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일지 모른다는 詩의 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4-04-05 16:50:43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시집 뒤표지 '시의 말' 모은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평범한 이들의 삶 복원…세계 독자들이 함께 읽는 시인선"
'지금까지도 그 유습이 남아 있지만, 시집은 대개 자비 출판하여, 아는 사람들끼리 나눠 보고, 성대한 그러나 의례적인 출판 기념회를 갖는 회로 속에 갇혀 있었는데, 민음사의 기획은 그 회로를 과감하게 깨뜨린 문학적 사건이다. 그 이후 창비 시선, 문지 시선 등이 발간되어, 시의 유통 회로의 수정을 도왔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한국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시의 시대'를 맞게 된 계기를 두고 '문학적 사건'이라고 평했다.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 시리즈 발간(1974년)과 대중적 호응은 이듬해 1975년 창비시선으로 이어졌다. 다시 1978년에는 문지시인선으로 열기가 전달돼 이후 50여 년이 흐름 지금 창비는 500호를, 문지는 600호를 내기에 이르렀다.
창비시선은 신경림의 '농무'를 첫 시집으로 내놓았고, 문지는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첫 호로 내세웠다. 이후 꾸준히 이어온 시집들은 70~80년대의 엄혹한 정치 지형 속에서는 대체로 차별화되는 빛깔을 지녔지만, 동구권 붕괴와 민주화 시대로 변화된 환경에서 2000년대 이후 시집들은 다양한 감성과 언어들이 지배하는 시기로 이어져왔다. 해외 문단에서도 부러워하는 이례적인 한국 시의 대중적 호응과 활발한 시집 출판 환경을 돌아보고 가늠해볼 계기가 두 출판사가 각각 기념호를 내면서 마련됐다.
창비에서 500호 기념 시집 두 권을 출간하면서 먼저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젊은 시인 안희연 황인찬이 창비시선 400번대 시집에서 고른 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400번대 시인들이 창비시선 전체에서 선정한 애송시를 추천받아 펴낸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이 그것이다.
이날 간담회에서 창비시선 100번대부터 추천과 편집에 참여했던 김사인 시인은 "백석이나 미당의 시집들은 자비로 펴낸 100부 한정판이었고 조선 반도 전체를 통틀어서 시인 노릇을 하던 사람들 숫자가 100명 안 되던 그런 시절이 엊그제까지의 일이었다"면서 "이런 식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어가면서 500권 600권까지 이어지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거의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창비시선은 평범한 이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뜻을 두었다고 부연했다.
"해방 이후 좌우 대립과 6·25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 문학사에서 주눅들고 실종되다시피 했던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과 탐구와 발언을 복원시키고자 했던 것이 창비시선의 큰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창비시선 이전 한국 시의 주류는 60년대에는 뭔가 전원적 음풍농월의 시대, 목가적인 그런 서정시들을 떠올리면 될 겁니다. 한편에서는 모던을 지향하는 말할 수 없이 난해한 난삽한 시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라는 건 굉장히 어려운 어떤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그런 대체적인 흐름이었습니다. 6·25에 주눅든 나머지 현실 역사 이런 것에 대한 발언은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평범한 다수의 이웃들, 나날의 삶 속에서 일을 해가면서 하루하루 세상을 견뎌가는 다수의 평범한 이웃들에게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시인, 그이들과 함께 읽고 함께 누릴 수 있는 시인, 그리고 그이들의 나날의 삶의 실감에 근거한 어떤 지적 감수성, 이런 것의 복원을 시도했던 것이 창비시선의 뜻이었다고 봅니다."
문학과지성사는 문지시인선 600호 기념으로 500번대 시집 뒤표지의 글을 모아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를 펴내면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문지시인선 특징 중 하나인 시집 뒤표지 글은 통상 안쪽에 실린 내용을 발췌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시인의 마무리 발언 형식으로 구성돼왔다. 이를 두고 이원 시인은 '시의 말'이라고 명명했거니와, 다양한 편편의 말들은 시라는 형식과 그 본질을 다시 되새기게 만드는 흥미로운 목록이다. 이 기념호의 표제는 허수경 시인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무렵 펴낸 문지시인선 309번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뒤표지 글에서 착안했다.
'어떤 이는 말[言]을 부리고 어떤 이는 말과 놀고 어떤 이는 말을 지어 아프고 어떤 이는 말과 더불어 평화스럽다. 말은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고 말은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가곤 했다. 더운 말 차가운 말, 꿈과 불과 어둠과 전쟁의 말. …거대정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여, 말이 그대를 불러 평화하기를, 그리고 그 평화 앞에서 사람이라는 인종이 제 종(種)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이날 간담회에서 이광호(문학평론가)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문지시인선 500번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젊은 여성 시인들의 엄청난 약진"이라며 "1970년대는 남성 대 여성 비율이 8대1이었는데 2020년 이후에는 여성시인(35명)이 남성 시인(24명)보다 더 많은 역전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최근 문지시인선이 해외에서 번역돼 각광받는 흐름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꼽았다. 지금까지 해외에서 번역된 문지시인선의 시인은 32명, 번역 시집은 86권을 헤아린다.
"사실 한국 시문학은 세계 무대에 나가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기본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라는 변방의 언어를 쓰고, 시라는 장르의 특성상 번역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의 순문학 시장이 작기 때문에 이 안에서 전위적이고 다양한 문학이 생존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지시인선 시가 해외에 80권 넘게 번역 됐다는 건 놀라운 사건이고, 최근 김혜순 시인의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에서 보듯 문지시인선은 세계 독자들이 함께 읽는 그런 시가 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대표는 문지시인선을 버티게 만드는 동력으로 젊은 독자들의 지속적인 유입을 꼽았다. 그는 "젊은 독자들이 끊임없이 유입되고 시인들이 탄생하고 있기 때문에 문지시인선 600호가 오늘날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문지시인선600 기념호에 붙인 발문에서 문학평론가 강동호는 "우리 사회가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시가 건네는 희망의 증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증거하며, 여전히 인간에 대한 믿음이 포기되지 않고 있음을 증언한다"면서 "그 증언의 진실성을 신뢰하는 증인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시의 말이 촉구하는 진실에 대한 비전과 함께 시는 우리를 끌고, 기어이 미래로 갈 것"이라고 썼다.
하재연(문지시인선 528)은 "등고선마다 고인 피들은 내가 모르는 지도를 그리기 위해 한 방향을 갖는다/ 나는 빙하의 바다 위에 떨어지는 한 눈송이와 같이 희박해진다"고 시의 말을 전했다. 이제니(문지시인선 520번 )는 "누군가의 울음인 듯 내 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들"을 언급하거니와, 최영숙(창비시선 500호)도 '울음이 있는 방'에서 시를 찾는다.
'그런 방 기억에 있네/ 바람 부는 초봄이었는지 제 그림자 지우며/ 기인 담벼락 양지를 따라가던 그 끝에/ 울음이 있는 방 그늘은 깊었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눈물은 왜 배고픔인지/ 허기진 꽃대 마당 가득 휘어 있었네/ 그 여인 아직도 울고 있는지/ 어린 날의 나 아직도 품고 있는지'
문지시인선 512번 이영광은 "신음보다 인간의 고통을 더 잘 전해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면서 "시는 침묵의 미궁에 빠진 영혼이 어쩔 수 없이 타전하는 모든 종류의 기척과 신호"라고 '시의 말'을 전한다. '소리 없는 울음과 침묵의 기도로 이루어진 시'라는 것은, '다만 사랑의 습관'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비시선500 표제로 차출된 이대흠의 '목련'.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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