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광복군] ⑤ '자루 속 쥐' 영국군, 공작대 덕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송창섭
realsong@kpinews.kr | 2023-11-22 15:04:29
임팔 대회전 중 티딤 전투에서 일본군에 포위된 영국군 17사단
공작대, 일본군 문서를 정확히 해독해 영국군에 무사 퇴각 도움
17사단 이끈 영국군 코완 소장, 공작대원들 활약에 경의 표해
티딤 출신 친족 "'여기서 조선인 병사도 많이 사망' 얘기 들었다"
전투는 버마 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고 그 결과(영국·인도연합군 승리)는 전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2차 세계대전 때 버마((Burma·현 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 소장으로 활약한 이안 라이얼 그랜트는 참혹했던 당시 전장의 모습을 담은 두 권의 책을 펴냈다. 그중 하나가 '버마: 더 터닝포인트'다. 책에서 그랜트 소장은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로 1944년에 임팔 대회전의 일환으로 벌어진 티딤 전투를 꼽았다.
양 진영의 격전은 인도‧미얀마 국경 일대에서 펼쳐졌다. 일본이 말하는 '인면(印緬)전구'가 바로 이곳이다. 미얀마에서는 '친(chin)주'가 여기에 해당한다. 티딤은 친주 내 한 도시다. 1944년 3~7월 영국‧인도 연합으로 구성된 영국군 17·20·23사단과 일본군 15·31·33사단은 친주에서 정면충돌했다.
정확하게 티딤에서 전투가 몇 차례가 있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해 3월 영국군 제17사단이 티딤까지 내려왔다가 일본군에 허를 찔려 사면초가에 놓였던 것은 인면전구공작대(이하 공작대) 한지성 대장 일기를 통해 확인된다. 막대한 피해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공작대 문응국 부대장과 김상준, 나동규 대원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 임팔 일대의 인면전구공작대 활동 관련 장소(빨간색 표시 지명). [UPI뉴스]
이들 3명은 영국군 201전지선전대에 배속돼 1944년 2월 12일 인도 임팔에 도착했다. 이들의 임무는 일본군에 대한 투항 권유 방송, 노획된 문서 해독, 포로 심문 등이었다. 3‧1절을 임팔에서 보낸 세 대원은 영국군 17사단과 함께 3월 11일쯤 티딤에 왔다.
문제는 티딤 도착 후 발생한다. 일본군의 예상 밖 포위 공격에 당황한 영국군은 수일 만에 큰 피해를 봤다. 결국 임팔에 위치한 영국군 본부는 3월 14일 티딤에 있는 17사단에 '전원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군 17사단은 북쪽에 있는 퉁장(Tungzang)까지 퇴각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33사단에 포위됐다. 포위 작전에 참가한 한 일본군 소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퉁장의 적은 … 퇴각에 퇴각을 했지만 자루 속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이때 공작대가 기지를 발휘했다. 문응국 부대장은 습득한 일본군 문서 암호를 해독해 포위병력이 2개 사단이 아니라 1개 사단임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군 포위망이 예상처럼 촘촘하지 않다고 판단한 영국군은 문 부대장 조언을 받아들여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 결과 티딤에서 180㎞ 거리를 안전하게 퇴각해 4월 2일 임팔에 무사히 복귀했다. 영국군 17사단을 이끈 코완 소장이 공작대원들의 활약에 경의를 표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러한 전과는 한지성 지사의 기록에 실려 있다.
"문(문응국), 김(김상준), 라(나동규) 세 동지가 티딤까지 나갔다가 그 뒷길이 끊어지게 되어 소식을 모르게 되었으므로 그 나머지 동지들은 밤잠을 자지 못하며 그 안부를 다급하게 챙겼다. 그러다가 4월 2일이 되어 세 동지는 사단본부로 20여 일의 격전을 하면서 적의 포위선을 돌파하고 무사히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전열을 정비한 영국군은 재차 미얀마 땅으로 들어갔다. 공작대가 포함된 영국군은 그랜트 소장의 회고처럼 이때부터 티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그러면서 버마 전선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뀐다.
▲ 인면전구공작대원들과 영국군 연락 장교 베이컨 대위(오른쪽). 사진 촬영 시기는 1944년 1월 인도 파구(Fagu) 도착 직후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
미얀마 소수민족인 친(Chine)족은 미얀마와 인도, 방글라데시 접경지에 걸쳐 살고 있다. 세 나라가 국경을 그으면서 각자 국적이 달라졌지만 친족은 20세기 이전엔 세 나라를 오가며 지냈다.
친족은 1947년 2월 12일 체결된 팡롱협정으로 버마연방국 소속이 됐다. 당시 버마 정부는 친족, 카친족, 샨족 등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이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친주의 친족은 미얀마와 갈등을 겪고 있다. 사실상 내전 상태다. 친주는 현재 외국인 출입 금지구역이다.
친족은 현재도 미얀마 군사정부를 상대로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친족은 인도, 미얀마 양국 모두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 미얀마는 불교, 인도는 힌두교가 다수 종교인 것과 달리 친족은 일찍부터 영국 선교사로부터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기독교 비중이 가장 높다. 미얀마에 사는 친족 상당수가 기독교도다.
