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서울의 브루클린' 성수동을 가다

UPI뉴스

| 2019-04-22 13:47:58

뚝섬·성수동(2)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는데 뚝섬역에서 내리니 하늘이 맑아졌다. 뚝섬에서 출발해 성수동까지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예정이었다. 8번 출구로 나와 왕십리로로 접어들었다. 왕십리로로 꺾자마자 강바람이 차다. 겨우 두 번째 오는 길인데 어쩐지 익숙하다. 지난번 뚝섬 산책을 하다 추워서 일찍 철수했던 터라 단단히 옷을 껴입고 나섰다. 추워서 산책을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성수동 방향 뚝섬로를 따라 걸었다. 아파트와 낮은 빌딩들. 흔히 '성수동'하면 떠올리는 이색적인 카페나 수제화 가게는 보이지 않는다. 샌딩, 빠우, 베어링, 금형, 금속 같은 간판들이 이곳이 공장지대였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성동상생도시센터와 이마트를 지나 성수이로에서 성수역 방향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성수동의 시작이다. 잘 알려진 '대림창고'는 마지막에 둘러볼 생각이었다. 


▲ 성수동 대림창고 [정병혁 기자]


성수이로7길에서 거위 모형을 발견하고 다가가 보니 맥주를 파는 가게였다. 몇 걸음 옮기자 이번엔 마당 한가운데 나무 위에 오두막이 있다. 신기해서 들어갔다. 카페 '할아버지 공장'은 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탓인지 빈티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실내가 인상적이었다. 오픈한 지 한 달쯤 됐다는 '할아버지 공장'에서 달달한 라떼 한 잔을 마셨다. 마당에 떨어지는 봄 햇살을 바라보고 있으니 노곤해졌다. 

연무장길에 들어서자 '00가죽','00레더'라는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게 앞에 신발, 가방을 내놓고 파는 곳이 몇 군데 눈에 띈다. 성수동에서 가죽 원단 도매를 28년 했다는 가게 주인은 최근에 직접 제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연무장로 뿐만 아니라 성수동 전역에 가죽 원단이나 구두 부속 가게 등이 몰려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하나둘씩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다고 했다.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남자 두 명이 가게 주인에게 신발은 맞춰주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구두를 맞추러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왔다고 했다. 최근 들어 맞춤 구두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그런 고객을 상대하는 수제화 가게도 확장세에 있다고 한다.


구두 한 켤레를 가지는 것이 로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엔 가난하지만 아홉 켤레의 구두를 소유한 사내가 나온다. 결국, 아홉 켤레의 구두를 남기고 사내는 사라지고 말지만, 구두로 상징되는 사내의 자존심은 오래 남는다. 국가 명장에게 구두를 맞출 수 있는 곳이 성수동이다.


연무장길을 따라 건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금형을 뜨거나 금속 가공을 하는 회사 간판이 많다. 간판에 금속, 정밀, 철강, 철형 등의 새겨진 곳이 이런 회사들이다. 자동차 수리 공업사가 밀집되어 있고 간혹 인쇄 공장도 보였다. 


▲ 1970~80년대 지어진 맨션들 [정병혁 기자]


큰길을 벗어나 골목을 몇 번 꺾다가 방향을 잃었다. 낡은 연립주택 옆을 지나고 있었다. '정안맨션'이었다. 골목 안으로 더 들어가니 '정안6차맨션'이 보였다. 다음에 '정안7차맨션'. 한 건설사가 이 일대를 개발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맨션'이라는 말이 고급주택의 상징처럼 쓰이던 때도 있었다. 이렇게 아파트가 많아지기 전에'맨션'은 실제로 고급주택에 속했다. 성수동 골목 구석구석에는 1970~80년대 지어진 맨션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시간 앞에 이제 낡고 퇴락한 모습이지만 성수동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단서였다. 

 
마지막 목표 지점인 '대림창고'로 향하던 중에 '성수연방'을 발견했다. 식당, 서점, 잡화점, 카페 등 여러 가게가 한 건물에 입점해 있는 성수연방은 성수동으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패키지 형태로 모아놓았다. 주제별로 책을 모아놓은 'ARCㆍNㆍBOOK'은 관련된 물건도 살 수 있게 배치되어 있다. '존쿡델리미트'도 흥미로웠다. 성수동에서 성장한 존쿡델리미트에서 운영하는 햄 전문 가게였다. 생햄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고, 제품을 시식할 수도 있고, 필요한 것은 구매도 가능했다. 소시지 만들기 같은 간단한 체험 행사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먹거리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잘 반영한 가게 같았다.


'대림창고'는 갤러리와 카페를 겸하고 있다. 40년 전 정미소로 지어졌던 곳이 한동안 물품 보관창고로 쓰이다가 2011년부터 샤넬, BMW 등의 패션쇼나 행사장으로 쓰이며 유명해졌다. 기존 창고의 외관과 골조를 그대로 사용해서 만든 카페에는 군데군데 설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갤러리에서는 그때그때 다른 전시를 한다고 했다. 천장까지 닿은 몇 그루 나무가 이색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대림창고는 한번 둘러보고 한 시간쯤 앉아 있어도 좋은 공간이다. 성수역으로 향하던 길에 구두매장 두 군데를 더 들렀다. 일종의 상설 할인매장이었다. 산책 중에 봤던 본사 건물 얘길 꺼냈더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이사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 성수동 구두가게 [정병혁 기자]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끝부분엔 사내가 남긴 아홉 켤레 구두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가장 값나가는 세간의 자격으로 장롱 따위가 자리 잡고 있을 꼭 그런 자리에 아홉 켤레나 되는 구두들이 사열하는 병정들 모양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정갈하게 닦인 것이 여섯 켤레, 그리고 먼지를 덮어쓴 게 세 켤레였다." 구두가 가장 값 나가는 세간처럼 대접 받던 시절이 있었다.


강진 소설가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