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너에게 속삭이는 말이면서 아직 나에게 하는 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6-20 17:49:44
시쓰기는 다족류가 여러 방향에서 점자책을 더듬는
사물과 사물 사이 감각을 느끼는, 언어 탐구의 노정
"감각을 언어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한 써나갈 터"
시라는 붉은 면적이 있다
_ '너에게 속삭이는 말이면서 아직 나에게 하는 말 중에' 전문
송재학 시인에게 시는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경작해야 할 '면적'이다. 그는 최근 펴낸 열두 번째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문학과지성사)을 여는 첫 시로 이 한 줄짜리 짧은 시편을 선언처럼 배치했다. '색을 통해 마음을 보라'고 했던, 색채로만 가득 채워진 마크 로스코의 붉은 색면화를 보고 그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보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언어로 구축하는 알 듯 모를 듯 불분명한 경계는 그가 내내 천착해 온 포기할 수 없는 문학의 '매혹'이다.
치과 의사로 개업한 이듬해인 1986년 '세계의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생업과 시쓰기를 40년 가까이 병행해온 송재학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언어를 탐색하며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가 줄곧 견지해온 시학은 모든 사물과 사물 사이에 내재하는 존재의 감각 찾기였다. 그는 시집 모두에 "시 쓰기는 어떤 육체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되풀이했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도 그러했다"고 썼다. 그에게 시쓰기란 모든 대상을 느끼는 감각적 행위인 셈이다.
'가로등이 꺼진 뒤의 불빛' '시에서 생활을 익혔기에' '노래의 생각들' 등 3부로 구성해 58편을 담았다. 그가 그동안 써 온 시는 2500편을 훌쩍 넘어선다. 그 중 절반 이상은 버리고, 다시 선택한 시편들 중에서도 퇴고를 거듭해 정선한 것들만 시집에 수록했다. 이번 시집의 시들도 2년 동안 퇴고를 거듭한 결실이라고 했다. 특유의 낯선 조합의 언어들이 깊은 사유를 동반하는 시편들과 함께 독자들과 교감하는 '비범 속 평범'의 시편들을 고르게 배치한 것도 이번 시집의 특징이다.
누에 암나방은 다섯번째 탈피를 마치면 알을 낳은 뒤 입이 퇴화되어 점차 먹지 못해 죽는다 누에 암나방은 태어날 때 이미 눈이 없다 _ '어떤 입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전문
누에 암나방은 눈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 눈이 없는 상태가 알을 낳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탈피를 거듭해 알을 낳은 뒤에는 입이 퇴화돼 죽는다. 누에들에게는 최적화된 생존 방식인 셈인데,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다르다. 시인은 "아무 쾌락도 없이 그렇게 가는 게 맞을까" 싶은 섬뜩함을 그들의 '평범한' 생에서 느꼈다고 했다.
-오래 지치지 않는 한결같은 열정이다.
"사실 이렇게 평생 시를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내 시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늘 생각을 하며 써왔다. 고교 시절 '향가'를 배우면서 한자로 표기된 원문, 이두식 문장구조로 해석한 고대 한국어 문장, 현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번역문, 이 세 가지 언어가 각기 다른 매혹으로 다가왔다. 언어가 가진 힘이, 같은 이야기를 울림이 굉장히 큰 다른 느낌으로 만든 것이다. 한자 말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이두 문체로 된 건 낭독하는 입말이고, 그걸 해석하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인데 그 차이점이,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이 예각적으로 느껴졌다. 문학청년 시절부터 우리말을 채집하기 시작해 300쪽이 넘는 저만의 우리말 사전을 만들어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는 일에 몰두해왔다."
-독자들과의 소통 차원에서는 어려움도 있겠다.
"제가 늘 고민했던 부분이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는가였다. 나를 위해서 쓰는가, 세계를 위해서 쓰는가, 이미지와 언어 자체를 위해서 쓰는가, 그런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그런 쪽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타협을 하면 내가 가진 색깔이 사라지지 않나 싶다."
갈대를 가득 채운 티브이 화면이 나를 자꾸 삼키고 있기에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은 습(霫)일 뿐입니다 습지의 자욱한 일기예보에서 복습된 흑백의 습, 외자입니다 …목발뼈 발배뼈 입방뼈 쐐기뼈라는 순롓길을 짚으면서 스페인을 다녀온 뒤 한동안 비에 젖거나 비를 찾아다닌 꿈이 나를 간섭했습니다 아침마다 복용하는 약병의 라벨을 뜯어내니까 다른 라벨이 숨어 있습니다 문득 내 이름이 지명이거나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짐작을 합니다 _ '습이거나 스페인' 부분
이번 시집 표제작은 언어 탐구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그동안 써 온 시편들은 짧은 시보다 산문시가 더 많은 편이다. 이 장문의 표제작은 문장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려는 시도의 대표적인 결실인 셈인데, 축축한 '습'의 액체성이 지닌 쓸쓸한 심리의 장소로 '스페인'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습이거나'를 자꾸 발음하다 보면 '스페인'과 가까워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스페인 순례길 이미지가 독특하다.
