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아름다움이 저들을 두렵게 하리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11-07 16:46:21
향기 없는 조선 난에 청향을 입히려던 원예학자의 죽음
단원 김홍도의 예술혼과 접목된 다른 두 문화의 융합
"K문화는 다른 이들이 마음을 연 것, 우리는 닫혀 있다"
생후 3개월 된 아이를 감싼 보드라운 옷에 생모는 난잎을 수놓았다. 어디에 가든지 난처럼 고결함을 잃지 말고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 아이는 독일 양부모 밑에서 양육됐고 원예학자가 되어 돌아와 생모를 찾았지만, 엄마는 '나는 난잎에 이미 베어졌다'는 편지만 보내고 나타나지 않았다.
박찬순 장편소설 '난잎에 베이다'(강)는 국산 원종 춘란에 향기를 입히려는 원예학자가 순혈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분투하다 살해당하는 미스터리를 축으로, 단원 김홍도의 예술혼과 더불어 우리 시대 문화의 편협함을 깨는 향기로 나아간다. 고결한 난잎이 칼이 되어 다가서는 예는 사무라이의 칼집에 새긴 난잎이나 우당 이회영이 난을 쳐 독립자금을 마련하면서 '난잎으로 칼을 얻다'고 말한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육종 전문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고향 쯤으로 인지한 낙동강 상류마을에 터를 잡고 '다윈 농장'을 운영하는 원예학자 '류포의' 소장은 은방울꽃의 독성으로 살해되었다. 류 소장이 한국에서 입양한 '세엽'과 '소심', 이들로부터 아버지의 미스터리를 밝혀달라는 청을 받은 소설의 중요한 화자인 서홍화가 서사를 끌고 나간다. 류 소장의 견해와는 대척점에서 순수한 조선 난의 혈통을 고수하는 원종 수호자들과의 갈등을 통해 작가는 한국사회의 편협한 순혈주의를 드러낸다.
아기 옷에 수놓인 난초 그림과 비슷한 김홍도의 '난향을 맡는 소녀'를 찾아 독일 수도원까지 소설의 무대는 확장된다. 공간 설정에서도 순혈주의를 해체하는 형식인 셈인데,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긴박하게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이미 난잎에 베어졌다'고 스스로 단죄하는 생모의 사연은 무엇일까. 한국 춘란에 입히려 한 '청향'(淸香)에는 어떤 죄가 있는가. 지구적 K문화 확산은 열렬히 반기면서, 정작 타문화의 유입에는 완강한 한국인들은 저 난초에 대한 순혈주의적 태도와 어떻게 같고 다를까.
이순의 나이에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와 소설을 써 온 전직 외화번역가 박찬순 씨. 그가 팔순을 목전에 두고 펴낸 첫 장편은 등단 전부터 구상해왔으니 최소 20여 년 이상 산통을 겪고 나온 셈이다. MBC 피디로도 일했던 그가 번역한 외화는 '맥가이버'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 1000여 편에 이른다. 생계를 위해 외화 번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주옥 같은 명대사를 번역하다가 엎드려 운 적도 많았다고 했다. 자신이 써야 하는데 옮기기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통상 60이 넘으면 은퇴할 나이라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그 나이에 새롭게 시작해 그동안 소설집 4권을 펴냈고, 이제 오래 품어온 장편까지 세상에 내놓았다. 지레 움츠러들어 포기하고 스스로 늙어버린 이들에게는 변명과 게으름을 내리치는 죽비인 셈이다.
- 이 장편을 구상하게 된 배경은?
"영문과를 다니던 대학 시절부터 두 문화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MBC PD 시절, 방한했던 '25시' 작가 게오르규와 한국 비구니 스님의 만남에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서양 작가는 합장을 하고 비구니는 성호를 긋던 퍼포먼스였다.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온전히 내주는 태도였다. 공교롭게도 서양 남자들과 결혼한 절친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들이 이쁜 사랑을 하는 걸 보면서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으로 꽃 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따지고 보면 이 장편은 아주 오래전부터 배태된 셈이다."
