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열의 AI경제] 노동의 가격이 제로가 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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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kpinews.kr | 2026-03-19 09:51:02

먹고 살기 위한 '경제적 노동'은 곧 사라질 것이란 선각자들의 예언이 줄을 잇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전설적 투자자인 비노드 코슬라는 "지금 5살 아이들은 15년 뒤 생계를 위해 직업을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2년 썬마이크로시스템스를 공동 창업한 후, 40여 년 간 오픈AI 등 유니콘 벤처에 발 빠르게 투자하며 명성을 쌓은 70대 초반의 이 원로 과학자는 "2034~2038년 모든 일자리의 80%가 AI로 대체될 전망"이라며 "모든 전문 지식과 모든 노동은 무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AI가 노동을 대체한 미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로봇 생산과 인간의 여가가 대비된다. [챗GPT 생성]

 

'노동의 종말(End of Work)'은 인공지능(AI)의 초(超)생산 효과 때문이다. AI가 인간의 정신노동을 대신하는데 이어, 피지컬 AI는 육체적 노동까지 대체하고 있다. 법률, 재무, 과학기술 같은 전문적 지식의 서비스(용역) 제공은 머지않아 공짜가 될 전망이다. 지식의 가격이 제로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AI 로봇은 공장과 생산현장에서 인간 노동자보다 훨씬 높은 생산성으로 제품을 만들어낼 예정이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제가 20세기 풍요의 사회를 이끌었듯, 풍요를 넘어 공짜에 가까운 물건이 쏟아질 것이다. 상품의 가격도 제로에 수렴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경제적 동기로 일을 해야 하는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치 SF영화 속 허구처럼 들리지만, 노동 종말론은 진지한 학자들 사이의 학술적 화두로 점차 무게를 얻고 있다. 인류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과 일의 관계 대전환이다.


사실 노동 종말론은 낙관적인 경제학자와 과학자들 사이에서 제법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가장 유명한 주장은 1930년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에세이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100년 뒤 인간은 주 15시간만 일할 것"이라는 자동화 사회의 예고다. 이어 1995년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란 저서에서 자동화가 인간 노동을 체계적으로 대체하면서 '시장 노동'은 줄어들고 공동체 활동 중심사회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노동이 줄어드는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적 임금(social wage)과 공동체 기반의 제3섹터 경제를 제안했다. 그리고 2014년 출간한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는 공유경제와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주창했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 알파고와 2022년 챗GPT 같은 AI의 본격 등장 이후, 주로 실리콘밸리 기술자들이 인간의 모든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AGI) 달성 시 노동 자체가 필요 없는 '포스트워크(post-work) 사회'로 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이전의 노동 자동화와는 차원이 다르게 AI가 아예 인간의 일 자체를 없앨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노동 총량의 오류(Lump of Work Fallacy)'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하나의 경제 시스템 안에 정해진 개수의 일자리가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란 것이다. 기술이 기존 일자리를 없애도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직업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농업이 공업으로 바뀌며 공장 노동자가 출현했고, 오프라인이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IT 직업군이 생겼다는 역사적 증거를 든다. 특히, 노동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인간 욕구의 탄생 △새 욕구에 맞춘 새 산업 등장 △창의적 노동의 자동화 불가 등의 이유로 노동이 계속 필요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들은 AI 시대에도 돌봄 노동, 창의 산업, 인간 서비스는 오히려 확대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강조한다. 과연 누구 말이 맞을까. 노동은 사라질까, 무한히 존속할까.

유사 이래 인간이 거래 대상으로 삼는 희소자원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해왔다. 당장 오늘내일 먹을거리가 귀했던 고대와 중세 시대는 농축산물의 1차 산업 제품을 더 많이 획득할 토지, 농노 등 농업생산 자원이 희소자원이었다. 그래서 더 넓은 땅과 더 많은 일손을 찾아 전쟁과 시장 개척이 일어났다. 그러나 비료와 종자개량 같은 농업혁명으로 먹을거리가 한계비용 제로에 가깝게 무한 공급되자 농업 자원은 더 이상 희소하지 않게 됐다. 시장에는 늘 식품이 넘쳤고 사람들은 엄청나게 싼 비용으로 먹는 욕망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농업 종사자는 대폭 감소했다. 

