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쏠림 문학판에 맞서 오른손이 하는 실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9-05 16:53:23
신인부터 중진까지 작가들 10명이 참여한 단편집
각기 다른 문체와 주제로 선보이는 다양한 이야기들
"큰 출판사, 일부 작가들 중심 문학판에 맞서는 기획"
올해 갓 나온 신인에서부터 등단 40년을 넘긴 중진까지 소설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편을 선보인 소설무크지가 출간됐다. 상대적으로 이즈음 독자들에게는 자주 노출되지 않은 이들의 작품은 틈새를 메우며 문학의 다양성을 환기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신생출판사 '잉걸북스'에서 내놓은 소설무크 1호 '오른손이 한 일'이 그것인데,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문체와 주제로 10개의 스펙트럼을 펼친다.
이번 소설집에 참여한 작가들은 정길연 김도연 양선미 태기수 권재이 박정윤 강희진 남궁순금 원경란 허지영 등 10명이다. 등단 역순으로 단편들을 배치한 이번 소설집은 허지영의 '버벅 게임'이 문을 열었다. 이즈음 젊은 세대의 방황과 무기력한 현주소를 한글 자음 'ㅇ'을 소재로 풀어가는 독특한 단편이다.
'나는 자음 ㅇ이 좋다. 첫소리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운뎃소리가 말할 수 있도록 조용하게 배려하고, 앞 음절의 받침이 올라와 소리 낸다 해도 욕심 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ㅇ, 그렇다고 무조건 양보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낟, 낫, 났, 낮, 낯, 낱, 낳'처럼 각각 다른 자음 받침들이 'ㄷ' 소리로 모일 때 끝소리 'ㅇ'은 맑고 청아한 제 소리를 고집한다. 혀의 뒷부분과 여린입천장 사이에서 나는 소리, 없는 듯 있는 소리 이응을 말하면 상큼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멕시코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나'는 무음(無音)으로서 모음이 주체가 될 수 있게 비워주는 자음 'ㅇ'의 역할을 좋아한다. 없는 듯 있는, 받침으로 쓰일 때는 분명하게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ㅇ'처럼 나는 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멕시코까지 흘러들었다. 문제는 한국에 두고 온 동생 '시우'가 세상으로 열린 문을 닫고 자신만의 고치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다. 세상과 단절돼 있어도 나와는 말이 통하는 단 한 사람이었는데,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안타까움이 크다.
어린시절 시우와 '버벅 게임'을 하곤 했다. 한 음절을 받침 없이 분절 후 다시 첫소리에 'ㅂ'을 넣어 발음하는 언어유희였다. 예를 들어 '해뱅보복해배'는 '행복해', '사바라방하반다바'는 '사랑한다'처럼, 그들끼리만 소통하는 말하기였고 말이 꼬이거나 늦어지면 지는 게임이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있어도 말이 통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버벅거리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이즈음 한국사회 젊은 세대의 좌절과 무기력을 상징하는 '시우'와 소통하는 '나'의 '버벅 게임'은 진심이 통하는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 역설을 보여준다.
실제로 멕시코에 거주하는, 올해 갓 등단한 허지영은 "각진 한글의 자음과 모음 속에서 시각 디자인으로도 부드럽게 동글동글 이어주는 'ㅇ'처럼 그렇게 나는 살고 싶었다"면서 "다행스럽게도 내가 할 말을 미리 알고 챙겨주는 시우가 곁에 있는 동안 나는 노력 없이 첫소리 ㅇ이 되었지만, 끝소리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직감한 후 나는 구르고 굴러 지구 반대편까지 옮겨 왔다"고 소설을 맺었다.
마지막에 수록한 표제작 '오른손이 한 일'은 198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41년차 소설가 정길연의 단편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무의식을 좇아가며 실험적 플롯으로 설계한 작품이다. 암 말기 판정을 받은 언니를 간병하는 동생이 병실에서 겪는 일과 언니의 꿈이 교직된다. 병실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며 안하무인으로 굴던 '제시'라는 여자의 투신에 투사된 언니의 생각은, 살인인지 자살인지 모르는 모호한 상황이 꿈을 통해 제시된다. 동생 '정미'의 말이 이 소설의 고갱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없어. 오직 순간적인 결정이 있을 뿐이야. …거기에는 선과 악이 개입할 여지가 없지. 섬광 같은 찰나에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기제는 본능뿐이거든. 본능은 생리 현상이야. 자기 의지로 통제가 안 돼. 음험하고 충직하지.'
