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란의 토닥토닥] 추석명절, 공부나 해라? 내 아이 책임 일깨우는 '성인식'의 기회
UPI뉴스
| 2019-09-05 11:09:18
팔월 한가위가 다가왔다. 주말이면 벌초하러 가는 차량으로 교통체증이 심하다. 추석은 농경사회에서 의례적인 세시풍속이었다. 친족 간에 만나는 소통의 장이기도 하다. 자녀에게 추석은 학교와 가정에서 주로 지냈던 생활반경을 넓혀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기억에 남을 덕담을 들을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성묘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자녀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여러 주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혹 입시를 앞두고 있거나 시험 기간이라서 자녀에게 명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공부나 하라'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면 자녀의 성장과정에 꼭 필요한 통과의례 하나를 놓칠 수도 있다. 명절을 구태여 정해서 만나고 먹거리를 나눠먹고 서로 예를 갖춰 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 고유의 명절을 달가워 하지 않고 설날, 단오 등의 명절과 세시풍속을 말살하려 한 까닭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마을과 가정마다 고유한 성정과 문화를 지키고 기운을 북돋우는 명절은 사람을 성장시키고 단합하게 하기 때문이다. 명절은 자녀에게 하나의 성인식처럼 통과의례를 배우게 하는 장이기도 하다.
성장기에는 여러 방면으로 성인식을 자기 나름대로 치르며 어른이 되어간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열 살이 넘은 자녀 특히 아들에게는 '성인식'을 치르게 하고 있다. 인디언과 바누아투 섬 원주민의 성인식, 유대인들의 성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번지점프를 하게 한다든가, 홀로 숲 속에서 일주일 살다 오기를 하게 한다든가 사냥을 홀로 하게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송로버섯으로 유명한 슬로베니아의 한 지역에서는 열댓 살이 되면 아들에게 숲에 가서 송로버섯 냄새를 맡고 찾아오라는 과제를 준다고 한다. 몇 시간이고 숲을 헤매면서 땅 속에 묻혀 있는 송로버섯의 내음을 구분하고 분간해 가는 훈련이다. 미국에 이민 온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해마다 리유니온데이(Reunion Day)를 가진다. 미국 각 지역에서 씨족(Clan)들이 모인다.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을 입고 전통음식을 해 나눠 먹고 노래를 부르며 며칠 동안 함께 지낸다. 불과 백여 년의 이민 역사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렇게 유지하며 심신을 새롭게 한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귀한 유산으로 여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 관례를 치렀다. 어른대접을 하면서 책임과 의무를 일깨우는 의식이다. 추석에 자녀가 친지들로부터 '많이 컸다.', '이제 어른 다 되었네.', '든든하겠어요.'라는 말 한 마디를 듣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추석 상차림, 인사, 덕담, 놀이 등은 자녀를 어른으로 만드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친척 중 누군가는 자녀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고 집안 행사를 돕게 한다. 자녀는 핵가족보다 더 큰 가족 내에서 자기 자리를 알게 되고 책임을 맡는 경험을 한다.
핵가족제도 아래에서 부모의 힘으로만 자녀에게 성인식을 치르게 해 주기는 어렵다. 자녀가 어느 나이에 이르면 부모의 말에 선선히 순종하기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려 한다. 이럴 때 추석 명절과 같은 기회를 통해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늠해보도록 해 주는 게 좋다. 농경사회에서 일 년에 24절기를 두어 때를 구별했던 것처럼 자녀의 삶도 절기마다 특별한 의미를 둘 행사나 모임을 가져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여학생은 초경이 시작될 때 반드시 기념하고 축하해주어 긍정적인 자존감을 갖게 한다. 가정에서는 보통 상급학교에 입학할 때를 기념해 보다 어른스러운 행동과 책임감을 강조한다.
필자의 큰 아이가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2학기 중간고사를 열흘 앞 둔 시기에 추석이 있었다. 중간고사를 대비해 공부할 기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했다. 큰아이를 직장 다니는 삼촌과 함께 집에 남겨 두고 나머지 가족만 지방으로 명절을 쇠러 떠났다. 명절 연휴 내내 공부에 전념하라고 하는 취지였다. 돌아와서 보니 별로 공부한 것도 없이 산만하게 지냈다고 한다. 자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한 일이 아니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말 중요한 집안 행사나 의례가 있어도 아이가 먼저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빠지는 일이 왕왕 생겼다. 가족들이 다 나가고 홀로 집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 듯했다. 부모인 내가 시험성적을 우선으로 강조한 탓이었다. 자녀 기르기는 그래서 어려운 듯하다. 뒤늦게 '성적'보다 '인성'이 중요하고 친지들을 자주 뵙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설득하기 어려웠다.
부모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자녀는 무섭게 꿰뚫고 있다. 말은 안하지만 부모가 형제를 비교하거나 남의 집 자식을 부러워하면서 평가하면 자녀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자녀는 부모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지 보고 듣고 배운다. 그러니 부모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늘 점검할 수밖에 없다. 살아가면서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감과 배려 등 인간적인 품격임을 절감한다. 그러나 성장기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스펙 쌓기에 노심초사하면서 열중할 때가 많다. '인성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들어온 부모 교육 지침이지만 어째서 마음이 뜻대로 안되고 성과를 먼저 생각하게 될까. 자녀가 따스한 인품과 공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부모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할 수밖에 없다.
추석에 동구 밖 커다란 후박나무 아래까지 나와서 기다리는 조부모님의 모습은 자녀의 기억에 아로새겨진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 사촌들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다보면 자녀의 정체성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뚜렷이 형성되어 간다. 코스모스 핀 신작로 길을 걸으며 함께 성묘하러 가는 추억, 집안 친척들이 모여 웃고 먹거리를 함께 만드는 기쁨 한 자락을 자녀에게 선사하면 어떨까.
박형란 청소년상담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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