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낮은 목소리 느린 속삭임, 어루만지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4-04-26 16:57:14
각자 마음에 품은 시들을 골라 소개하고 추천하는 형식
'고금에 없는 우정'이 만들어낸 새로운 '장르'의 시작
"좋은 시 분별 능력 키우고 그런 시로 위로 삼는 삶 희망"
한 문인의 작품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깊이 읽기' 시리즈는 어느새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듯 하지만, '함께 읽기'는 어떠할까. 깊이 읽는 일은 전문가들이 나서서 전문적으로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흐름일 텐데, 함께 읽는 일은 결이 조금 다른 차원이다. 이종민 전북대 명예교수가 엮은이로 나선 '김사인 함께 읽기'(모악)가 좋은 선례일 듯하다. 전문가들이 깊이 들여다보는 차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 같은 문필에 종사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편안하게 접근해 대중 독자와 가교를 놓는 형식이다.
이 교수는 김사인 시인과 대학 동기 사이로 시인이 지난 시절 공안당국에 쫓겨 '잠수'를 탈 때 은신처를 제공했을 정도로 막역한 관계다. 이 교수는 가까운 친구들 중에서 자신만 홀로 대학을 제때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그 학위로 대학 교수까지 된 것에 대해 항상 빚을 진 느낌이었다는데, 이 부채의식을 탕감하기 위해 김사인 시인의 동덕여대 정년 퇴임을 계기로 일을 진행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시인 모르게 문인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김사인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에 수록된 시 중에서 하나를 골라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추천하는 형식의 글을 써 달라고 했던 터였는데, 수줍음 많은 시인이 알게 되면서 극구 만류해 보류해야 했다. 대신 이 교수는 '전주 한옥마을 예술가 모시기' 프로그램을 활용해 김사인 시인의 '전주 살이'를 성사시킨 뒤 으름장을 놓아 사업을 재개한 결과, 52편을 모아 책으로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 교수는 코로나 시절부터 화상으로 한 시인을 선정해 시집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송하는 '완주 모임'을 진행해오고 있거니와, '함께 읽기'는 새로운 차원에서 그 작업을 연장하는 셈이기도 하다.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3부까지는 3권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각각 나누어 소개글을 추천받았고, 4~5부는 새로운 시와 총론에 해당하는 이숭원 평론가의 글을 게재했으며, 부록으로 시인의 연보 대신 문학상 수상 소감과 서문들을 모아서 배치했다.
춥지 않으냐./ 외진 신작로 마른 먼짓길/ 오똑하게 혼자서 가고 있는 아이야.// 해진 팔꿈치와 옷소매/ 쩍쩍 터 갈라진 네 조그만 주먹을 보며/ 꼬옥 움켜진 낡은 책가방을 보며/ 내 가슴은 사정없이 무너지는데,/ 코끝에 성가신 콧물을 문지르며/ 씩 웃는 네 얼굴은 말 못할 맑음으로 눈부시다// 목숨의 소중함과 사랑을 떳떳이 말하지 못하여,/ 이제 내가 할말은/ '춥지 않으냐'는 물음뿐.// 추위와 가난을 썩 앞질러 야무지게 걸음을 옮기는/ 조그만 등에 대고,/ 네가 자라 더 거센 추위가 닥칠지라도/ 오늘의 이 눈빛 잃지 말고/ 힘차게 북을 치며 나아가라고/ 속으로만,/ 그러나 목이 터져라 나는 외치는데// 들리느냐, 아하 우리의 아이야.
후배 시인 신미나는 '옥동의 한 아이'라는 이 시를 붙들고 시인과의 인연을 돌아보며 추운 날 버스에서 떠올린 생각을 이렇게 풀어낸다.
'지금은 네가 가는 길에 모진 삭풍이 불어도, 옥동의 한 아이처럼 걸어라. 발등 위에 촛불을 세운 듯 조심히 걸어가거라. 불이 휘어져도 네 마음의 심지를 오똑하게 세워라. 영혼의 맑은 눈빛이 흐려지지 않도록 하라. 네 마음의 화(火)가 번져 다른 이를 태우지 않게 하여라. 너 또한 어둠 속에 웅크렸던 때를 생각하며, 다른 이 의 발등을 밝게 비추며 살거라.'
