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우리는 모두 성 밖을 떠도는 난민입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6-03-06 17:43:31
카프카 '성' 모티프로 다양한 층위 'K'들 그려내
우리는 모두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라는 위로
"세상을 냉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자가 고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그 주변만 맴도는 부조리한 소설 속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카프카의 K…… 그 이름을 나 자신에게 부여하고 나니, 소설에 그런 기능이 있나 싶도록, 덜 외로웠다. 성에 들어가는 것과 그 주위를 맴돌며 그 안을 꿈꾸고 상상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성을 잘 아는 것일까.' _ '세상의 모든 K'
우리는 사실 모두 난민이라는 말은 역설적인 위로로 다가온다. 정치적 난민은 물론 경제적 난민, 이념적 난민, 정서적 난민…. 난민이라는 말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궁극에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존재론적 난민에까지 이르면, 우리는 모두 난민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표명희의 다섯 번째 소설집 '세상의 모든 K'(강)은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혹은 쟁취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위무하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다. 이 단편들 속 인물들은 냉소적이면서도, 기이한 로맨스를 꿈꾸지만 뜨겁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들이 좌절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유혹에 자발적으로 이끌리고 성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도 포기하지 않는다. 냉소하되 거부하지 않는 고수들이다.
카프카의 미완성 장편 '성(城)'에서 측량사 K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 존재 전부를 소진하지만 끝내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 표명희의 인물들도 각자의 '성'을 갈망한다. 표제작 '세상의 모든 K'에서 '나'는 유복한 친구들의 유럽 유학과 결혼을 곁에서 지켜보며 골프장 견습 도우미로 가족을 부양한다. 오십 대가 되어서야 독일을 찾지만, 오랫동안 꿈속에서 성처럼 건재하던 카라얀(수진의 시동생)을 끝내 만나지 못한다. '나'는 '손에 땀이 나게 쥐고 있던 바통조차 이제는 놓아야 할 때'라며 열차에 오른다. 성 밖을 맴돌던 무수한 K들과 함께.
'파라다이스 시티 역'의 지훈은 서울 달동네의 낡은 고시원에서 코로나로 유령도시가 된 파라다이스 시티 역 인근 오피스텔로 이동한다. '미래 도시', '타임머신', '낯선 행성' 같은 지훈의 표현은 이 공간을 비현실적으로 체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황제 김밥을 건넸던 고시원 33호 아저씨와 소주잔을 주고받던 온기가 그리워 허공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적막에 빠진다. 지훈에게 온기가 있는 '집'이란 완성하고 성취하고 싶은 '성'이다.
'갭'의 수민은 항공사 승무원으로, 건설사 부도로 소유권이 신탁회사에 넘어간 미분양 아파트를 시세의 절반 가격에 임차한다. 위층 603호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단란한 가정을 연상시키지만, 경비실의 답변은 '빈집'이다. 비상계단을 올라간 수민이 목도하는 것은 복도를 가득 메운 종이 박스 바리케이드. 문서상으로는 땅 없이 건물만 있는 집에서, 결혼 7년째 아기를 갖지 못하고 상상임신을 반복하는 수민의 불안은 성의 실체가 비어 있음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민이 올려다보는 아파트의 떨리는 불빛들은 성이 되지 못한 작은 존재들의 풍경이다.
성 밖을 부유하는 '난민'의 정체성은 '하비'에 전형적으로 압축돼 있다. 인천 공항 근처 난민 캠프를 배경으로 여러 난민들의 사연을 엮어낸 권정생문학상 수상작 '어느날 난민'(2018)으로 선구적으로 제기했던 문제의식을 보편적으로 확장한 단편이다. 빚에 쫓긴 경제적 난민으로 부다페스트의 오래된 건물로 피신한 민수가 난민의 보통명사 '하비'로 불리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난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영종도로 이사 가서 10여 년 살았는데 그곳에서 난민센터를 건립하는 움직임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됐다. 등단 이후 문단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저에게도 조금 난민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이사 간 공간은 작가로서도 약간 유배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난민센터 이슈와 접합점이 있어서 더 쏠리게 됐던 것 같다. 당시는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난민 이슈가 부각되기 전이었다. 소설이 나온 뒤 제주 예멘 난민 정착 문제가 부각되면서 관심을 받게 된 것 같다."-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유하는 세상의 모든 'K'들도 난민인가.