정길연은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 평소에 자주 생각을 하는 편이지만 막상 그 끝은 계획대로만 되지 않을 것 같다"면서 "모든 일들은 우연히 오고 그 일을 결정할 때에도 결국은 즉흥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오른손'이란 능동적 행위 주체의 상징이거니와, '음험하고 충직한' 정길연의 오른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은밀한 선행에 관한 성경 말씀을 전복한다.
첫머리를 연 신예와 마지막을 장식한 중진 사이 중간쯤에 포진한 권재이 단편 '오우무아무아'도 눈길을 끈다. 권재이(권정현)는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혼불문학상(2017)을 수상한 작가로, 깊은 사유와 시적인 문체가 돋보이는 소설을 선보였다. '오우무아무아'란 하와이어로 '먼 곳에서 온 첫 번째 정찰자'라는 뜻으로, 하와이 천체망원경에 32일 남짓 포착됐다 사라진 항성의 궤도를 칭한다. 그것은 너무 희미했고, 너무 빨라서 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으며 도달 불가능한 거리에서 도래한 것처럼, 애초에 관측이 아닌 스침에 가까운 방식으로 지나갔다.
'오우무아무아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나갔다는 사실'로 남았다. 그건 단지 물리적 궤도가 아니라, 어떤 기억처럼 마음에 박혀버린 못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음악이었다. 잊어버린 선율처럼, 어디선가 울리고 있었던 음악.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스침, 그리고 시간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성간의 잔향. …그것이 나의 기억이고 나의 시간이며 내가 끝내 놓지 못한 너의 흔적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쓸쓸한 하루의 모퉁이에서 내 그림자를 밟고 선 너를.'
천체물리 동아리에서 만난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잊지 못한 화자에게 비 오는 날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또 다른 여자는 저 궤도와 닮았다. 지나가버린 사랑이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그 사랑이란, 지나갔다는 사실만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혀 있는 희미한 음악이다. 천체의 운항이 연주하는 거대한 우주음악처럼 공명하는, 관념적 사유를 곱씹게 하는 시적인 단편이다.
이들 세 개 별 사이에 각기 개성을 품은 또다른 항성들이 떠 있다. 중진 작가 김도연은 강원도의 삶과 정서를 오랫동안 특유의 푸근한 문체로 풀어왔거니와, 이번 단편 '눈-김과 함께 여행하는 법'에는 박석눈이 내리는 아버지의 기일 풍경을 담았다. 아버지 '김'의 생전 동영상을 함께 보면서 티격태격하는 형제들, 술을 마시다가 밤에 마당에 나가 더불어 눈을 치우는 모습, 꿈에 나타난 아버지에게 떠밀려 소파 밑으로 떨어진 어머니 이야기들이 겨울밤 애틋한 소극으로 전개된다. 남궁순금의 '평화로움에 대하여'도 아버지의 죽음을 다루거니와, 호스피스 병동의 마지막 병실 '요셉방'에서 맞는 평화를 그린다.
양선미의 '영애 언니'는 아파트 중년 여성들의 모임을 통해 인간들의 가볍고 이기적인 세태를 잔잔하면서도 서늘하게 담아낸다.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가 강희진은 '함박눈'으로 죽음을 앞둔, 억울하게 살인죄를 뒤집어 쓴 남자의 마지막을 특유의 서사력으로 찬찬히 따라간다. 박정윤의 '현란한 여름'은 절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의 시선으로 이권을 둘러싼 인간들의 행태와 절집의 청량한 공간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태기수의 '교실 이데아'도 실험적 기법으로 청소년 이야기를 따라간다. 지난해 등단한 원경란의 '언어도단'은 자신의 허물을 잘못된 피를 물려받은 탓으로 돌렸던 여자의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 핏줄을 대하는 편견을 드러낸다.
'소설무크'를 기획한 신승철(소설가) 잉걸북스 대표는 "60명이 한 방향으로 달리면 1등에서 60등까지 우열이 가려지지만 60명이 각자의 방향으로 달리면 누구나 1등"이라는 이어령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 방향으로 달리지 않는,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온 작가들의 소설을 모아 단행본으로 펴냈다"고 밝혔다. 그는 "큰 출판사와 젊은 후배 작가 위주로 한국문학이 쏠리는 상황이어서 많은 선후배 작품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아 아쉬웠다"면서 "작품이 모이는 대로 1년에 4권까지도 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애초에는 투고를 받아 선별해서 수록할 작정이었지만 처음이라서 여의치 않아 기성 작가들에게 청탁한 것인데, 2호부터는 '고양이, 부르면 오지 않는 것들'이라는 테마로 기성 신인 가리지 않고 투고를 받아 펴낼 예정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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