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떠나도 괜찮아, 그래도 오늘은 같이 있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6-03-27 16:19:27
10인의 작가가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본 고양이 서사
통제할 수 없는 관계 성찰하는 연민과 묵묵한 응시
"도도한 고독, 떠나보내는 마음속 범종, 생명의 연대"
내가 저버렸던 그 고양이. 내가 저버린 수많은 고양이 중 하나인 그 고양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풍경을 보면, 희미한 보안등 빛 아래서 그 고양이가 나를 초대했던, 그 아늑한 시간이 흐느끼듯 떠오른다. _ '하얀 새틴의 밤'
길고양이를 거두며 살아온 '고양이 시인' 황인숙이 고양이 소설 말미에서 흐느끼듯 고백하는 말이다. 어디선가 죽임을 당했을지 모를 꾀꼬리 목소리를 가진 연노랑빛 고양이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잉걸출판사에서 소설 무크지 2호로 펴낸 '고양이, 부르면 오지 않는 것들'에 수록된 단편 '하얀 새틴의 밤'에는 그가 거둔 다양한 고양이들 사연이 담겨 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화자의 죄책감과 연민을 함박눈 내리는 겨울밤의 풍경 속에 녹여낸다. "용산중학교에 놓은 고양이 밥이 눈으로 덮이겠구나"라며 젖은 건사료를 먹지 못할 고양이들을 걱정하는 화자의 마음은, 과거 거리를 두느라 안아주지 못했던 연노랑빛 고양이에 대한 후회로 이어진다. 내가 저버렸던 수많은 고양이 중 하나, 희미한 보안등 빛 아래서 화자를 초대했던 그 아늑한 시간의 흐느낌은 짙은 서정성을 자아낸다.
서울 마포구 '영도다방'에서 열린 북토크 자리에서 황인숙 시인은 "고양이가 진짜 무섭거나 위험한 동물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제 삶을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고양이는 인간의 잣대로 말하자면 정말 우아하고 기품 있는 황홀한 피조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덜 고귀한 존재에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 마음이 쓰이고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황인숙 시인과 김도언 작가의 인터뷰까지 수록한 1부 초대석에 이어, 2부와 3부에는 다양하게 변주된 단편들이 수록됐다. 강혜림의 '살아 있다는 행위'에는 고양이와 영역 싸움을 벌이는 화자가 등장한다. 제주 시골로 좌천된 화자는 마당에 똥을 싸는 길고양이를 쫓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뾰족한 스파이크를 설치하고 식초를 뿌린다. 그 과정에서 아내의 패혈증 증세를 무시해 사경을 헤매게 만든다.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차가운 고양이를 안고 온기를 느끼며, 자신의 옹졸했던 영역 싸움과 살아 있음의 감각을 깨닫는다. 강혜림은 "고양이를 진짜 너무 무서워하는데 서서히 운명처럼 다가왔다"며, 고양이의 배변을 치우며 무기력했던 자신 안에 오만가지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양정규의 '떠나도 괜찮아'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찾아온 고양이 가족을 돌보며 상실을 받아들이는 애도의 과정을 배운다. "붙잡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여전히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작은 온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상실을 겪어본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소설 속 사연처럼 실제로 고양이들 때문에 빵집 문을 닫는 경험을 했다는 양정규는 "이 소설의 이면에는 우리가 예기치 못하게 겪는 이별과 죽음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다"면서 "죽음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부분들이 고양이의 특성과 너무 맞아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제가 미워했던 아버지의 죽음까지 무사히 장례를 치른 기분이라 대단히 의미가 크다"고 했다.
감긴 눈꺼풀이 떨릴 때, 수염과 꼬리와 발이 움찔거릴 때, 작은 소리를 내며 입이 움직일 때, 잠든 것 같지만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사랑이나 혁명은 고양이의 꿈처럼 아무도 모르게, 오는 줄도 모르게, 웅크린 작은 고양이가 어느 날 푸른 눈의 늠름한 고양이가 되어 야옹야옹 말을 걸며 다가오는 것처럼……이라고, 언젠가 너는 말했다. _ '사랑과 혁명'
이수경의 '사랑과 혁명'은 편의점 알바를 하며 타인을 돕는 스물두 살 자녀를 대학에 데려다주며 화자가 겪는 상념을 담았다. 화자는 스무 살 시절 친척의 방직공장에서 일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현재 대학 교정에 가득한 외국인 유학생과 이주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겹쳐 본다. 고양이 '맹세'를 통해 약자에 대한 사랑과 조용한 혁명의 의미를 성찰한다.