▲ 미얀마 친주에 포함된 티딤은 산악지대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군에게 몰살될 위기에 처했던 영국군은 우리 대원의 기지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재 티딤은 반군 지역이어서 외국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티딤 주민 제공]
UPI뉴스는 공작대가 눈부신 전공을 세운 친주 일대 취재를 위해 노력했지만 미얀마 정부가 외국인 출입 금지를 고수한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불가피하게 미얀마 양곤, 만달레이에 사는 티딤, 퉁장 출신 친족 사람들을 만나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들어봤다.
친족에게도 2차 세계대전 참상의 기억은 선명히 남아 있다. 양곤에서 대학에 다니는 망 카이 붕(28)은 격전지였던 티딤에서 태어나 5살 때 고향을 떠났다.
붕의 선조들은 대대로 친주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녀는 할머니로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친족이 영국군 편에 서서 일본군과 용맹하게 싸웠다는 무용담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친족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여성은 성폭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공작대가 임팔로 퇴각할 때 지나간 퉁장에 대해서는 "티딤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로,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라고 설명했다.
▲ 인도 국경과 가까운 친주 티딤에 있는 일본인 무명용사비. 일본정부는 종전 직후 이 일대에서 대대적인 사망자 수색작업을 벌였다. 티딤은 현재 반군 지역이어서 외국인 출입이 금지돼 있다. [티딤 주민 제공] 만달레이 내에서 친족이 모여 사는 삐지 다곰묘 따만공에 거주하는 에유 뚜에(48)도 티딤에서 태어났다. 그녀도 2차 세계대전 당시 티딤과 퉁장의 참혹한 실상을 부모에게 들었다.
뚜에는 "전쟁 당시 양측 병사들이 수없이 많이 죽어 산마다 시체로 넘쳐났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일본 정부가 티딤, 퉁장 일대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여기서 조선인 병사도 굉장히 많이 사망했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조선'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친주에서 교사로 일한 푸끼만(76)은 "일본 정부가 전사자 명부를 쓰는데 한국인(조선인) 병사들은 소재 파악이 힘들어 유골을 한데 모아 추모 비석만 세운 걸로 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일본군으로 추정되는 남자들이 마을로 와 젊은 남자들을 강제로 데려가서 인도까지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 일을 시켰다"며 "그 과정에서 주민들과 마찰이 많았고 훗날 친족 사람들이 봉기에 나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일본군 전문가 최종호 변호사
"버마 임팔 전투는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만큼 일본에게는 치욕스러운 전쟁의 상징입니다. 초등학교 교육부터 2차 세계대전 비극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죠. NHK 등 일본 주요 방송도 때만 되면 임팔 전투 비극을 조명합니다."
군사 전문가 최 변호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일본군 전문가다. 최종호 변호사(사법연수원 44기)는 "무리한 전쟁이 임팔의 비극을 만들어냈다"며 "당시 일본은 임팔 패전을 '백골가도'로 명명했는데 이는 시체 행렬이 줄을 이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 군사 전문가 최종호 변호사가 지난달 10일 서울 여의도 UPI뉴스 사무실에서 임팔 전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국내에서 보기 드문 일본군 전문가인 최 변호사 설명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짚어보자. 태평양전쟁 성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자원 확보전'이다. 중일전쟁이 길어지면서 군수물자 확보가 시급해진 일본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일본명 남방)로 전선을 확대한다. 일본군은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인근에 매장된 석유, 천연가스 등의 확보가 절실했다.
반일 세력 결집도 남방 전선 확대의 결정적 요인이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이 네덜란드와 손잡는 시나리오를 가장 우려했다. 인도와 미얀마는 영국, 필리핀은 미국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일본은 남방 전선 확대라는 기습공격을 통해 이들의 세력 확장을 막고자 한 것이다.
영국은 △홍콩 루트 △북부 베트남 루트 △원장 루트(인도-버마 루트) △러시아 루트 4곳을 통해 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다. 이 중 3곳은 일본군 진격과 독·소 전쟁으로 막혀 미얀마를 통한 원장 루트가 국민당 정부로선 사실상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것이 미얀마가 전쟁터로 바뀐 이유다.
최 변호사는 "워낙 소수가 활동해 인면전구공작대의 전투 기여도를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일본인 수준의 언어 구사 능력과 일본 전술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영국군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문응국 부대장이 기지를 발휘한 미얀마 티팀 전투와 관련해 "전쟁에서 일본군은 지금처럼 숫자가 아닌 고유 도식으로 구분했는데, 노획 문서에서 그걸 구분해 적의 병력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실전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최 변호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본영 핵심에서 근무한 하야시 사부로(林三郞) 전 육군 대좌가 쓴 '태평양전쟁의 지상전'을 비롯해 '일본군의 패인',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등 전문 서적 3권을 번역해 펴냈다.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KPI뉴스 / 탐사보도부 송창섭 기자 realson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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