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예술에 몸을 맡긴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6-27 16:50:31
9세 때 미국 이민, 영어 소설 쓰며 세계적 작가로 부각
뿌리 탐색 첫 소설 이어 발레 모티브로 예술의 본질 탐색
"전쟁 화염 꺼지지 않는 세상 순수예술은 어떤 의미인가"
지난해 첫 장편 '작은 땅의 야수들'로 러시아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았던 한국계 미국 작가 김주혜(38)가 두 번째 장편 '밤새들의 도시'(김보람 옮김· 다산북스) 한국어판을 펴냈다. 그가 '예술가의 예술에 대한 러브스토리'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장편은 발레를 소재로 그 세계의 핍진한 디테일을 세세하게 살리면서 예술의 본령을 천착하는, 활자로 '훨훨' 풀어낸 무대처럼 뜨겁고 역동적이다.
조선의 야생 호랑이를 소재로 대한민국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담아낸 '작은 땅의 야수들'이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면서 국제적인 작가로 부각된 김주혜는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오랜 전통의 영국 문예지 '그란타'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첫 소설에서 자신의 뿌리를 다루었던 그가 이번에는 어린시절부터 친숙했던 발레를 붙들고 예술을 직면하는 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성장한 중심 화자 나탈리아. 1막에서 그는 어린시절 앞집의 우크라이나인 부부의 아이가 발레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 세계에 입문했고, 입학하기 어려운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들어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는 가장 높이 나는 발레리나였다. 그가 마린스키에서 활약하다 모스크바의 볼쇼이에 스카웃돼 다시 활약을 하는 가운데, 그곳의 험악한 경쟁체제 속에서 견제와 음해에 시달리다 '사샤'라는 발레리노와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이 2막이다.
이어지는 3막에서 파리 발레단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연인과도 헤어지고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무대를 떠나는 과정이 전개된다. 결정적인 클라이막스 무대 '코다'에서는 그녀가 다시 2년 만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마린스키에서 헤어졌던 연인과 '지젤'을 추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전개된다. 그들에게 사랑은 이제 별개의 문제다. 예술만이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대에서 체험한다.
3막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발레 무대를 보는 듯하기도 하고, 작가의 말처럼 사랑을 말하는 모차르트의 23번 피아노 콘체르토의 3악장을 활자로 듣는 듯한 구조이기도 하다. 한국 기자들과 만난 그는 "클래식 음악과 발레는 저에게 늘 안식처이자 가장 뜨거운 열망이었다"면서 "이번 소설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을 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한 사람의 솔리스트가 자신의 장기를 보여주는 이 협주곡을 바탕으로 나탈리아의 스토리를 통해 예술가와 예술 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나아가 "인류가 맞이한 전쟁과 기아가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순수 예술을 하면서 정직하게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어로 작품을 쓰는 본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저를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늘 한국인 소설가라고 생각했다. 김지하 시인 같은 분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 왜 미국문학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이 없었는지, 답을 찾았다. 저에게 본보기가 된 지성인의 콘셉트가 사실은 한국에 있었다. 미국 소설가나 지성인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문학은 단지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침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한국 문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저에게 영어가 더 쉬운 것은 맞는데, 영어와 한국어가 주는 장점은 각기 다르다. 영어는 구조상 문장을 길게 쓸 수가 있다. 긴 문장과 더불어 문단도 길어지고 완성된 글 자체가 더 길어질 수 있다. 한마디로 호흡이 길어질 수 있다는 의미인데, 영어라는 언어의 특성 자체가 논리적으로 순서가 진행되기 때문에 긴 문장도 머릿속으로 잘 이어갈 수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호흡이 긴 글을 좋아한다. 한국어가 저에게 주는 첫 번째 장점은 철학이다. 한국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성질이 주는 가치관과 사고방식,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과 따뜻함과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메타포적(은유적) 성질이 강한 한국어는 굉장히 문학적인 언어이다."
