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축출' 김옥균 프로젝트? 역사 살펴보니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4-07-26 11:07:14
與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에서 떠돈 김옥균 프로젝트 풍설
갑신정변 계기로 총애받는 신하→역적…암살위협에 시달려
김옥균 피살에 자축하는 동안 조선 왕조는 무너져 내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친윤계의 집요한 견제와 협박에도 결국 당권 경쟁에서 승리했다. 한 대표는 지난 24일 신임 지도부 초청 대통령실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만나 손을 맞잡았다.
윤 대통령은 "한 대표를 많이 도와주라"고 참석자들에게 당부했고 한 대표는 "대통령 중심으로 뭉치자"고 화답했다. 최고 권력자와 2인자가 화합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비쳤다.
그간 두 사람은 김건희 여사 문제 등을 놓고 회복 불가 수준으로 관계가 나빠졌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7·23 전당대회에 원희룡 후보가 돌연 출마하고 친윤계가 전폭 지원한 건 '윤심'(윤 대통령 의중) 영향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옛일을 잊고 한 대표와 앞으로 동행할 수 있을까. 결별은 파국이라는 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러나 격노 잘하는 '성정'에다 권력 속성상 판을 엎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대표가 62.84%의 압승으로 취임했는데도 전대에서 떠돌던 '유령'이 소환되는 이유다.
이름하여 '김옥균 프로젝트'. 한동훈 후보가 당선되면 친윤계가 조기에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려,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개입으로 삼일천하에 그친 김옥균처럼 만들 것이라는 풍설이었다. 관련자로 지목된 친윤계 핵심 이철규 의원은 지난 15일 "소설"이라며 풍설 유포자 등을 경찰에 고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혹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의 눈 밖에 난 여권 인사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과 갈등했다가 현 정부 출범 직후 국민의힘 대표에서 쫓겨났다. 여당 대표로서 초유의 중징계를 받았는데, 친윤계의 조직적 퇴출 작업 때문이었다.
지난해 3·8 전대에선 안철수 의원이 친윤계와 대통령실의 공격을 받은 끝에 낙선했다. 원외이던 나경원 후보는 '김기현 대표 만들기'에 앞장선 친윤계의 연판장 등 압박에 출마 뜻을 접어야 했다.
전례를 보면 윤 대통령과 두 번이나 충돌했던 한 대표와 관련해 김옥균 프로젝트 풍설이 떠돈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불화 원인이 김 여사 관련 사안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의원은 지난 19일 "한 후보가 대표가 되면 윤 대통령이 축하 난 같은 걸 보내주고 일주일 있다가 (축출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21일 "이 프로젝트가 작동한다면 여권은 완전히 궤멸할 것"이라며 "그 정도로 정무적 판단들이 없겠나"라고 반문했다.
풍설의 현실화 여부는 지켜봐야겠지만 이와 별개로 김옥균과 그 대척점에 있던 고종‧명성황후의 엇갈린 관계를 되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검찰 시절 윤 대통령 '복심', '분신'으로 불린 한 대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옥균이 고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다정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신정변으로 김옥균과 고종의 관계는 파탄났다.
이제 고종에게 김옥균은 왕권을 위협한 역적의 수괴였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김옥균 일가를 비롯한 정변 주동자들의 가문엔 처형, 독살 등 피바람이 몰아쳤다.
명성황후에게도 김옥균은 용서할 수 없는 인사였다. 갑신정변 세력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 정권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집안사람인 민태호, 민영목을 처단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가 특히 총애한 민영익은 갑신정변 때 칼을 맞고 죽을 뻔하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1885년 오사카 사건으로 김옥균과 고종 측의 관계는 더 악화됐다. 일본의 자유민권운동 세력 일부가 '조선 정부 요인 살해를 통한 민씨 척족 정권 전복' 음모를 꾸민 사건인데, 김옥균이 동의한 일이 아니었지만 고종 측에선 이를 김옥균이 관련된 음모로 받아들였다.
김옥균을 보내라는 요구에 일본이 응하지 않자, 조선 정부는 자객을 보냈다. 그중 한 명이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의 형이자 조선인 최초로 고종의 사진을 찍은 지운영이다. 하지만 1886년 지운영은 김옥균 암살에 성공하기는커녕 고종이 내린 암살 관련 문서까지 뺏겼다.
김옥균은 암살 시도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민씨 척족 세력을 그대로 두면 고종이 "망국의 군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작심하고 치받은 격인데, 이 내용이 일본 신문에 보도까지 됐으니 고종과 명성황후의 심기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김옥균은 결국 1894년 음력 2월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춘향전', '심청전'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홍종우에게 암살을 사주한 사람은 민씨 척족의 일원인 병조판서 민영소가 파견한 이일직이었다.
김옥균 제거 소식에 조선 정부는 환호했다. 음력 3월 홍종우가 김옥균 시신을 가지고 귀국하자, 김옥균을 능지처참하라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리는 극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고종은 윤허했다. 또한 나라의 큰 경사라며 종묘에 고하고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음력 4월 27일에는 김옥균에 대한 능지처사로 "귀신과 사람의 분이 풀렸다"며 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염원하던 김옥균 제거를 자축하는 동안 왕조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잘못된 정치를 참다못해 들고일어난 동학농민군이 음력 4월 전라도 고부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연파하고 북상 중이었다. 이를 진압하고자 고종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것을 계기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로 전락하고, 경복궁은 일본군에게 점령된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과 관련해, 왕권 유지에 집착하며 근본적 개혁과 거리가 먼 통치를 한 고종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명성황후도 한몫했다. 민씨 척족 정권의 폐해에 더해 진령군이라는 무당이 발호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옥균과 고종‧명성황후의 관계는 한 대표와 윤 대통령 부부의 상황과 물론 다르다. 그렇지만 오늘날 참조할 만한 대목이 없는 건 아니다. 그중 하나는 김옥균 제거 같은 지배층 내부의 권력 투쟁에 매몰된 채 피지배층의 고통을 가중시키면, 권력을 온전히 유지하기는커녕 동학농민전쟁 같은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맞은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려 또 다른 불장난을 한다면, 국가와 사회 전체를 불구덩이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1894년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결국 조선 전체가 청일전쟁의 아수라장이 됐던 것처럼 말이다.
KPI뉴스 / 김덕련 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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