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무죄 구형' 검사는 임은정? 그렇지 않다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11-04 16:03:02
[김덕련의 역사산책 36] 검찰과 무죄 구형
무죄 구형, 검찰 금기 → 낯설지 않은 풍경
임은정 검사 징계 취소 소송 승소 후 변화
임 검사 전에 1949년 무죄 구형 사례 존재
대상자는 현직 검사 신분으로 체포된 양을 ▲ 검찰청 폐지 등을 담은 정부조직법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둔 지난 9월 25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깃발 모습. [뉴시스]
이 징계 파동의 파장이 컸기 때문인지 임 검사를 무죄 구형을 최초로 한 검사로 여기는 이들이 꽤 있는 듯하다. 파동 당시 '사상 첫 무죄 구형'이라고 보도한 매체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임 검사보다 63년 먼저, 즉 4·3사건 발발 이듬해인 1949년에 이미 검찰이 양을이라는 사람에게 무죄 구형을 한 사례가 있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양을은 서울지검에서 검사 시보를 마치고 1949년 2월 23일부로 제주지검 검사에 임명돼 부임을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온 제주경찰서 형사대가 그달 28일 양을을 체포해 제주도로 압송했다.
경찰이 구속 영장도, 법무부 장관의 사전 승인도 없이 현직 검사를 납치하듯 끌고 간 것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경찰에 유감을 표시하고 양 검사 체포 해제를 요구했다.
당시 내무부 산하였던 경찰은 거부했다. 김효석 내무부 차관은 '경찰이 현직 검사를 불법으로 체포했다'는 기사는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찰 위신을 손상한 기사의 출처를 조사중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담화를 발표했다.
체포된 지 2주 후인 3월 14일 양을은 내란 음모 및 방조 혐의로 구속됐다. 양을이 발령을 받은 기관인 제주지검은 사건을 광주지검으로 이송했다. 5월 25일부로 양을은 의원면직 형식으로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10월 31일 광주지법에서 전직 검사 양을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검사는 무죄를 구형했고 판사는 무죄를 언도했다. 당일 공판에 입회한 검사와 판사의 이름이 동아일보 1949년 11월 2일 자에 실려 있다. 이세흔 차장검사와 송화식 부장판사가 그들이다.
이 사건이 현재까지 기록으로 확인되는 대한민국 검찰 최초의 무죄 구형 사례로 꼽힌다. 다만 재심 사건이 아니고 대상자가 전직 검사라는 점에서 오늘날 무죄 구형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양을 사례에는 검찰에 위세를 부릴 정도로 경찰의 힘이 막강했던 시대상이 담겨 있다. 검찰 공화국으로 불리는 요즘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승만 정권 초기에는 그랬다.
전부터 경찰과 대립하던 현직 검사가 1948년 10월 여순사건 때 군경이 다시 장악한 순천에서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 이야기다. 처형을 주도한 것은 박 검사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경찰 쪽 인사들이었다.
양을 사례에서 검경의 힘겨루기와 별개로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현직 검사가 그렇게 납치되듯 경찰에 끌려갈 정도였으면 평범한 시민들, 특히 4·3사건 때 제주도민들의 처지는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보고서의 양을 사례 부분에는 4·3사건 시기에 경찰에 의한 주민 피해도 컸다며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당시 현직 검사가 구속되는 상황은 일반 주민들의 피해 정도를 짐작케 한다."
무죄 구형, 검찰 금기 → 낯설지 않은 풍경
임은정 검사 징계 취소 소송 승소 후 변화
임 검사 전에 1949년 무죄 구형 사례 존재
대상자는 현직 검사 신분으로 체포된 양을
검찰이 지난달 29일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고 강을성 씨 재심 결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했다. 강 씨는 유신 독재 시기인 1974년 육군보안사령부에 체포돼 간첩단의 일원으로 몰린 끝에 1976년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에 휘말린 이들 중 앞서 재심이 진행된 고 박기래·진두현·박석주 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보안사 측의 불법 구금, 고문 등으로 인해 허위 자백을 했다는 사실이 재심 과정에서 확인됐다. 검찰이 강 씨에게 무죄를 구형한 것도 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올해 무죄 구형 사례는 이것만이 아니다. 검찰은 61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던 최말자 씨 재심 공판 등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이처럼 무죄 구형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하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검찰에서 무죄 구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변화의 계기는 2012년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구형했다가 징계를 받은 임은정 검사가 2017년 징계 처분 취소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것이었다.
이 징계 파동의 파장이 컸기 때문인지 임 검사를 무죄 구형을 최초로 한 검사로 여기는 이들이 꽤 있는 듯하다. 파동 당시 '사상 첫 무죄 구형'이라고 보도한 매체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임 검사보다 63년 먼저, 즉 4·3사건 발발 이듬해인 1949년에 이미 검찰이 양을이라는 사람에게 무죄 구형을 한 사례가 있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양을은 서울지검에서 검사 시보를 마치고 1949년 2월 23일부로 제주지검 검사에 임명돼 부임을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온 제주경찰서 형사대가 그달 28일 양을을 체포해 제주도로 압송했다.
경찰이 구속 영장도, 법무부 장관의 사전 승인도 없이 현직 검사를 납치하듯 끌고 간 것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경찰에 유감을 표시하고 양 검사 체포 해제를 요구했다.
당시 내무부 산하였던 경찰은 거부했다. 김효석 내무부 차관은 '경찰이 현직 검사를 불법으로 체포했다'는 기사는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찰 위신을 손상한 기사의 출처를 조사중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담화를 발표했다.
체포된 지 2주 후인 3월 14일 양을은 내란 음모 및 방조 혐의로 구속됐다. 양을이 발령을 받은 기관인 제주지검은 사건을 광주지검으로 이송했다. 5월 25일부로 양을은 의원면직 형식으로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10월 31일 광주지법에서 전직 검사 양을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검사는 무죄를 구형했고 판사는 무죄를 언도했다. 당일 공판에 입회한 검사와 판사의 이름이 동아일보 1949년 11월 2일 자에 실려 있다. 이세흔 차장검사와 송화식 부장판사가 그들이다.
이 사건이 현재까지 기록으로 확인되는 대한민국 검찰 최초의 무죄 구형 사례로 꼽힌다. 다만 재심 사건이 아니고 대상자가 전직 검사라는 점에서 오늘날 무죄 구형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양을 사례에는 검찰에 위세를 부릴 정도로 경찰의 힘이 막강했던 시대상이 담겨 있다. 검찰 공화국으로 불리는 요즘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승만 정권 초기에는 그랬다.
전부터 경찰과 대립하던 현직 검사가 1948년 10월 여순사건 때 군경이 다시 장악한 순천에서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 이야기다. 처형을 주도한 것은 박 검사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경찰 쪽 인사들이었다.
양을 사례에서 검경의 힘겨루기와 별개로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현직 검사가 그렇게 납치되듯 경찰에 끌려갈 정도였으면 평범한 시민들, 특히 4·3사건 때 제주도민들의 처지는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보고서의 양을 사례 부분에는 4·3사건 시기에 경찰에 의한 주민 피해도 컸다며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당시 현직 검사가 구속되는 상황은 일반 주민들의 피해 정도를 짐작케 한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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