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제품이 아닌 이미지를 파는 거리…가로수길의 '상상력'
UPI뉴스
| 2019-03-21 13:39:51
가로수길은 오랜만이다. 2년 전, 친구들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핫(hot)한 곳에서 맛있는 걸 먹는 게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한 친구의 주장 때문에 가로수길을 모임 장소로 정했었다. 식당의 음식은 맛있었지만 음악 소리가 커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친구들과 가로수길에 갈 일은 없었다.
신사역 8번 출구로 나와 도산대로 11길로 접어들었다. 도산대로 11길은 일명 ‘세로수길’이다. 가로수길 양 옆 골목을 따라 흩어져 있는 사잇길을 ‘세로수길’이라고 부른다. 가로수길에 비해 ‘길이 좁다’(細路)로 세로수길이라고 부르는지, 가로와 대조적인 의미로 세로라고 부르는지 정확하진 않다. 아무튼 세로수길을 먼저 둘러보면서 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쇼핑은 가로수길, 밥은 세로수길.
가로수길 산책에 앞서 자료를 찾던 중 이런 제목의 글을 발견했고 그 말대로 실천하려던 것 뿐이었다. 요즘 좀 핫하다는 거리에는 일본 가정식이나 베트남 식당이 많이 보인다. 세로수길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트남 식당에서 반미를 먹고 본격적인 산책을 시작했다. 도산대로 11길을 따라 압구정동 방향으로 걸었다.
저 노란 펭귄들은 뭐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노란 펭귄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50마리쯤 되는 펭귄 인형들을 줄을 맞춰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펭귄 무리가 신기한지 다른 사람들도 멈춰서서 펭귄들을, 펭귄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알고보니 J 화장품 회사 이미지 광고였다.
다시 몇 걸음 옮기는데 유리 너머로 옛날 가마가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옛날 가마만 있었다면 그냥 지나갔을 텐데 가마를 타고 있는 것이 호랑이였다. 가마를 탄 호랑이의 뒷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호기심에 유리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 호랑이 꼬리가 밖으로 늘어진 가마가 있고 가장자리에 화장품 몇 개가 전시되어 있었다. 매장 한쪽에서 방문객을 대상으로 향수와 핸드크림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화장품 가게에 호랑이가 탄 가마라니.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G 안경점에는 ‘13프로젝트’라는 제목의 오브제 시리즈가 각 층 중앙에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달의 자전축이 점점 기울어 지구와 멀어지는 미래의 상황을 오브제에 연출했다고 한다. 달과 지구의 불균형의 결과로 13번째 달, ‘13월’이 생겨나고 이러한 변화 때문에 동물이나 식물들이 이상 징후를 보이고, 인간들은 종교나 과학기술을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설명을 듣고 보니 천천히 움직이는 꽃잎들과 동물 형상, 달의 이미지 등이 미래의 어느 날처럼 느껴졌다. 안경점을 찾은 사람들은 기이한 오브제들을 둘러보면서 그 사이사이에 배치된 안경을 착용해 보고 사진도 찍었다. 쇼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회나 과학관 체험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로수길에서 가로수길로 넘어갔다. 보통 가로수길은 기업은행 신사동 지점부터 신사동주민센터까지를 말한다. 세로수길이 카페, 식당 사이에 작은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면 가로수길은 제법 알려진 브랜드 매장들이 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화장품 브랜드들이다. 흔히 로드샵 브랜드라고 일컫는 화장품 회사는 가로수길에 매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듯했다. 다른 곳에 있는 매장과 다른 점은 디스플레이가 특색있다는 점이다. 대형 모니터를 이용한 이미지 광고를 하거나 매장 입구에 만개(滿開)한 벚꽃 장식으로 눈길을 끌거나 침실처럼 꾸며놓고 화장품을 배치했다거나 등등 행인을 사로잡는 방법이 다양했다.
의류, 잡화,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들도 특색 있었다. 팔아야 할 물건은 최소한만 노출시키고 영상이나 빔 프로젝트, 설치미술 작품, 특이한 조명 등으로 시선을 끄는 곳이 많았다. 우리는 물건을 팔기에 앞서 이미지를 파는 거야, 이런 분위기였다.
라인프렌즈 스토어 입구에서 다섯 명의 여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가게 앞 브라운과 사진을 찍었다. 껴안고, 어깨동무를 하고, 머리에 손을 얹고 브라운이 마치 진짜 그들의 친구인양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보니 카카오톡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라이온, 어피치, 튜브, 콘, 무지, 프로도 같은 카카오프렌즈가 ‘프렌즈’라고 부를 만큼 익숙하다.
장 보드리야르를 들먹이지 않더라고 현대사회는 이미 상품의 기능보다 상품의 이미지가 중요해졌다. 가로수길은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파는 것에 충실하고 있었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가치를 좇는 사람들, 상징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가게들이 가로수길에 있었다.
가로수길을 사이에 두고 길 건너편에서 애플스토어를 바라봤다. 전면의 높은 유리 파사드 안에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 나무다. 매장 바로 앞에도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진짜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모호하다. 가로수길에서 만난 이미지들은 매력적이었다. 이미지를 파는 거리, 가로수길에서는 무엇을 상상해도 된다. 가로수길이니까 가능하다.
강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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