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정우성의 가치, '증인'이 굿맨을 만났을 때
홍종선
| 2019-02-16 11:30:10
만족스러운 연기를 두고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었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작품을 통해 또 우리의 느낌을 통해 그 배우에게 쌓여온 이미지에 걸맞을 때 호평의 소리가 커진다. '몸에 꼭 맞는 옷'으로만 표현하기엔 아쉬움이 큰 연기를 만났다.
평소 품고 있는 생각, 걸어온 길이 캐릭터를 살리고 배우를 빛내는 순간을 목도했다. 저 배우 나이 잘 들고 있구나, 덕분에 이렇게 좋은 연기 좋은 영화를 보는 행운이 내게 왔구나,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순간. 영화 '증인'의 양순호, 사람 정우성이 배우 정우성을 만나 세상에 낳은 그 남자를 통해 얻은 행복감이다.
영화 '증인'의 개봉을 앞둔 시점, 배우 정우성을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행복, 이미 배우에게서 시작돼 우리에게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촬영 전체가 다 행복했던 시간이에요. 영화 첫 신이 광화문 촬영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오가는 일상의 자리, 많은 소통의 터가 되는 공간. 그러나 개인 정우성에게는 그러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섞일 수 없는 공간인데. 섞일 수 있는 짜릿함, 들뜬 듯한 느낌, 이었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드니, 선후배가 함께하는 인터뷰 자리에서 첫 질문을 하는 일이 드물다. 활발히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현장, 지켜보며 시작하는 게 선배의 예의라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욕심이 났다.
영화 '증인'을 볼 때의 기분 좋았던 만족을 애써 감추고 차분하게 물으려 했지만 허사였을 것이다. 배우의 개성이 캐릭터의 일부가 되는 건 흔합니다. 배우의 인성이 캐릭터 그 자체가 되는 일,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정우성과 양순호가 보여 주었습니다. 동의하나요? 정우성은 공을 먼저 순호에게로 돌렸다.
"순호가 인간적으로 가진 기본적 성향이에요. '노력해 볼게, 아저씨가'. 노력해 보려는 기본적 성향은 분명 저와 닮은 것 같아요."
"영화의 시작이 순호의 현실적 타협에서 시작해요. 순호에게는 맘 편히 살려는 것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해석이 되는 행동이죠(순호는 인권변호사를 접고 대형로펌에 들어간다). 운명적으로 지우를 만나면서 거울을 보면서, 지우에게 질문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성장하는 인물이죠. 타협 이전의 마음을 지우를 통해 '그것이 틀린 게 아닐 거야' 하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순호의 인성을 규정짓는 뿌리잖아요. 시나리오 다 읽고 나니 아버지와 순호의 감성이 영화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느낌, 좋더라고요. 아버지와의 장면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순호로서가 아니라 정우성으로서 대리만족했습니다."
자신에게 건넨 칭찬을 순호에게, 또 순호 마음의 거울이라 할 지우에게로 확장시킨 정우성은 극중 아버지에게로 그 공을 보냈다. 떠들썩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정우성에게 쏠린 화제를 자연스럽게 순호에게로, 지우에게로, 아버지에게로 이으며 영화 전체로 기자들의 관심을 돌렸다. 역시나 자연스럽게 인터뷰는 영화 얘기, 또 그 배역을 연기한 김향기, 박근형 배우 얘기로 물 흐르듯 화제가 옮아갔다. 대선배 박근형 배우 부분을 잠시 옮겨 볼까.
"순호 아버님을 박근형 선배님이 해 주신다는 얘기 듣고 반가웠어요. 단 한 번도 같이 해 보리라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그렇게 근사한 분이 해 주신다 하니 너무 좋았어요. 선배님은, 박근형 선배에 규정되는 얘기가 아니라 현장에서 오래된 분들은, 선생님 대접을 받는 걸 부담스러워 하셔요. 현장에서 똑같이 동료로 섞이길 바라시죠. 자리 마련돼 있고, 여기 쉬세요, 이러면 '다 같이 일하는 건데'라고 말씀하세요. 그런 순간들이 건전한 에너지로 다가와요. 순호의 아버지가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말투로 얘기할까 궁금했어요. 그 속도, 말의 속도라는 게 사실 배우 간에 어울림이 될 수 있거든요. 게다가 부자잖아요. 저의 말의 속도와 비슷한, 그런 톤으로 얘길 해 주시니까 마치 아버지의 숨결에 기대 저도 막 툭툭 뱉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됐어요. 너무 좋았습니다."
