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짠한 K-아재, 미워하지 말아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6-01-23 15:11:52

새 소설집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 펴낸 이경란
입체적으로 그려낸 이른바 'K-아재'들의 행태와 내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 학습한 세대의 소통 문제
"이해할 수 없어도 그냥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중요"

한국 사회에서 '아재'라는 말은 중장년 남성을 일컫는 친근하거나 낮춘 호칭으로 정의된다. 생물학적 중년이라기보다 시대와 미묘한 시차를 드러내는 인물형으로 어색하지만 무해하고, 웃으며 놀릴 수 있는 존재로 '꼰대'와는 다른 풍자적인 존재에 가깝다. 여기에 'K-아재'라는 명명을 보태면 그 양상은 어떠할까.  

 

▲ 세 번째 소설집을 펴낸 이경란. 그는 "처음부터 K-아재 시리즈를 쓰겠다고 계획하지는 않았다"면서 "한 편씩 써나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이어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경란 세 번째 소설집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강)는 이른바 K-아재의 다양한 면모를 유머와 풍자를 담아 드러내는 작품들로 대부분 채워졌다. 전작 '사막과 럭비'가 전부 여성 서술자였던 것과 달리 모두 남성 서술자를 내세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지만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립된 한국 중장년 남성들을 '웃프게' 파고든다.

이경란은 이들이 "짠하다"면서 "그들이 열심히 살았고 행복하고 싶었지만, 가부장제 틀 속에 성장해 사랑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도태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말미에 배치한 'K-아재의 깨물근'은 목적의식과 성취욕을 상징하던 '깨물근'이 나이가 들어 힘을 잃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지위와 가정 내 권위를 잃어버린 중장년 남성들의 서글픈 처지를 보여준다.

-'K-아재'는 패배자인가.
"인생에서 승리자는 없는 것 같다. 전부 다 패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너무 염세적이거나 암울하게 보는 것은 아닌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에서 성공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 K-아재를 보면 짠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열심히 살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으며 누군가로부터 사랑도 받고 싶었을 텐데 결국 그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서 성장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한다."

-K-아재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어릴 때부터 가부장제를 높은 가치로 학습하면서 세뇌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바뀐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의 적극적인 잘못이 아니라, 단지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을 뿐이다. 50~60대 아재들은 고집이 세서, 자신을 바꾸려는 의지가 별로 없는 것도 문제다. 변하는 사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도 부족하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데, 그런 태도를 용인하는 세상은 이제 아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자기는 변하지 않으면서 아랫세대는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하고 심지어 자기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이해를 못 하면서 단절을 겪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써 보고 싶었다."

'밥 한 번 먹어요'의 50대 독신남 아재는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시골에 내려와 북카페 '로시난테'를 들락거리다 '한정'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 여성이 친절하게 말을 걸고, 책을 같이 읽고, 그 남자의 집에 선물 박스를 들고 찾아오는 과정에서 아재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한다. 용기를 발휘해 집에 찾아온 그녀에게 키스까지 시도하는데 '한정'은 뜨악하게, 나중에 '밥이나 한 번 먹자'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떠나간다.

-이 아재, 무엇이 문제였을까.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 특히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하는 법, 이성 대 이성으로 소통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 단편은 농담에서 촉발됐다. '친절하게 대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라는 밈이 유행한 적 있는데, 여성의 시각에서 남성들이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또는 상대방 의중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토로하는 밈이었다. 소설 속 남자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굉장히 순정하고 친절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지만, 소통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거다." 

'임대사업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저만치 가던 제3의 아재가 뒤돌아보았다. 빨리 와! 소리치며 손짓을 했다. 간다고. 갈 거야. 갈 건데, 그런데…… 이 새끼가 집을 팔았다잖냐. 집을 팔았대. 재산이라곤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집 하나뿐인 놈이 그걸 팔았다네? …이제 이탁의 손은 툭, 툭, 제2의 아재 어깨를 아주 일정한 간격으로 치고 있었다. 끄억, 끄억, 이탁이 툭, 툭, 칠 때마다 소맥잔이 넘쳐흐르듯 제2의 아재 목에서 울음이 꿀럭꿀럭 흘러나왔다.'_'K-아재의 깨물근'