"모차르트는 특히 그렇죠! 그의 음악은 상징으로 가득하니까요. 예를 들어, A장조로 곡을 쓸 때마다 모차르트는 사랑을 묘사했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식용 금박을 입힌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실망스럽게도 평범한 초콜릿케이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발레의 모든 동작과 움직임도 내재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모차르트의 A장조처럼요."_ '2막'
-클래식 음악이 소설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일단 어떤 감동을 느껴야 되는지 알게 된다. 저에게 책은 한마디로 음악을 책의 형식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A장조 23번을 들었을 때, 아 저렇게 사랑은 고결한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락한 것이구나, 이런 걸 느꼈다. 모차르트가 사랑을 말할 때는 A장조로 작곡한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클라리넷 협주곡도 그러하다. 클래식 음악의 구조와 리듬, 각 악장의 테마와 카운터 테마, 감정선, 각기 다른 부분에서 나오는 악기들, 이런 것들을 글로 옮긴다."
-발레 소재 소설은 흥행이 어렵다는 주변 우려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인 이유는?
"제가 갖고 있는 예술에 관한 생각을 절규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지, 예술은 과연 지금 이런 세상에 사치스러운 것인지, 어떻게 하면 예술가로서 떳떳하게 살 수 있는지 답을 찾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결코 사랑과 정반대가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운 예술은 결국 사랑과 인간애로 갈 수밖에 없다. 유행을 좇기보다 내 작품이 앞으로 반세기, 1세기가 지나도 독자들이 찾을 만큼 가치 있는지 돌아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춤을 어떻게 추든 간에 세상은 계속 화염에 휩싸일 것이다. 재가 날리고 불이 타오르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클래스를 듣고 리허설을 하고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진정한 예술을 실천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예술의 정점은 이타심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을 반대하고,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모두와 친구이며, 이들은 각각 국적이나 출생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자아를 갖고 있다. _ '3막'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 고민 되지는 않았나?
"이 소설 집필을 시작했을 때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본토를 침략하기 전이었다. 저와는 무관하게 이렇게 세계 정치의 흐름이 바뀌었다. 저는 단 한 번도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 책을 쓰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검열이다. 저는 제가 목숨을 걸고 증언할 수 있는 소설만 세상에 낸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누가 공격을 하든 떳떳하다. 소설을 읽고 판단해 달라."
-아홉 살 때부터 배운 발레는 문학에 어떤 영감을 주는가.
"제 능력은 발레리나에 못 미치지만 감수성이나 천성은 발레리나이다. 마린스키의 유명한 무용수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은 너무 이성적이어서 발레리나를 못한다고 말한 적 있다. 발레를 할 때는 비합리적인 예술에 대한 희생과 열정과 애정이 필요하다. 제 천성이 바로 그렇다. 문학에 바치는 열정도 마찬가지고, 제가 느끼는 영감과 희열도 마찬가지다. 문체에도 온도가 있는데 제 온도는 굉장히 뜨거운 편이다. 이런 에너지와 영혼이 발레를 굉장히 닮았다."
서로 상처를 주고 헤어졌다가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다시 만나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춤을 추는 '지젤' 속 나탈리아와 사샤. 그들은 춤이 끝난 후 둘 다 울면서도 서로를 위로하지 못한다. 무대에서 중력을 거스르며 예술에 몸을 맡긴 그들을 두고 김주혜는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비극은 '어떻게 될 수 있었는지'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의 간극에서 일어난다"면서 "그러나 내가 꼭 말하고 싶은 건, 그 간극이 대부분 아름답다는 사실"이라고 썼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도 끝이 있는 법이다. 사실, 위대하려면 반드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삶에는 결코 끝이 없다. 한 가닥의 실이 매듭지어지고 다른 가닥이 끊기더라도, 영원히 흐르는 음악에 맞춰 계속 엮이며, 오로지 무한대의 높이에서만 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_ '커튼콜'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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