얘기의 물길은 돌고 돌아 다시 배우 정우성에게로 가닿았다. 들은 얘기를 전했다. 광고나 화보를 찍으면 주름을 지우는 등의 작업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던데, 어떤 연유인가요. 어떠어떠하게 나이 들어야겠다, 생각해 본 적 있나요?
"후반작업에서 영화 색 보정할 때 배우를 아끼는 마음에 '처리'를 해 주려 해요. 이한 감독님께 '유분기만 없애는 정도로 기본 메이크업만 하고, 머리도 아무것도 바르지 말고, DI(디지털보정) 할 때 주름 같은 것 잡지 말죠'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요? 그래도 돼요? 좋죠' 하셨고요(웃음). 주름은 삶의 흔적이잖아요. 그걸 잘 받아들였을 때 그 나이에 맞는 표정이 생기는 거라 생각해요. 그거 하나하나가 소중한 거라 생각하고요. 나이 듦을 감추기 위해 있는 주름을 DI에서 펴가면서 작용을 만들어 내는 건 캐릭터를 온전히 전하는 순수함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물론 여자 배우와 남자 배우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제 선택이 맞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에서는 자연스러운 주름이 하나의 드라마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잘 나이 먹어야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만 내 것이 될 순 없잖아요. 그 외의 모든 것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완성 짓는 요소고요. 그런 하나하나가 소중한 거라 생각합니다."
"변화는 성장이죠. 잘 변해야 해요, 좋게 변해야 해요. 자신의 가치관을 홱 바꿔버릴 순 없지만 그 변화 속에서 성장하는 자아를 이끌어가고 성숙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변화보다는 성숙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아요. 내적 갈등이 사람의 가치관을 확장시킬 수도 있지만 일상의 소소하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도 자아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급하게 사회 시스템을 바꾸려 하면 개인이 다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고요. 마음을 차분히 하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시간을 두고 성장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철거가 진행되는 달동네에 살면서 그 동네에서 가장 늦게 이사 나가는 집의 아이. 전기가 없고 물이 없어도 살지만 학교 다녀와 보면 벽이, 천장이 허공이 되는 날이면 떠나야 하고 또 다른 달동네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아나갔던 나날. 언제 헐릴지 모르는 집에서 잠들었던 아이는 일찍 철이 들었고 남들보다 빨리 세상에 나와 밥벌이를 했다. 그 아이는 돈과 외모에 매몰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는 마음을 지닌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살아온 역사 속에서 형성된 진심을 담아 하는 연기를 본다. 어느새 25년차 배우, 필모그래피를 보면 진심이 솟았다 잦아들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작들에는 오롯이 진정성이 배어 있다. '증인'은 그 절정이다. 물론 향후 스스로 최고점을 경신할 수 있고, 응원하지만.
그래서 묻고 싶었다. 정우성의 배우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배역을 만났을 때 정우성이 빛나고, 어떤 배역들에 감독이 정우성을 부르고 관객들도 더욱 크게 만족한다고 느끼나요.
"크게,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아요. 찾아가는 과정이고요. (탐색의 과정이다 보니) 제 필모그래피 보시면 다른 느낌의 필모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비트', 청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민과 같은 캐릭터를 계속 찾아서 했다면 그 캐릭터에서 못 벗어나고 캐릭터를 재생산하면서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어떤 한 모습으로 규정지어지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밖으로 보여지는 이미지 말고 내 안에는 다양한 내가 있잖아요, 그걸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걸음걸이, 말투를 디자인해서 자꾸 시도도 해보고 그러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맞다. 영화 담당 기자라는 직업이 배우마다 지닌 정체성, 그들의 색깔과 개성을 읽으려 하고 현 시대에 그 배우가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이며 대중이 왜 그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해서 숱한 배우를 가슴에 품고 염두에 두고 산다. 하물며 배우 정우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 리 만무다. 손에 딱 잡히게, 한 줄기로 선명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뭘까 생각하다 다다른 개인적 결론. 정우성은 배우 정우성의 이미지 구축, '이런 역엔 정우성이 최고야'라는 간판 이미지 만들기에 몰두하지 않는다. 나이 들어가는 우리 곁에 머물며, 나이 들고 있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배역과 영화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간다.
봄여름가을겨울 한강이 우리 곁을 흐르듯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 있는 배우. 규정하고 특정할 수 있는 것만이 정체성은 아니지 않을까. 우연찮게 찾아온 손님으로 정우성을 만나 아직은 무명인 후배 배우들과 영화에 대해, 배우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누는 모습을 보고 들은 적이 있다. 보다 좋은 배역, 보다 좋은 영화를 위해 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정우성을 보았다.