"우리 선대까지만 해도 난초는 고결한 인격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왔다. 우리 난에는 향기가 없다. 입양 갔다가 돌아온 원예학자가 우리 난에 청향을 입히려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타적인 데다 원종 사수파들이 워낙 강해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난초 명장을 찾아가 공부도 했다. 그들도 난초는 향기가 없어도 색깔과 잎이 다른 나라의 난초에 비해 우리 것이 훨씬 우수하고 청아하다고 믿고 있었다. 절대로 난초에 향을 입힐 필요조차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즈음에는 관변단체에서 소설 속 원예학자가 노력하는 것처럼 향을 연구하고 있지만, 향이 조금 입혀지면 잎과 꽃이 시원찮아져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붉은 꽃 세 송이가 핀 춘란을 향해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여 향기를 맡고 있는 소녀.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소녀는 허름한 검은색 통치마에 꼬질꼬질한 흰 저고리를 입고 맨발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세엽의 말대로 그녀는 그리움이 담뿍 담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휘어진 몇 가닥 이파리의 구도가 아기 옷이나 왕실 시전지의 문양과 똑같은 구십 도였다. 단원이 그린 '난향 소녀'는 오랜 세월 동안 주인이 바뀌면서 동서양을 이어주었고 돌고 돌아 마침내 베를린의 어느 박물관에 안착했다.'
-단원 김홍도가 일찍이 난에 향을 입히려던 화초 노비를 '난향을 맡는 소녀'로 그려냈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김홍도는 서양의 베르메르가 그랬듯 동양에서 보통 사람들을 부각시킨 시대의 선각자로 평가된다. 그가 난향을 입히려는 화초 노비 소녀를 그렸다는 설정을 통해 왕실 시전지의 난초 문양과 이를 보고 아기옷에 수를 놓은 생모와 이어지는 예술적 계보를 상정한 것이다. 김홍도는 중인 신세였던 자신의 설움을 바탕으로, 목부에서부터 소를 타고 가는 목동과 잔치판 '들병이'들까지 차별하지 않고 묘사한 큰 인물이었다. 그이라면 난에 향기를 입히려는 화초 노비를 당당하고 주체적인 대상으로 그려냈을 것이다."
-김홍도 그림을 찾아 소설 무대를 독일 수도원으로까지 넓혔다.
"장편을 위해 독일 취재를 두 번 다녀왔는데, 문화와 문화가 만날 때 내가 얼마나 열려 있느냐에 따라서 그들도 어느 정도 가슴을 여는지 절절하게 느꼈다. 지성인이 열린 마음이 되면 과연 '마법의 시간'이 오는구나 싶었다.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의 말처럼 '다른 두 세계의 융합에서 오는 이질성을 은은하고 청아한 난의 향기로 바꾸어내는' 그런 '마법'은 온전히 서로 가슴을 열었을 때 가능하다."
-K문화의 세계적인 인기에는 환호하면서도 정작 내부에서는 특정 국가 사람들을 혐오하기도 하고, 쉽사리 다른 문화의 유입을 수용하지 않는 현실이다.
"아직 멀었다. 한류라는 것도 사실 우리 말고 다른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금 지나치게 아직 열린 마음이 아니다. 자기 마음 한 구석을 열어서 정말 줘버려야 하고, 그 상대를 자기 가슴 속 한 구석에 받아들여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것 같다."
난잎이 칼처럼 수놓인 옷에 싸여 독일로 보내졌던 아이. 난잎에 베어졌던 그 아이가 식물을 교배하는 육종학자가 되어 고국에 돌아와 조선의 전통 난에 청향을 입히려다 스러진다는 설정은, 작금 한국인이 문화의 융합을 대하는 태도를 섬세하게 상징한다. 아이를 받아들여 소중하게 키운 독일인 양부는 "난잎이 수놓인 아기 옷에 살포시 싸인 그 작은 몸을 품에 안을 때, 미지의 세계에서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을 느꼈다"고 성장한 아들에게 말했다. 타문화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감지하는 자세와 감수성이야말로 이른바 글로벌 시대의 소중한 덕목일 터이다.
박찬순이 지향해온 소설 세계는 두 번째 소설집에 수록한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처럼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으면서도 아름다운 문장과 노래를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문득문득 느끼면서 사는 삶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과제 하나를 마친 느낌"이라면서 "이즈음 청년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삶의 방향과 현재의 조건들에 대한 새로운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잎에 베어진 아이가 생모의 나라에 돌아와 노트에 기록했던 첫 문장은 '아름다움이 저들을 두렵게 하리라'였다. 그것은 그가 모국에 돌아와 난초를 연구한 목표였다. 원예육종으로 잡종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모국의 산야를 더 아름답고 향기롭게 하겠다는 마음. '난향 소녀'가 눈을 맞춘다.
'맑고 고운 향기에 취해 입술이 살며시 벌어진 화초 소녀와 몇 가닥 가느다란 이파리들이 아련하게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순간 난향 소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눈을 맞추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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