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균의 금융경제 읽기] 스테이블코인이 요구하는 재정·통화·금융정책 역량
조홍균 객원논설위원
hongkyooncho@korea.ac.kr | 2025-12-24 11:17:41
문명사적 패러다임 대전환기 정책 역량 제고와 제도변화 긴요
스테이블코인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두 얼굴의 존재다. 혁신의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금융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적 불안 요인이기도 하다. 인간이 창조한 많은 구조물이 그러하듯 스테이블코인 역시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관건은 이를 다루는 인간의 정책 역량에 달려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재정정책, 통화정책, 금융정책이 동시에 맞물리는 영역이다. 이 세 정책을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상호 조화시키는 정책 역량이 중요하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일 정책당국의 명확한 전속 권한 아래 놓인 대상이 아니라 유관 정책당국의 동시적 권한(concurrent authority) 또는 불확정적 권한(uncertain authority)이 교차하는 영역에 속한다. 말하자면 스테이블코인은 정책의 여명지대(zone of twilight)에 있다.
이러한 여명지대에서 스테이블코인은 기회가 될 수도, 혼란의 진원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갈림길에서 요구되는 정책 역량은 무엇인가.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는 기조적으로 국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다. 주요 스테이블코인은 국채를 핵심 준비자산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국채의 신용은 곧 스테이블코인 시스템의 안정성을 규정한다. 이 점에서 재정정책은 디지털 금융 질서의 기초 체력이며 재정의 건전성은 그 질서의 안정 조건이 된다. 재정적자가 확대되면 국채 신뢰가 약화되고 국채 신뢰 약화는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 불안으로 전이된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신뢰 훼손과 환매 압력, 나아가 국채 시장의 불안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과 국채 시장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테이블코인이 재정규율 강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국채 수요층이 중장기적이고 비교적 보수적이었다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와 디지털 금융 생태계의 국채 투자자들은 변화에 훨씬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수요층일 개연성이 높다. 재정정책의 신뢰도는 이제 실시간으로 평가받는 환경에 들어섰다. 디지털화된 국채 수요 구조는 높은 변동성을 띠는 만큼 국가부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리 필요성은 오히려 더 커진다.
통화정책 측면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정책 재량을 확대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일반적으로 재정적자가 커지고 국가부채가 늘어날수록 통화정책이 재정에 의해 제약받는 상황이 생긴다. 이른바 재정지배(fiscal dominance)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이 국채 수요를 늘리고 국채 금리를 안정시키며 정부의 부채 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보다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다. 이는 통화지배(monetary dominance)의 복원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만 낙관은 금물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금융시장 변동성을 키울 소지도 있다. 시장의 동요 시 스테이블코인 환매가 급증하면 중앙은행의 시장 안정을 위한 개입 빈도는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재정지배는 약화될 수 있지만 금융지배(financial dominance)가 강화되는 역설적 상황이 나타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통화정책의 파급경로 또한 변화할 수 있는 만큼 기존 정책모형의 재검토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금융정책은 강한 규제보다는 정밀한 규제에 방점이 있다. 금융정책의 과제는 단면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리스크를 제어하면서 혁신을 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자 규율, 시장 인프라 규율, 사용자 보호를 포괄하는 입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 요건, 회계·공시·감사 투명성, 유동성 위험 관리, 발행자 거버넌스, 국경 간 규제 협력 등이 주요 과제로 포함된다.
금융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규제의 강도가 아니라 정밀도다. 거친 규제는 혁신을 질식시키고 느슨한 규제는 위기를 키운다. 그래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스마트한 규제야말로 금융정책 역량의 시험대다.
스테이블코인을 기회로 만들 것인가 혼란으로 만들 것인가는 결국 정책 간 조화에 달려 있다. 재정정책, 통화정책, 금융정책은 본래 상호 연결되어 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이 연결성을 한층 강화하는 촉매다. 스테이블코인은 결코 '공짜 점심'이 아니며 고도의 정책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역량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 정책 간의 조화는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재정지배, 통화지배, 금융지배의 렌즈로 바라볼 수 있다. 이상적인 정책 조합은 재정지배의 완화, 통화지배의 강화, 금융지배의 완화라는 삼각축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재정·통화·금융 세 정책의 삼각 조화는 기회와 혼란을 가르는 분기점이다. 결과적으로 통화지배의 시대를 복원하는 이 삼각축은 어느 하나의 정책당국이 단독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중앙은행이 구가할 수 있었던 통화지배의 시대는 상당 부분 행운과 함께 만들어진 상황에 힘입은 것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글로벌 경제는 우호적인 공급요인들로부터 혜택을 입고 있었다. 사회주의 체제에 있었던 개도국 경제의 글로벌 시장경제 시스템으로의 진입, 정보기술의 급속한 발전, 안정적인 지정학적 환경 등이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스테이블코인이 놓인 구조적 환경은 그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과거의 정책 프레임워크와 거버넌스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정책기구(apparatus)에 대한 포괄적인 리뷰가 필요하다. 이 리뷰는 정책결정과정, 시대변화에 맞지 않는 정책 프레임워크, 정책결정기구 구성원의 인식 다양성(cognitive diversity) 결여, 취약한 책임성 등을 포괄하여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이 요구하는 정책 조화는 선언과 수사(修辭)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를 견인할 수 있는 인센티브의 설계가 긴요하다.
인센티브 설계의 한 방향은 거버넌스의 개혁에서 단초를 모색할 수 있다. 통화지배의 시대와 대안정기(great moderation)를 비롯한 평화로운 패러다임에서 유효했던 거버넌스의 한계는 꾸준히 노정되어 왔다. 과거 일시적으로 누렸던 정책 성공의 영광은 상당 부분 행운에 힘입은 측면이 있고 정책 역량이 다소 충분치 않은 가운데도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 환경이 있었음을 겸허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하여 직면하고 있는 문명사적 패러다임 대전환기의 정책에 있어서는 정책 역량의 제고, 정책기구의 제도변화, 특히 거버넌스의 인센티브 구조 문제에 초점을 두는 제도변화와 이에 부응하는 정책을 통해 경제적 성과를 제고해 나갈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우리 시대의 당면 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진화하고 있는 정책 환경과 패러다임을 살피며 재정, 통화, 금융이 상호작용하는 정책의 여명지대에서 제도와 인센티브의 설계, 그리고 정책 거버넌스의 포괄적, 연계적 개혁을 모색할 수 있다. 재정, 통화, 금융을 제도와 운영의 관점에서 상호조화적으로 성찰하며 포괄적이고 연계적인 접근방법을 어떻게 모색해 나가야 할지 통찰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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