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세월이 흘러도 그치지 않는 오래된 종소리"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12-19 17:07:32
동일방직 노조 탄압 소재로 담은 '시린 청춘 일기'
작가의 노동 체험 바탕으로 그 시절 생생하게 소환
"그때 우리를 움직였던 건 거창한 이념이 아니었다"
'노동문학'이란 이름으로 노동 현장을 다룬 작품들이 각광받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궤를 같이하던 때였다. 이후 노동소설은 동구권이 무너지고 바야흐로 민주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노동'을 말하는 문학은 구시대 유물이 된 듯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소중한 생명이 억울하게 죽어 나간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목소리를 높여도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지는 형국이다.
1978년 2월 21일, 인천 동일방직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똥물 투척 사건'이 일어났다. 중앙정보부와 회사 측 사주를 받은 남성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지키려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리고 무차별 폭행을 가한 이 참혹한 현장이 소설가 양진채의 신작 장편 '언제라도 안아줄게'(강)의 중심이다.
야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 '미은', 괄괄하고 진취적인 성격으로 노조활동에 열심인 '선자', '미스 동일' 선발대회에 나가 인기상을 받는 명랑 소녀 '명숙'이 같은 방에서 기거하며 3교대로 동일방직에서 일한다. 이 하숙집 아들 '태오'는 성당 종 치는 일을 돕고 친구 '경준'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고등학생이다. 이 다섯 남녀가 이 소설을 끌어가거니와, 단지 노조 임원을 뽑는 선거에 참석하려던 것뿐인 명랑소녀 '명숙'의 한 생애가 어떻게 어이없이 무너졌는지 따라가는 서사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고등학교를 마친 뒤 전자회사에 들어가 노동자로 살다가 해고를 겪으면서 노동운동을 했던 양진채의 체험이 1970년대 말 선배 여성노동자들의 서사에 피가 돌게 하고 따스한 체온을 부여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2008)로 문단에 나왔지만, 스스로 노동운동을 그만두었다는 자괴감에 침묵을 지키다가 자신의 청춘이 투영된 그 시절을 이번 소설에 녹여냈다.
-그 시절을 오래 봉인했던 이유는?
"처음으로 저를 드러낸 소설이다. 사실 문학을 시작할 때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조직적으로 정리돼서 나온 게 아니라 스스로 그만둔 노동운동이어서 그때 이야기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계속 덮어두었는데 인천 민주화운동센터에서 그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셨던 분들 자서전 쓰기 등을 진행하면서 단절됐던 선배들을 만나게 되고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격려를 받았다. 우리의 20대는 연애를 하는 것조차 한편으로 죄짓는 것 같은 세월이었다."
"사실 그 점이 이 소설을 쓰려고 할 때 가장 큰 고민이었다. 노동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지나간 이야기일 수 있는데, 노동은 여러 가지로 저에게는 여전히 큰 화두이다. 지금 노동 시장은 이주민 문제부터 시작해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어려운 열악한 상황이다. 우리 20대보다 열악해진 측면도 있고, 격차는 너무 커진 상황인데 다들 노동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삶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시간은 다 합쳐 3년도 안 되는데, 왜 이 시절이 평생 나를 끌고 왔는지 돌아보았다. 그때 풀지 못했던 것들을 풀 수 있을 것 같아서, 노동소설을 쓴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가.
"20대에 청춘을 가로막는 그런 사회적 억압이 없었다면 연애도 하고 놀러도 다니며 살았을 테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삶을 누렸을 수도 있는데 동일방직 여공들은 당장 탈의실이 생기고 점심시간 30분이라도 얻게 되는 환경을 위해 노조 활동을 했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참혹하게 똥물 테러를 당하고 124명이 해고돼 계속 끌려다녔다. 미니스커트 같은 예쁜 치마를 입고 찍은 그들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난다. 책 뒤에 붙인 '시린 청춘의 일기장'이라는 방현석 소설가의 추천사에 눈물이 났다. 노동운동에 관한 소설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사랑 소설이라는 온라인 서점 리뷰도 반가웠다. 동일방직의 싸움이 큰 틀이지만, 여성들끼리의 연대나 사랑의 의미로 읽히면 좋겠다."
소설은 명숙이 뱃속에 품었던 생명에게 건네는 목소리로 시작하고, 마무리도 죽은 생명을 위무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명숙은 그 생명이 스러질 국면에 피가 흐르는 하체를 끌고 병원 대신 태오가 종지기로 있는 성당으로 간다. 그곳에서 죽어가는 뱃속의 생명에 종소리를 들려주기를 원한다. 어린 여공들이 테러를 당하는데 경찰은 수수방관하고, 이른바 '어른들' 어느 누구도 그들을 감싸지 않았던 사태를 두고 분노한 소년들은 '세상 사람들 귀에 다 들릴 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이 분노를 다 알 때까지, 밧줄이 하느님의 음성이라도 되는 듯 붙들고 매달려 더 크게 울리도록' 종을 치고 또 쳤다.
-종소리는 어떤 의미인가.
"소설 속 종소리는 연대의 큰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도 외면했다고 생각하는 그 상황에서 누군가 바깥에서 이 종을 쳐줬으면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그 당시 어린 여공들이 농성 중인 담벼락을 넘어 '누가 우리 딸에게 이런 짓을 했느냐'고 항의해줄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124명의 해고자가 그렇게 떠돌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종을 등장시켰다. 지금도 '전장연'이 아침 휠체어 시위한다고 당장 내가 불편한 것에 불만을 터뜨리고,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를 두고 '시체팔이' 한다는 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높은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이 땅에 내려왔으면 싶었다."
명숙은 신산한 삶을 살다가 치매에 걸려 성당 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50여 년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명숙을 바다에 뿌리기 위해 미은, 선자, 경호와 사제가 된 태오가 선상에서 만나는 대목이 이 소설의 정점이다. 장미꽃잎이 박힌 황토 유골함을 줄에 매달아 바닷속으로 내려보냈다가, 황토가 풀어지면서 유골가루가 해방되면 수면 위로 장미꽃잎이 떠오른다. 이 순간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를 제목으로 삼은 노래가 선상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지난 시절이 반복되어도 '아모르 파티'를 외칠 수 있을까.
"제가 그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몇 군데를 거치면서 해고 싸움을 했던 과정을 후회하지 않는 것처럼, 그분들도 그렇게 살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면 청춘이 좀 달라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지, 결국은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저는 그 선배들처럼 살아오지는 못했지만 누군가는 기억해야 될 삶이었고, 누군가는 기억해야 될 청춘이었다. "
한강이 1980년 광주항쟁을 새로운 플롯으로 접근해 '소년이 온다'로 녹여냈던 것처럼, 1970년대 말 여성 노동운동의 분기점이었던 동일방직 사건 또한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서사로 다가설 수 있는 셈이다. 철 지난 형식의 소설은 있어도, 지금 이곳을 관통하는 소설에 '늦은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양진채는 소설 말미에, 수만 광년 전 꺼졌지만 여전히 빛나는 별을 떠올리며 '누군가의 염원이 모이고 모이면 물리적 시간은 길이를 알 수 없는 시간이 된다'고 스러진 생명을 위무한다. 그의 말.
'우리를 움직였던 건 거창한 이념이 아니었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고, 부당한 것에 고개 숙이고 싶지 않았다. 때로 서툴렀고 좌절했지만 꺾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 마음, 나를 움직였던, 그녀들과 당신을 움직였던 그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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