"축축하거나 스며든다는 의미의 '습'(霫)을 우리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쓸쓸한 감정이라고 이해했을 때, 나에게는 순례길도 습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비가 올 때 감정이 쓸쓸해지는 게 아니라, 나는 쓸쓸함을 위로받는 편이다. 스페인도 그렇게 바라본 것이다. 순례가 힘들수록 자신을 위로해 준다고 생각을 한다. 그것이 위로의 이미지,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 나에게는 스페인의 환대가 아닌가 싶다."
도로를 덮은 폭설 속/ 눈에 묻힌 의자/ 온전히 흰색이 되었어/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눈먼 심해어의/ 두근거리는 마음 _ '흰 색' 전문
나의 시선에 섬 하나가 생겼다/ 심해에서 치솟았기에 오래전의 얼굴과 닮았다_ '섬' 전문
⁃돌아가지 않겠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이 애잔하다. 오래전 얼굴이 섬처럼 떠오르는 건 어찌할까.
"사물을 감각으로 파악하는 제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시편이다. 모든 것을 이목구비로 바라보는 것, 영성을 가진 물질로 보는 그런 게 이 시들에서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저는 사물을 바라볼 때 범신론자이고 정령주의자인 것 같다."
나의 시 쓰기를 견뎌준 지구의 중력, 다족류의 시가 더듬는 점자책은 침묵을 듣는 귀를 가졌다 물소리까지 포함해서 이 영토 안에서 죽은 나무와 살아 있는 나무의 비율은 절반씩이다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고 흩어지는 선과 면을 나는 시의 처음이라고 부르지만 육신의 깊이에서 절단의 기억이 생생해지는 것이 시의 여정이라고 생각해왔다, 살과 뼈가 자랐던 부분이 비록 먼 곳일지라도 _ '지구의 중력' 부분
⁃시쓰기란, 다족류가 점자책을 더듬는 행위인가.
"존재 자체가 감각으로 이루어진 사물을 가운데 두고 제가 위치를 바꿔가면서 사물을 파악하는 행위를 다족류의 시라고 보았다. 한 가지 물체가 여러 개의 정의, 언어, 감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만져서 느끼는, 그런 다족류가 더듬는 점자책이 나의 시라는 생각이다. 죽은 나무와 살아 있는 나무의 비율이 절반이라는 것도 이 감정 저 감정이 경계에 섞여 있는 사물의 복잡성을 말한 것이다. 움직이는 선과 면을 절단했을 때 시가 탄생한다. 절단면을 더듬어야 사물의 본질이 보인다."
3부 '노래의 생각들'은 그가 요즘 심취한 재즈에서 감각한 언어들이다. 이성적인 언어 탐구의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빠져나온 재즈 가수들의 호흡이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쳇 베이커의 'Almost Blue'에는 "넌…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미열과… 꽃나무 사이/ 로드킬까지… 어둡고 무겁지만/ …지워지지 않는 길의 핏자국은/ 어금니를 거쳐가고 있기에/ 목이 길어지는… 국도는/ … 이정표를 점점 잃어버린 거"라고 쓴다.
그대로 노래처럼 들리는 '슬픔의 입구'도 있다. "달에 닿으려는/ 수많은 발걸음// 밀물과 함께/ 달빛은 어디에나 스며들지만// 달빛과 함께 알아가는/ 달의 표면// 달까지의 계단이기에/ 달빛이 일렁이지// 왠지 모를 슬픔의 입구처럼// 날이 저물고/ 직렬로 켜지는 가로등은/ 달과 연결되는/ 잔별의 모습/ 지상의 모든 악기는/ 달에 남겨졌던 슬픔"('달에 닿기 위하여')
송재학은 "이 세계가 나에게 주는 감각을 언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끝나는 시간이 온다면 그때는 단호하게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여진문자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발견한 '푸치히'(부처) 같은 매혹을 주는 언어를 만난다면 언제든 기꺼이 쓰겠다"고 말한다. 사소한 듯, 뜨겁다.
가끔 목성 너머 푸른 점과 마주칠 때, 희로애락은 별의 위치에서 쓸모없고 생로병사 역시 먼지라는 물질이지만, 지구에서 가져온 사소한 감정은 단 하나, 저 별에 대한 희미한 애착이다_ '가니메데라는 궤도'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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