"제 소설의 K는 모두 일반적인 사람이다. 성이라는 곳에 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성 밖에 있는 존재들이 거의 99퍼센트라고 생각한다. 동경하지만 결국은 다 똑같이 성 밖에서 서로 연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이다.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의 상징이기도 한데, 살아서 도달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 착각을 일깨워주면서 나 역시 'K'라는 사실을 위로받고 싶었다."
-'성'(城)의 본질은 무엇일까.
"오아시스이지만 신기루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곳을 꿈꾸면서 사람들은 사막 같은 현실을 견디며 살아간다. 성에 들어섰다는 성취감으로 오아시스를 접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평생 그 주위를 맴돌다가 성이란 결국 스스로의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의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구하고 열망하는 이들에게 성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 의미가 크다고 본다."
-우리는 모두 'K'라는 사실은 어떤 위로를 건네는가.
"나만 못 들어가고 있다는 자괴감을 갖기보다는 이렇게 많은 캐릭터들이 바깥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그것은 '연대'라기보다 결국 모두 착각을 하면서 '성'에 대한 환상을 쌓았던 것들에 대한 깨달음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조금 덜 외롭고, 덜 박탈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이번 소설집에 수록한 단편들의 공통점이라면?
"책 뒤에 김종광 소설가가 표현한 것처럼 조금 '기이한' 로맨스들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결혼 생활이 안정적이지 않은데, 로맨스가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소설에 남녀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이 독립된 가족을 정상적으로 이루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환상의 본질은 사실 로맨스일 것이다. '성'은 권력이나 돈으로 상징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로맨스라는 생각이다."
'내 아내가 끝까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을 거 같지는 않소. 이혼 때 분할했던 재산을 고스란히 반납한 건 바로 '당신이 이룬 게 사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더라.' 그런 뜻 아니겠소. 나를 크게 한 방 먹이고 간 거지. 그러니 내 일생이 칩을 좇아 카지노에서 밤을 밝힌 거랑 뭐가 다르겠소. 한평생 유령을 좇아 살았던 거지.' _ '고수들'
소설집 말미 단편에 등장하는 노인의 회상이다. 카지노 판에서 칩을 따기 위해 분투해 온 듯한 삶, 그 노력을 묵묵히 지지해 왔다고 믿었던 아내가 어느 날 이혼을 요구했다. 남자는 군말 없이 여자가 요구하는 위자료를 모두 주고 쿨하게 헤어졌는데, 아내가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위자료를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돌려주었다. 남자는 그 돈을 카지노에서 탕진했다.
-'고수'의 기준은?
"세상을 냉소하면서도 자기 스타일대로 사는 것이다. 냉소적 낙관주의자인 셈이다. 인생을 조금 알게 되면 적당히 냉소가 생기지만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냉소하면서 그냥 버리거나 비관하면 그건 무의미하다. 요즘 같으면 작가들도 냉소가 많이 생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나는 내 글을 쓴다, 이런 식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AI 시대의 도래와 일자리의 변화, 그 속에서 개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구한 '잠재적 이웃'까지 모두 6편을 수록했다. 다음 작업으로 난민 문제를 한민족의 역사에 대입한 장편을 구상 중이다. 기존의 역사 소설과는 다른 형식을 모색하고 있다는 귀띔이다. 표명희는 소설집 말미 '작가의 말'에 "한 계절을 보내고 다음 계절을 맞는 농부처럼 담담하다"고 썼지만, 뒤늦게 도착한 그의 소감은 온도가 달랐다. 성 밖을 맴도는 작가 'K'의 열망은 여전히 뜨거웠다.
'덤덤 혹은 담담하다는 말이 혹 냉소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 제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부모의 자식을 향한 거의 맹목적 애정에 가깝습니다. 큰 기대보다는 팍팍한 세상에서 어린 자식이 무탈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소박하면서도 연민 어린 시선입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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