 

이 공식이 산업혁명에도 적용됐다. 원래 칼, 쟁기, 장식품 등 물건은 언제나 품귀 상태였다. 갖고 싶은 사람의 수에 비해 수공업 장인의 공급량은 늘 모자랐다. 이게 증기기관, 전기 등 에너지 혁명과 공업 혁명에 의해 완전히 뒤집힌 것이 19세기 산업혁명이다. 농부였다가 도시 노동자로 옮겨온 인력은 컨베이어벨트의 대량생산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물건, 즉 공산품을 쏟아냈다. 집집마다 차 1대, 냉장고와 TV를 보유한 3대 신기(神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건은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한두 번 쓰고 버리는 패스트 다이소 용품과 패스트 유니클로 패션이 범람했다. 1회용품이 시장의 주류가 되자 수리가게는 사라졌다. 고쳐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냥 다음 물건으로 갈아타면 되니까. 여기까지는 인류가 경험한 농업혁명, 공업혁명의 요약이다.

지식혁명이란 말은 1970년대 다니엘 벨과 앨빈 토플러 같은 1세대 미래학자가 처음 쓰기 시작했다. 탈산업사회와 지식경제로의 이행을 지칭한 말이다. 처음에는 '지식=돈'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지식이 유일한 희소자원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AI의 출현으로 또 한 번 뒤집혔다. 이제 지식은 거의 무료에 근접하고 있다. 수십만 원하던 백과사전은 공짜 인터넷사전 때문에 문을 닫았다. 위키피디아 웹이나 퍼플렉시티 앱 검색뿐 아니다. 법률가와 의사의 전문 지식 서비스도 한계비용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 창립자인 닉 보스트롬은 "최신 AI 모델이 고학력 인력자산의 가치를 갉아먹고 있다"면서 "결국 모든 직업은 기계로 대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인간이 경제적 노동을 하지 않는 완전실업이 달성되면 기본소득이나 자본수입 등 다른 수입원이 필요해진다"며 "노동을 '자아정체성'으로 삼던 문화를 밑바닥부터 재정의해야 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식량, 상품에 이어 지식마저 거의 공짜가 되면 사회는 무엇에 가치를 부여할까. 또, 기존의 희소자원을 모두 AI가 대량 생산하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노동이 사라진 인류의 삶에 남는 것들을 몇 가지 예측해볼 수 있다.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이 그것이다. 모두 1인 예술가, 1인 과학자, 1인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흡사 노예 노동으로 모든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고 올림피아드에서 신체를 단련하거나, 아테네 학당에서 공부만 하던 고대 그리스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가상 체험과 현실 체험의 양극화이다. 아날로그 현실은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는 소수를 위한 희귀재로 변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쉽고 값싸고 그저 그런 만족만 제공하는 가상현실 속에 빠져 살게 될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가 예고한 미래의 암흑사회이다. 체험과 공감은 비싼 사치재가 된다.

칼 마르크스는 1848년에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세상에 내놓으며 막 출현한 산업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거의 2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가 규정한 노동의 정의가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해체되고 탈산업 정보사회, 지능사회로 이행하면서 고전적 노동은 사라지고 있다. 땀 흘리고 머리를 쥐어짜는 고된 일은 모두 AI에게 맡기면 된다. 인간은 몸으로 체험하는 스포츠나 다른 오락에 열중할 것이다. 마음으로 느끼는 예술과 철학 공부에 몰두할 것이다. 체험과 공감이 희소재가 되면 그 생산자가 부를 독점하게 된다. 체험 팔이 SNS 인플루언서와 감각 장인 예술가, 스포츠 스타들이 1인 셀럽 기업으로 고액납세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지금, 노동 종말사회의 예고편은 이미 상영 중이다.

과연 즐겁게 놀기만 하는 21세기 에덴동산은 실현될 것인가. 체험과 공감 노동은 사회의 부와 권력을 어떻게 재편하며, 새로운 윤리와 제도를 창조해나갈 것인가. 미래 사회학의 한 분야로 연구해볼만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 노성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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