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法공백②] 딸 처벌 우려에 스위스行 포기…존엄사, 개인에 떠넘긴 제도 공백
한상진 기자
shiraz@kpinews.kr | 2026-04-30 17:37:34
해외행 택해도 비용·서류 부담…동행인 처벌 가능성도
"국가가 해야 할 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존엄한 죽음'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신이 저를 가엾게 여기시고 해결하라고 안내해 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명식(65) 씨는 2019년 바이러스성 척수염 진단을 받은 뒤 하반신이 마비됐다. 마비된 두 다리의 통증은 지금도 계속된다. "프레스로 두 다리를 누르는 아픔, 철근으로 여기저기 때리는 얼얼함"이라고 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 강도가 90이라고 했다.
버티다 못해 스위스행을 알아봤다. 외국인의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는 스위스 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와 페가소스(Pegasos) 등에 서류를 준비했다. 하지만 딸이 동행해야 하는데, 귀국 후 자살방조 혐의로 조사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간병을 한 것도 힘든데 형사 처벌까지 받게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 씨는 2023년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현행 형법(252조 자살교사·방조죄)은 사람을 교사하거나 방조해 자살하게 한 경우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 씨의 고민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초고령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30일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사전연명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어섰다. 사전연명의향서는 임종 과정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절차다. 우리나라 성인 인구의 7%에 가까운 숫자다.
그러나 연명의료 중단을 넘어서는 선택지는 제도 안에 없다. 우리나라의 존엄사 제도는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 아래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존엄사'만 허용하고 있다. 불치의 통증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선택지가 없다. 이 간극에서 해외 단체를 알아보거나 음성적인 불법 약물 구매를 고려하는 이들이 생긴다.
해외 단체를 택하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어머니의 스위스 존엄사를 직접 준비한 남유하 작가는 디그니타스 이용 비용이 총 2500만 원 이상이었다고 했다. 가입비·연회비·심사 선납금·현지 면담비·현장 진행비·사후 처리비를 합산한 금액이다. 항공권과 현지 숙박비는 별도다.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영문 의료 진단서를 두세 번씩 발급받아야 했고, 서류 번역·공증 비용만 20~30만 원이 추가됐다. 남 작가도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2~3개월이 걸렸다. 그는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존엄사 자체를 포기하는 분들이 꽤 있다"고 했다. "경제적 여건이 안 되거나 도와줄 가족이 없으면 원해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도 했다.
남은 가족의 상처도 크다. 스위스의 조력사망은 본인이 직접 약물을 복용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동행인은 임종을 지켜보고 사망 후 현지 경찰 신고와 행정 처리를 돕는 역할을 한다. 남 작가도 어머니의 임종 후 한동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남 작가는 "존엄사 제도 미비로 인해 국가가 해줘야 할 것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헌법재판소에는 이 씨를 포함한 불치병 환자와 가족들이 제출한 헌법소원이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 존엄사 관련 제도가 미비한 탓에 헌법상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을 침해받는다는 취지다. 헌법재판소는 이 씨의 헌법소원에 대한 본안심리 절차를 진행 중이다.
헌재는 2017년 비슷한 취지의 헌법소원에 대해 "생명권 보호와 관련된 중대한 사안으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입법정책 영역"이라며 각하한 바 있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지금 헌재가 똑같은 판단을 할는지 알 수 없지만 초고령사회 진입한 지금 존엄한 죽음을 둘러싼 논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KPI뉴스 / 한상진 기자 shiraz@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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