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압박-피싱 사기로 자살, 업무상재해 인정
권라영
| 2018-08-19 10:15:02
실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영업사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업무상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업무 스트레스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점이 고려됐다.
19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유진현)는 고모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지난달 26일 "피고가 원고에게 한 처분을 취소한다"며 고씨의 손을 들어줬다.
고씨의 남편 최모씨는 A음료회사 영업사원으로 10년 넘게 근무해오다 지난 2014년 6월 한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 인근 공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공단은 "회사 영업형태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으나 업무상 만성적 스트레스나 급격한 업무환경의 변화가 확인되지 않고, 금전적 손실이나 보이스피싱 사기 피해 등으로 경제적 압박이 심해져 자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최씨 사망과 업무 사이의 관련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공단이 유족급여 등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하자 고씨는 소송을 제기했다.
최씨는 사망한 채 발견되기 4일 전 200만원의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다. 그러나 이는 최씨가 회사에 입금해야 하는 미수금을 해결하기 위해 사비를 동원하거나 대부업체,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는 등 업무 관련 압박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최씨와 동료들은 월말 목표치 달성 압박에 시달리자 실제 판매하지 않은 물품을 판매한 것처럼 회사에 보고하고 그 대금은 미수금으로 처리했다. 서류상 판매 처리된 물품은 도매상에 헐값에 판매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차액은 영업사원이 채워 넣어야 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최씨는 지인과 대부업체 등에서 돈을 빌리게 됐다.
2014년 5월 29일 오후 최씨는 지인에게서 200만원을 빌려 대부업체 대출금을 갚았다. 한 시간여 뒤 판매대금 200만원이 들어오자 최씨는 이미 대출금을 갚은 것을 잊고 이 돈을 다시 대부업체에 보냈다가 바로 돌려받았다. 그러나 몇 분 뒤 해당 대부업체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문자 메시지를 받고는 200만원을 다시 보냈다. 최씨는 이 문자가 보이스피싱이었다는 것을 몇 시간 뒤에야 알아챘다.
최씨는 4일 뒤 차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고씨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남편은 사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업무와 재해 사이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도 증명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업무로 유발·악화된 질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인식,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결여되거나 현저히 저하돼 합리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서 근로자가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추단할 수 있을 때에는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KPI뉴스 / 권라영 기자 ry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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