제대로 배분하기 위해서는 선의의 권력을 우리 시민들이 계속해서 창출해 내야 된다. 그런 선택을 해야 된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2개 정부(노무현 문재인)로부터 제안 받은 훈장을 거부하다 이번에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것과 관련해서는 "주변 권유와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 승낙했다"면서 "국가 권력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예술가의 자세를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AALA) 작가들과 함께 군산을 중심으로 'KALA'(Korea with AALA)라는 이름 아래 문학과 예술,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남남협력(South-South Solidarity)을 추진하는 중이라고 밝혔다.'가디언 트리 프라이즈(Guardian Tree Prize)'라는 상을 신설해 문학·미술·영화 그리고 환경평화 부문까지 시상할 예정이며, 내년에는 이집트에 건너가 중단된 로터스 상 복원도 주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몽각'의 작별인사.

'나는 없다. 나무도 풀도 물도 바람도 돌도 모두 나와 같다. 지금 여기에 모두 다 그냥 있다. 서로가 무심하고 편안하다. …나보다 먼저 있고 나중에 없어질 할매여, 이제 내가 먼저 없어지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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