이대흠 시인은 "죽은 사람에 대해 쓰는 시를 추모시 혹은 조시라 하는데, 대개의 추모시는 문학성을 획득하기가 어렵다"면서 "이런 일반적인 통념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도 있는데, 내가 아는 한 김사인 선생의 추모시는 우주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언급한다. 이 책에서 김태정(1963~2011)을 추모하는 김사인의 시 '김태정'을 여러 사람이 중복 추천해서 감상을 적었거니와, 그 시는 이렇게 흐른다.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 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이대흠은 이어서 썼다. "어찌 추모시뿐이겠는가. 타자의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들어가 말하는 김사인 선생의 시적 화자는 도대체 귀신이 아니고 무어라 할 것인가." 이원규 시인은 '태정, 태정, 김태정이 보고싶다'면서 역시 이 시를 언급했고, 김상혁 시인도 '애도에 관한 탁월한 표본 하나'라고 같은 시를 꼽았다.
태풍 오면/ 철없는 어린 갈보처럼/ 마음은 펄럭이리/ 살 속으로 바람 가득 들고/ 먼 데 하늘 돛폭같이 부풀 때/ 늙은 노새의 나/ 끝내 花津(화진) 가리/ 굼실거리며 덮쳐오는/ 수만 코끼리떼 기다리리 말향고래떼 기다리리/ 쏟아지는 몸엣버캐 거친 숨소리/ 花津, 온몸 열어 새 사내 맞는/ 花津, 그 유정한 이름 복판에 서서/ 늙은 나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겠네 한번/ 초라한 갈기 곤두세우고 부르르 떨겠네/ 기어이 나도 저 바다 하리
김언희 시인은 이 시편 '화진(花津)'을 두고 "시라기보다 차라리 무보(舞譜)에 가깝다"면서 "독자로 하여금 펄럭이고, 부풀고, 굼실거리고, 덮쳐오고, 쏟아지고, 달아오르고, 곤두서고, 부르르 떠는 무엇이 '되게' 한다"고 상찬했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 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박연준 시인은 이 시편 '화양연화 (花樣年華)'를 내세우고 "김사인의 시에는 칼과 눈물이 함께 있다"면서 "비정한 목소리 위에 눈물 같은 구름이 떠있거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작두 위를 가만 가만 걸어가는데, 이 둘은 김사인 시의 힘"이라고 적었다. 박 시인은 "내가 아는 시인 김사인은 눈으로 한 번에 보고 마음으로 낚는 사람, 인자해 보이지만 정확히 꿰뚫는 눈빛으로 앉은 자리에서 사람을 호되게 울릴 줄 아는 매서운 독설가"라고 이었다.
이들 외에도 배숙자, 이동욱, 허원, 함순례, 정명교, 지연, 윤지관, 안상학, 이길상, 오창렬, 김수예, 이병초, 유용주, 장철문, 하기정, 유강희, 정지창, 김헌수, 천양희, 박명규, 장만호, 장석주, 경종호, 김성철, 임우기, 복효근, 박신규, 박태건, 김완준, 송재학, 김용락, 진영심, 류미야, 고증식, 석민재, 문화영, 김명기, 최원식, 고영서, 박송이, 장석남, 김해자, 김정경, 천세진이 '함께 읽기'에 참여했다.
이종민 교수는 "많은 이들이 김사인 시인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느린 속삭임에 마음을 달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그렇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눈뜰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꼭 김사인의 시가 아니어도 좋은 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그런 시를 위로 삼아 삶을 좀 더 느긋하게 버텨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덧붙였다.
이숭원 평론가는 총론 말미에 "김사인의 시가 근래에 통 나오지 않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고 한국 문학의 관점에서 커다란 손실"이라면서 "김사인 시인이 전주에 내려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그가 언어를 통한 구도의 길에 다시 나서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김사인 시인이 보내온 말.
"제게 전주는 몸에 잘 맞는 편한 옷 같은 고장입니다. 맵시도 나고요. 서울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큰 위로와 평화를 전주로부터 받았습니다. 여러 선후배님과 벗들이 베풀어주신 과분한 사랑에 부끄러워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종민 교수의 이 '고금에 없는 우정'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책 준비는 계획하고 있지 않습니다. 좋은 시편들이 좀더 쌓여 익으면 시집이 되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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