권혜린의 '이동식 복도'는 재활병원에서 환자들의 휠체어를 미는 이동 기사인 화자의 이야기다. 화자는 발목이 골절된 젊은 환자 윤서, 까탈스러운 주박 할머니와 교감한다. 병원에 물탱크가 터져 물이 차오르는 위기 상황에서 윤서가 내민 목발 덕분에 화자는 구조되고, 팔을 다친 화자를 위해 윤서가 휠체어 밀기를 도우며 서로 연대한다. 일터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힘든 삶 속에서도 이어지는 생의 온도가 따스한 단편이다.
고은규의 '이별을 그딴 식으로 하는 사람'은 애틋하고 먹먹한 연애소설이다. 남자친구 윤오의 외도로 이별한 화자는 복수심에 그가 맡긴 고양이 '자바'를 데리고 이사해 연락을 끊는다. 이후 새 연인 승운이 자바에게 심하게 공격당하자, 화자는 자바를 돌려주려 윤오를 수소문한다. 하지만 윤오의 후배를 통해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비통하다. 떠난 것은 떠난 것이고, 살아 있는 생명과 직면해야 하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이별을 그딴 식으로 했던 과거는 이제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서성란의 '고양이 묘지'에는 가난과 소외 속 두 인물이 교차된다. 집 나간 손녀가 남긴 늙고 병든 고양이에게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물을 떠먹이며 죽음을 지키는 노인 정순과, 아이를 트렁크에 가두고 밤마다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며 환청과 구더기 환각에 시달리는 지영의 열악한 현실을 병치하며 생명의 비참함 속 연민을 그린다. 서성란은 "평생 고양이나 개를 키워본 적도 없고 무서워한다"면서도, 갓 태어나 길에 혼자 우는 새끼 고양이를 구조하며 마치 아기를 낳은 것 같은 설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호준의 '지붕 위의 칸트'도 통제할 수 없는 거리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다. 시골로 이사 온 소설가 화자가 길고양이 '칸트'에게 밥을 주며 벌어지는 일상이다. 칸트가 아랫집 노인의 지붕에 올라가 생활하자 노인은 분노하며 물건을 던진다. 화자는 칸트와 노인 사이에서 곤란해하지만, 어느 날 노인이 홀로 고독사하고 만다. 노인의 시신이 구급차에 실려 가자, 칸트도 그 바퀴 자국을 따라 영영 마을을 떠난다.
염기원의 '좌완 파이어볼러 신성우'는 과거 148km의 강속구를 던지던 야구 유망주였으나 '입스'로 은퇴 후 배달 기사로 사는 성우가 주인공이다. 옛 연인 선희 등 동창들과 떠난 섬 여행에서 친구들의 엇갈린 욕망을 목격한다. 성우는 돌아오지 않는 과거의 영광에 미련을 두는 대신, 자신만의 완전한 고독 속에서 배달이라는 현재의 목표를 묵묵히 완수하는 삶을 긍정한다.
염기원은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에서 마주친 애교 많은 까만 고양이,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던 연희문학창작촌의 고양이들을 회고했다. 그는 책 제목의 쉼표에 주목하여 "지나간 세월이나 인연처럼 아무리 불러도 절대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쓰려 했다"며, 고립된 섬에서의 여행을 통해 타인과 억지로 어울리기보다 자신만의 완전한 고독 속에서 '광야에서 올바르게 사는 법'을 익히게 된 내면의 변화를 고백했다.
저 북을 칠 때 스님들은 마음속에 마음 심(心) 자를 그리며 북채를 움직인다고 했다. …처음 법고 소리가 당신 마음에 울렸을 때는 지리산의 시커먼 자락 위로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이 북소리에 무두질되듯 조금씩 검게 변하고 운판이 울리고 목어가 울릴 때는 온 세상이 목어가 푸득푸득 소리를 내며 헤엄치는 검고도 깊은 물속 같아졌다._ '너의 검고 푸른 길'
원로급 작가 이순원의 '너의 검고 푸른 길'은 선배를 대신해 낯선 이들과 남도 문화 기행에 나선 '당신'이 화자다. 부친상을 당한 여자와 구례에서 우연히 함께 내리게 된 당신은 화엄사로 향한다. 그곳에서 저녁 예불의 장엄한 법고와 범종 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이혼의 상처와 과거의 엉킨 마음들을 내려놓고 텅 빈 영혼을 위로받는 듯한 깊은 평온과 성찰을 얻게 된다.
'영도다방 북토크'를 진행한 소설가 신승철 잉걸북스 대표는 "가까워지지 못해도 괜찮아, 그 거리가 우리의 연민이니까"라는 문장으로 이 책의 중심 정서를 요약했다. 도도한 고독, 떠난 것을 보내는 마음속 범종, 살아 있는 생명끼리의 따스한 연대가 흘러다닌다. 양정규의 소설 속 화자가 야근 후 집에 돌아와 고양이 털 속에 손을 묻고 나직이 속삭이던 말.
'떠나도 괜찮아, 그래도 오늘은 같이 있자.'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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