'깨물근'이란 말 그대로 이를 깨물 때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턱 근육을 이르는 말이다. 'K-아재의 깨물근'은 아재들이 모여 술을 마시다 길거리를 누비며 노래방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단편이다. 임대사업자 아재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은퇴 백수 신세로, 살아온 내력이 허무해 신세타령을 한다. 그 가운데 아재 하나는 뻐근하던 잇몸 때문에 고통받다가 침을 뱉었는데, 침과 함께 누르스름하고 딱딱한 것이 툭 튀어나갔다. 깨물근을 지탱하던 소중한 것 하나가 어둠 속에 깊숙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어쩌다 '깨물근'인가.
"깨물근이라는 용어가 재미있었다. 저작근(咀嚼筋)과 깨물근은 같은 말이지만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K-아재가 생활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감각이라든가 에너지, 이런 것을 상징하는 근육으로 설정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깨무는 거에는 목적 의식과 성취욕도 있고, 힘도 있다. 결국 나이가 들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힘이 없어지고 사회적인 지위도 잃게 됐을 때, 가정에서 권위를 인정 못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서글픈 현상과 처지, 이런 걸 얘기해 보고 싶었다."

'삐이유우우웅' 'K-아재의 가자미근' '소파인간 외출하다'는 은퇴한 백수 남자 '백호종'을 내세운 3부작이다. 노는 사람이 백호종밖에 없어 그가 장모 간병인으로 나선다. 백서방으로 불리던 그는 병실에서 장모가 그를 부를 때마다 '똥…'이라는 말을 해서, '똥'으로 불리는 처지가 된다. 처형은 잠깐 들러 봉투 하나 내밀면 끝이고, 일하는 아내는 '남 주느니 당신 준다잖아, 간병비'라며 정나미 떨어지는 말을 구사할 뿐이다. 장모가 퇴원한 후에도 간병을 도맡는 이 남자가, 황당한 상황에서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문고리를 붙잡고 '가자미근'(종아리를 지탱하는 기본 근육)에 온 힘을 주는 장면이 담긴 말미는 우습고 서글프다.

한바탕 잘 짜인 소동극인데, 이경란은 "좀 유머러스하고 능청스러운 소설을 계속 쓰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서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풍자나 조롱, 이런 걸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존재"라고 말했다. 장모 간병에서 놓여난 뒤 소파에서만 뒹구는 그를 두고 '소파 인간'이라고 아내는 부르는데, 그가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퍼포먼스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다. 구멍 사이로 손만 내밀고 관람객은 그 손에 온갖 행위를 하는데, 정작 그만이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지 못한다.

-소파 인간의 퍼포먼스가 담은 의미는?
"백호종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생이라는 게 알고 보면 아주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 부조리를 깨달으면서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맞서지 못하고 수용하고 체념하게 된다. 백호종은 굴욕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술에 편승하는 것인데, 사실 아무리 예술이 훌륭하다고 해도 인간의 삶보다 더 훌륭한 예술은 없다는 생각이다. 소설을 아무리 곡진하게 쓴다고 해도 한 사람의 삶보다 더 곡진할 수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시 가림막 안으로 들어가는 백호종의 용기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 이경란은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진짜 사랑인 것 같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표제작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는 지적인 'K-아재' 아버지와 성장기부터 갈등을 빚으며 밖으로 떠돌던 아들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지난 세대 '퀴어'의 아픔을 지닌 존재로, 아들은 본디 존재했거나 없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화해로 나아간다. '최소한의 나'나 '무슈 파비용의 굴욕'은 자본주의 사회의 환경 문제와 교환 가치를 돌아보는 맥락이다.

'백호종' 3부작은 남편을 6개월 남짓 간병하면서 집필했다. 소설집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세상을 떴다. 이경란은 "어쩌면 이 소설들은 나의 배우자를 이해하고 싶어 썼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면서 "덕분에 공포와 절망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썼다. 그는 "K-아재를 미워하지는 말자"면서 "누구든 이해할 수 없어도 그냥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작가의 말.

'아무래도 완전한 이해란 지상의 몫이 아닌 듯하다. 그러니 오해는 오해로 남겨둘 수밖에. 그 오해들 사이에서 다만 부딪히고 체념하고 희구하려 한다. 그것이 산 자의 몫일 터이니.'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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