"직업적 특성이 하나의 이미지에 연연할 수도 있어요. 연연하면 미련해집니다. 한 작품, 한 이미지에 매이지 않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에 맞게끔, 그것은 어쩌면 직업적 전략과는 거리가 먼 인생 안에서의 순리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생각이 저의 직업적 가치관 안에 자연스럽게 내포돼 버린 것 같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인터뷰가 끝나기 전에 들어야 했다. 어떤 이유에서 '증인'이라는 선택을 결정했나요?
"시나리오가 내포하고 있는 걸 강요하지 않고 소소하게 표현하고 있더라고요, 근데 그 소소함의 여운이 길고. 배우 정우성으로서는 지난 몇 년간 드센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나도 모르는 피로도가 있을 수 있는데 '증인'은 맘을 툭 놓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영화예요. 그런 요소도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정우성의 감정에 도취돼서 어느 정도의 선을 표현했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돼요. 3자의 입장에서 감정을 교감할 때, 표현한 사람은 모르는 그 감정의 온도를 관객이 느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3자로서 이 영화를 보면 아버지와 지우의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요. 순호를 보면 가능한 담담하게 느끼려 노력하잖아요. 그래야 관객이 그 여백에서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충만히 다 표현해야지, 라는 생각을 경계했어요."
그렇다. '증인'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인'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때로 감동으로, 때로 자기반성으로, 때로 따뜻한 웃음으로. 정우성도 김향기도 박근형도 그 외 다른 모든 배우들이 충분히 과장할 수 있는 캐릭터를 결코 과하지 않게 연기한 덕분이다.
정우성의 이 답을 들으며 느낀 재미있는 지점을 잘 설명해 보고 싶다. 내포한 걸 강요하지 않는 작품이 좋아서도 출연을 결정했지만, 스스로도 모르게 쌓인 센 역할들의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배우 정우성을 위해서도 '증인'을 선택했다, 까지는 명확하다.
그 다음 얘기엔 배우 정우성과 자연인 정우성이 혼재해 있다. 양순호를 표현함에 있어 정우성의 감정에 도취돼서는 안 된다. 배우 정우성을 위해 선택한 부분도 잊어야 하고, 자연인 정우성에게 유독 크게 다가오는 아버지와 아들 부분의 감정에 대한 치우침도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양순호와 제3자의 입장에서 교감해야 하는 이유는 표현하는 배우가 먼저 도취돼 버리면 관객이 양순호에게 느낄 감정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양순호가 사람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다가오는 자극과 감정과 고난들을 담담히 느끼려 노력하듯 배우 정우성도 표현에 여백을 남겨야 관객이 양순호와 교감할 수 있다. 심지어 표현한 정우성도 모르는 감정의 온도를 관객이 느낄 수 있다. 그러한 3자 입장 교감의 결과, 자연인 정우성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감정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낭패다. 글로 옮기고 보니 더 복잡하기만 하다.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극중 인물에 제3자로서 다가가고 표현하는 과정, 그리고 자연인 배우가 다시 그 인물이 나오는 영화를 제3자로 관람하는 일을 잠시 엿본 순간을 전달하고 싶었던 욕심쯤으로 양해해 주시면 좋겠다.
'증인'의 결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이 있는 이한 감독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전에는 (이한 감독) 작품을 보면서 작은 일상에 숨어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다루는 분, 강요하지 않으면서 공유해 내는 분이구나 했는데. 작업해 보니 워낙의 심성이 따뜻한 관계를 맺는 분, 따뜻한 관계를 사랑하는 분이더라고요. 많은 감독들이 장르영화를 시도해 보려 하지만 이한 감독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 자신이 바라는 것을 영화로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깨끗하고 멋지더라고요. 바로 그 부분을 앞으로 특화된 장르로 밀고나가도 멋질 것 같아요."
영화 '극한직업'이 1378만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증인'은 개봉 후 사흘 동안 30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보다 큰 사랑이 필요하다. 이번 주말 우리가 영화 '증인'을 보면 좋은 이유, 정우성의 입을 통해 들어볼까.
"여러분들 많이 지치셨잖아요. 워낙 많은 뉴스들이 매일 나오고, 걱정과 불안에 싸인 소식들이 과하게 전달되고 있고요. 제가 시나리오를 읽고 숨을 휴우 내쉬었어요. 시나리오 하나만으로도 내가 치료가 된 느낌이었죠. 극약 처방의 치유제가 될 순 없어도 쉬고, 나를 돌아보고, 나를 보듬어 줄 수 있고, 주변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정의'가 일어날 수 있는 영화다 싶어요. 담담하지만 작은 울림이 아주 길게 가는 영화입니다."
KPI뉴스 / 홍종선 기자 dunastar@kpinews.kr/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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